2017. 12. 14. 16:43ㆍ지맥산행/생활상식? 알면 도움~
명진스님
존경하는 스님중의 한분이네요.
올곧은 일에 앞장서시는데
세상은 스님을 넘 삐뚤하게만 보시네요...
(명진스님 희노애락 표정)
무소유의 법정 스님 장례가 끝나자마자 서울 봉은사의 직영사찰 지정 문제가 불거졌다. 정치권 개입설이 얽혀 이 문제는 커다란 관심을 끌었다. 하지만 해군의 천안함 사고로 이 문제는 치열한 쟁점에서 벗어나는 듯하다. 천안함 침물로 이 문제도 이렇게 침물하고 말 것인가...... 그 동안 인터넷에서 접한 봉은사 명진 스님의 말 중 마음에 와닿은 말을 모아보았다.
1. 정부에서 이 (천안함 침몰) 사고 때문에 국가안보회의를 주재하는 것을 보았다. 하지만 그 자리에는 총 한 번 쏘지도 않은 면제자들이 대거 있었다. 나는 군대를 피하거나 석연치 않은 이유로 면제를 받은 사람들은 정치도 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출처)
2. 거짓말하는 놈, 사기치는 놈, 남의 글 제글로 발표하는 놈, 탈세범, 병역기피자가 있는지 골라서 찍어라. 거짓말, 사기꾼, 파렴치범, 불신과 분열, 갈등을 조장하는 후보가 있는지, 잘 가려서 봉은사 신도들만큼이라도 올바른 주권을 행사하길 바란다. (출처)
3. 두 번 거절 끝에 이상득 의원과 점심을 먹는 자리에서 내가 반야심경의 '般若(=지혜)'가 무슨 뜻인지 아느냐고 묻자, 이 의원은 모른다고 했다. 이에 대해 나는 이명박 후보가 서울시장 시절 했던 언사들이 앞으로 대통령이 되면 종교갈등을 유발할 수 있어 걱정스러우니 불교에 대한 최소한의 이해를 갖추라고 했다. (출처)
4. 김성광 목사가 본인 교회에서 신도들을 모아 놓고 설교하기를 '나는 얼음 깨는 배가 되어 앞으로 가겠다. 불교를 깨부수고 우상을 깨부수고…' 이런 막말을 쏟아냈다. 얼마 전에는 봉은사를 지칭하며 '떡이나 얻어먹는 20만 명의 신도가 있는 봉은사가 반국가 단체의 소굴'이라고 막말했다. 성경에서 여호와 하느님이 임하지 않은 곳이 없다고 했다. 성경 말씀대로 하면 이 법당에도 하느님이 있고 처처곳곳에 하느님 아니 있는 곳이 없는데 불교를 깨부순다는 것은 하느님이 임한 곳을 깨부순다는 것으로 이런 막된 언행을 앞으로 하지 말라. (출처)
5. 한국사회가 도덕적이냐? 서로 믿고 신뢰하고 형성된 사회인가. 경제만 좋아지고 먹고사는 것만 좋아지면 좋은 세상인가. 이제 냉정한 시각으로 바라봐야할 때가 됐다. 거짓말을 밥먹듯이 하는 사람, 약속과 신의를 손바닥 뒤집듯 하는 사람, 남의 논문 표절하고도 끄덕없는 세상이 좋은 세상이냐. 우린 그런 세상에 살고 있다. 부끄러워 할 줄 알아야 한다. 부끄러움 없이 그저 돈만 안다. (출처)
6. 신도들이 기대하는 마음을 생각하면 늦잠을 자고 싶기도 하고 빠지고 싶기도 한데 신도들 때문에 여기까지 왔으니, 신도들이 부처님이요 호법신장이라고 생각했다. 그 마음으로 절 했다. 중노릇 나 혼자 하는 것이 아니라 같이 하는 거구나 느꼈다. (출처)
7. 안상수는 아무데나 좌파 갔다 붙이면 되는줄 아나보다. 아마도 자기 부인이 밥을 못해도 좌파 부인이라고 했을 것이다. 자식이 공부를 못해도 좌파 자식이라고 할 것이다. 지나가다가 개가 짖어도 좌파 개라고 할 것이다. 이 민족을 분열과 갈등으로 몰아가는 안상수 대표는 정치 손 떼고 뒤로 물러나기를 권한다. (출처)
8. 정치라는 것이 행위를 통해서 내가 이익을 보면 정치적일 수 있다. 거대한 권력앞에 굴하지 않고 옳은 소리 하는 사람 있어야 한다. 저한테 무슨 이익 있겠나. 정권에 굽신굽신하고 한국불교가 그렇게 살았다. (출처)
▲ 설법하는 명진 스님 (사진출처: 불교닷컴)
한국인의 기질 중 하나가 빨리빨리이다. 하지만 봉은사 문제 관련 일부 당사자들은 여전히 입을 다물고 무반응이다. 한편 천안함이 침몰된 지 여러 날이 지났지만 아직 원인규명은 고사하고 실종자 행방도 찾아내지 못하고 있다. 한국인의 빨리빨리주의가 순기능을 발휘해 이 두 문제를 빠른 시일내에 매듭을 짓기를 기대해 본다.
