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고서원에서 포은 선생을 만나다.

2015. 9. 26. 19:58산따라 길따라

>>>임고서원<<<

0 위치: 경북 영천시 임고면 포은로447 

 

누군가 영천에 가면 임고서원을 꼭 보라고 신신당부를 하였다. 원래 올 일정은 영천 묘각사를 보고 기룡산을 올라 능이버섯을 구경할려고 들렀는데,,송이철이라서인지 온 산에 출입통제가 되어서 절만 구경하고 내려오면서 임고서원을 보기로 하였다. 임고서원은 경북 영천시 임고면 양항리에 위치하고 있으며 포은 정몽주 선생이 자란지역이라고 한다.지방의 작은 도시인 영천에서는 많은 인재들이 배출되었는데 그 중에서 손꼽자면 고려말에 화포를 제작하여 왜구를 물리쳤던 최무선 장군과 고려 말의 대학자이자 고려왕조에 대한 절개를 지켰던 충신인 포은 정몽주선생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1 포은 정몽주선생의 초상화

 

(약력)

포은 정몽주 선생은 영일정씨 집성촌인 이곳 영천의 임고면 일대에서 태어나 자랐다.

어머니 이씨가 임신 중이었던 어느날 꿈에 난초 화분을 안았다가 갑자기 떨어뜨리고는 잠을 깼는데 그때 아이를 출산했기에 어릴 적 이름은 '몽란'이라고 하였다.아홉살 되던 해에는 낮잠을 자던 중에 꿈에 검은 용이 나타나 몽란을 감싸안고 있었기에 이름을'몽룡'이라 고쳐지었다. 그러다가 성인이 된 다음에 이름은 '몽주'라고 다시 바꾸었다고 한다.어릴때부터 매우 총명했던 그는 성균관에서 이색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공민왕 6년(1357)에 초시에 합격하였다.그리고 3년 뒤에 문과에 응시하여 장원급제하고 여러 관직을 두루 겸