주) 명진스님 약력
약력
1950년 충남 당진 출생
1969년 해인사 백련암에서 출가
1974년 법주사 탄성스님을 은사로 사미계
1975년 혜정스님을 계사로 구족계
1975년 송광사, 해인사, 봉암사, 상원사, 망월사, 용화사 등 40안거 수행
1987년 불교탄압대책위원회 위원장. 개운사 주지
1988년 대승불교승가회 회장
1994년 조계종 종단 개혁회의 상임위원
2000년 ~ 2002년 조계종 민족공동체추진본부 상임집행위원장
2005년 봉은사 선원장
2006년 봉은사 주지
- 20여 년간 사회운동과 종단 행정 등 다양한 활동을 하면서도 매년 산철안거를 빼먹지
않고 선승의 기본을 지켜옴
- 1987년 서울 개운사 주지를 1년한 것이 경력의 전부인 선승
- 해인사와 경북 문경 봉암사 선방에서만 20여년을 보냄
- 1982년 관광객들이 휘젓던 봉암사의 산문을 폐쇄해 1940년대 봉암사 결사의 선맥을
다시 세우는 데 앞장섬
- 감옥에 가게 된 계기는 1985년 해인사로 있을 때. ‘5.3 인천사태’로 경찰에 쫓기는 수배자 한 사람이 산사에 숨어들었다. “스님 감옥 한번 갔다 오면 공부에 많은 도움이 돼요. 무문관(독방 문을 폐쇄하고 1년이상 계속하는 정진) 갈 필요없어요. 독방도 줘요”라고 하는데, 꼭 ‘고향에 가보라’는 소리로 들리더라. 그래서 ‘감옥에 가봐야지’생각하고 뛰어들었다. 그해(1985년) 봉은사에서 12.7 법난 규탄대회를 열다 구속돼 수감됐다. 3년 들어갈 각오로 다 내가 했다 라고 했는데, 2개월밖에 못 살아 창피하다고.. 당시 변호사를 맡은 조영래 변호사가 감옥에서 늘 싱글싱글 웃는 명진스님을 보고 “공안사범 여러 번 봤지만 스님은 뭐가 그리도 좋으시냐‘고 물은적도 있다고 한다.
* 12.7 법난 규탄대회
10·27 법난(80년 신군부에 의해 절이 짓밟힌 사건)에 반발한 사건
법난 -> 1980년 10월 27일 새벽 2시 조계종(曹溪宗) 총무원 이하 전국의 주요사찰에 계엄군이 진입해 송월주(宋月珠) 총무원장 등 46명을 연행하고 사찰의 총무관련서류·재산관련서류·예탁금증서 등을 압류해간 사건. 당시 계엄군의 '불교계 정화수사계획(45계획)'에 따라 대한불교조계종(조계종)의 스님과 불교 관련 인사 등 153명을 강제 연행하고 전국의 사찰과 암자 5731 개소를 일제히 수색했던 사건이다.
부처님 법이 엄존하는 지엄한 도량, 도량의 佛法僧(불법승) 삼보가 훼손 됬다해서 줄여 법난이라 한다. 스님이 수모를 당한것은 부처님이 수모를 당 한거나 같다는 말이다.경신대법난(庚申大法難)이라고도 부른다. 계엄사령부는 이 사건에 대해 "상당한 기간이 경과해도 불교계 자체가 아무런 정화 움직임을 나타내지 않아 자력으로는 도저히 갱생의 힘이 없는 것으로 판단, 부득이 사회정화 차원에서 철퇴를 가한 것이며, 그 목적은 불교 내부의 분규 종식, 부정축재와 비리행위자 색출 및 종단 재산관리와 해외활동을 둘러싼 사기행위자·국위손상자 색출에 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불교계 일각에서는 이 사건 이전인 1980년 8월 5일에 불교관계법 개정 5인추진위원회를 구성했고, 9월 16일 불교관계법 개정시안을 마무리해 문공부에 제출했으며, 10월 20일 조계종단의 자율정화 세부지침을 확정하는 등 불교계 내에 자율적 정화의지가 팽배하고 자체 정화방안이 발표된 상황에서 이 사건이 발생했다는 점으로 계엄사령부의 발표를 부정했다. 곧 이들은 이 사건의 목적이 계엄사령부의 발표와는 달리 불교재산관리법의 철폐 및 시정을 요구하자는 조계종의 자율적 정화의지에 대한 두려움과 광주민주화운동 이후 정치범의 색출 및 민주정의당의 정치자금 마련,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한 국민의식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한 방편 등에 있었다고 주장했다.
<괴산 낙영산 공림사>
낙영산 아래 자리잡고 있는 공림사는 신라 48대왕 경문왕(861-874)때 자정선사가 법력이 있다는 백성들의 칭송이 자자해, 경문왕이 선사의 인물됨을 알고 국사의 칭호와 자정선사가 주석하는 절에 공림사의 이름을 지어 '공림사'란 현판을 내렸다고 전한다.
조선 정종 원년에 함허당 득통화상이 폐사된 절을 중창하고 주석하였으며, 이후 인조 때 중창하였다.
1965년 극락전과 요사를 중건하였고, 1981년부터 13년간 탄성스님이 중건하였다.
특히 공림사 사하촌부터 20여 그루의 고목군락이 있어 흰 바위산인 낙영산과 어울려 한결 운치가 돋보이고 있는 데 아마 인위적으로 조성한 것으로 보인다.공림사의 인근에는 천연기념물 제 266호로 지정되어 있는 희귀한 망개나무가 있다.(망개나무는 우리나라와 중국, 일본 등지에 자라는 희귀종으로, 황색단풍이 매우 아름답고 대체로 따뜻한 곳에서 자란다. 번식력이 매우 약하나 한번 싹을 틔우면 잘 자란다. 잎이 길고 타원형이며 꽃은 6월에 황색으로 피어난다. 열매는 타원형으로 8월에 붉게 익는다. 경상도에서 살배나무 또는 멧대싸리라고도 한다.)괴산 사담리의 망개나무는 속리산 국립공원 근처에 계곡을 중심으로 냇가의 굵은 돌이 많고 흙이 없는 곳과 바위틈에서 자라고 있다. 시도유형문화재 제213호 (괴산군)괴산공림사사적비 또한 존재하고 있다.
문화재자료 제 35호 (괴산군) 괴산공림사부도는 공림사의 뒤뜰에 따로 마련된 곳에 있는 2기의 부도로 동쪽과 서쪽방향에 세웠다. 원래의 자리는 알 수 없으나 비교적 온전한 형태를 작춘 모습이다. 공림사에 있는 2기의 부도는 상태가 대체로 양호할 뿐만 아니라 몸돌이 원형인 것을 제외하면 팔각원당형 부도의 전형적인 특징을 잘 보여주는 좋은 자료이다.공림사는 괴산군 청천면 사담리에 있는 절이다. 절 뒤로 거대한 바위로 이루어진 낙영산의 아름다운 산세가 돋보이고 앞으로는 산들이 부드러운 곡선으로 하늘과 닿아 있다. 일주문을 들어서면서 보이던 낙영산은 마치 백마를 보는 듯 산 전체가 온통 흰바위였다.
“낙영산은 산 전체가 깨끗하고 묘한 바위로 이루어져 있고 웅장하게 골을 형성하고 있을 뿐 아니라 경관이 매우 뛰어난 곳이다. 특히 바위틈에서 자생하고 있는 소나무와 들꽃과 들풀은 뛰어나 생명력과 더불어 이곳의 경지를 아름답게 만든다. 한편 산기슭에 천년고찰이 자리를 잡아 의미를 더해주고 있는 ‘충북의 자연환경명소’중의 한 곳이다.” 공림사 주차장에 있는 낙영산을 소개하는 비에 이렇게 적혀 있었다.
공림사의 창건에 대한 것은 요사 뒤편 ‘낙영산공림사사적비’에 실려 있는데, 이 내용은 1688년(숙종 14)에 경일스님이 찬술하였다고 한다. 비의 내용에 따르면 신라 경문왕 때 고승 자정(慈淨)이 있었는데, 그는 도덕과 수행력으로 널리 이름을 떨치고 있었다. 왕도 그의 명성을 듣고 국사로 모시고 여기에 ‘벽상삼한삼중대광’ 이라는 자리를 더해주고자 하엿으나 그는 거절하고 이곳에 들어와 띠집을 짓고 숨어 살았다. 왕이 이를 전해듣고 보방(寶坊, 사찰)을 지어주고 ‘공림사’라는 사찰명도 내려주었다. 이후 명나라 건문(建文) 연간에 이르러 함허당 득통화상이 자정 스님의 자취를 흠모하여 절의 면모를 일신하였다.
그런데 문제는 자정스님이다. 불교사에 있어 자정이라는 이름은 단 한분 뿐이다, 고려시대 자정국사, 국사는 법주사와 동화사에 머물기도 하였는데, 법상종(자은종)의 고승이다. 신라 경문왕 때 자정스님이 있었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다. 결론적으로 고려시대 자정국사 미수스님이 절을 창건한 것으로 보인다. 법주사와 공림사의 지리적 연계성 등을 고려해볼 때 더욱 그러하다. 공림사는 조선초기 함허당 득통스님의 중창으로 사람들은 ‘함허의 도량’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공림사를 이야기할 때 또 한가지 빼 놓을 수 없는 것이 자복사(資福寺) 지정이다. 조선시대 들어 사찰을 정리하는 과정에 자복사라는 절을 별도로 지정하였는데 지정되지 못하면 대부분 폐사되는 경우가 많았다. 공림사는 처음 1406년도에는 자복사로 지정되지 못하였다가 1407년 12월 2일 자복사를 대규모로 교체하는 조치 때 새롭게 자복사로 지정된다. 공림사의 역사성을 고려한 때문이다.
이후 공림사는 세조가 와서 부처님께 절을 올렸는데, 그 장소가 사적기를 지을 무렵까지 전해 내려오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공림사는 임진왜란 때 일본군에 의해 대웅전을 제외하고는 모두 불타는 시련을 겪고 다시 중창을 하였다가 1950년 한국전쟁 때 또 전소되는 시련을 겪는다. 그래서 지금 공림사에서 보는 모든 건물들은 그 이후에 지어진 것이다. 특히 1981년 탄성스님의 주관으로 13년 동안 대규모 불사로 이루어진 것이다. 대규모 불사라고 해도 그렇게 번잡하거나 무질서하지는 않다. 절은 낙영산처럼 깨끗하고 천년의 숨결이 느껴지는 듯하다. 단아하다. 건물은 최근에 지어진 것이지만 그래도 공림사의 동종만큼은 1776년(영조 52)에 만들어졌다. 그리고 삼성각 오른쪽 30m 지점의 조선시대 부도도 있다. 절 앞이 그래도 트였으면 어쩌면 허할 것도 같은 곳에 고목들이 줄을 지어 더운 날씨에 시원한 그늘을 제공해주고 있다. 절에 들어서서 처음대하는 축대에 종각이 있다. 축대를 올라서면 넓은 마당에 경천사지십층석탑을 옮겨놓은 듯한 ‘적광탑’이라고 부르는 탑이 있다. 그리고 다시 한 축대를 오르면 대웅전이 있다. 이 대웅전 오른쪽으로 관음전과 삼성각이 있다. 공림사의 제일 윗단이다. 삼성각 앞에는 ‘석가탑’이라고 부른 삼층석탑이 있다. 물론 탑은 모두 최근에 만든 것이다.
공림사(公林寺)는 한 때 공림사(空林寺)라고도 표기했었다. 신라 경문왕 때의 자정스님에 의해 초창되어, 당시 이름은 공림사(公林寺) 였으나, 탄성스님께서(2000.6.8.입적)께서 무슨 연유에서인지 공림사(空林寺)로 바꿔 부르셨다고 한다.공림사는 수행의 도량으로 널리 알려진 사찰이다. 때문에 법당은 대웅전, 관음전, 삼성각이 전부이다. 법당 수보다 수행하는 목적으로 사용되는 전각이 더 많다.낙영산이 마치 용처럼 생겨 공림사 들머리의 사담마을을 집어 삼키는 형국으로, 풍수지리에 따라 공림사 들머리에 용이 좋아하는 두꺼비 바위를 만들어 주는 한편 마을 이름을 용이 싫어하는 모래 사(沙)자와 연못 담(潭)자를 써서 지었다고 한다 (출처: 한국의 명찰)
<봉은사 역대 주지 + 역사>
1912년에 첫 주지로 취임한 나청호(羅晴湖學密, 1875-1934) 강백은 사원의 토지를 확보하고 포교와 사회봉사 활동에 앞장서 새로운 흐름을 이끌고자 하였다. 본래 오대산에서 강학에 열중하던 청호화상은 일제 불교의 침투에 대응하여 전통 불교를 수호하려는 원종 종무원에 감사부장으로 참여하며 각황사에서 포교에 나서기도 하였다. 1912년에 봉은사 주지로 초빙된 청호화상은 세간에 나서는 실천행을 제창하여 절 부근의 황무지를 개간, 20만평에 이르는 막대한 토지를 확보하고 사원을 중영하여 30본산 갑찰의 형세를 가꾸었다.
특히 을축년(1925) 7월 한강을 덮친 대홍수 때 청호 화상의 활동은 빛났다. 유례를 찾을 수 없는 대홍수로 한강이 넘쳐 집과 논밭이 떠내려가고 셀 수 없는 사람들이 강물에 떠내려갔다. 청호화상은 사중을 불러 모아 배를 띄우고 물에 뛰어들어 사람을 하나씩 건져냈다. 이렇게 구한 인명이 무려 708인이었다. 그리고는 사중의 재물을 모두 풀어 이재민을 구호하였다. 당시 봉은사의 조실은 뛰어난 선사 한암(漢巖重遠, 1876-1951)이었다. 출세간의 경지를 걸었던 조실의 상황에 적절하게 구사된 법력과 주지의 세간에 다가간 손길이 잘 조화를 이루어 만들어낸 쾌거였다. 경향의 칭송을 한 몸에 모은 주지 청호 화상을 기려 도움을 받았던 광주와 고양의 선리 부리 잠실리 신장리 주민들의 주선으로 수해구제공덕비가 세워지고 당시의 지도층 인사들이 이를 기리는 시화를 모아 불괴비첩(不壞碑帖)을 만들어 이 장한 뜻을 기렸다. 가장 필요한 도움을 어려울 때 행동으로 보여준 진정한 보살행의 실천이었다.
서울 갑찰의 본산이었던 봉은사는 도심 포교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1922년의 마포 포교당을 시작으로 1924년에 안변, 1926년에 인천, 1932년에 서울 관동, 1933년에 서울 현저동, 1934년에 서울 옥천동 등 모두 6개의 포교당을 개설하여 적극적인 포교 활동에 나섰다. 도심에 가장 인접한 봉은사가 나가야 할 마땅한 방향이었다. 본사와 포교당 간의 원활한 교류를 통해 보다 가까이 다가가는 포교의 마당에 봉은사의 역량이 미친 것이다.
사원 운영에도 남달랐던 청호 화상은 퇴락한 전각들을 차례로 중수하여 절의 형세를 정비하였으나 1939년에 화재를 만나 판전을 제외한 건물들은 모두 전소되고 말았다. 그래서 현재 남은 당우는 1941년에 태욱(泰旭)이 중창한 것이다. 광복 후 봉은사는 조계종 총무원 직할사찰이 되었다. 그러나 1950년의 전란으로 당우 대부분이 소실되고 말았다. 그래서 전란이 끝나고 부분적인 중창불사가 이루어져 지속적인 발전을 보였다. 그리고 1960년대 정화를 겪으면서 통합종단 조계종이 출범하고 봉은사도 새로운 출발을 하게 된다. 1964년에는 한국대학생불교연합회의 수련도량으로 대학생 수도원이 봉은사에 건립되어 영명한 젊은이들이 이곳에 모여 정진을 거듭하였고, 이들은 다수가 현재 한국 불교계 또는 사회 지도층 인사가 되어 이 시대를 이끌어 가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1972년에는 동국역경원이 설치되어 대장경을 우리말로 번역하는 전당이 되었다.
현재 대웅전을 비롯하여 선불당 영산전 명부전 영산전 북극보전 판전 충령각 운하당 선원 심검당 법왕루 보우당 진여문 등의 당우가 미륵대불과 함께 경역을 이루며 대중적 포교활동과 사회복지를 실현하는 도심 대찰의 위상을 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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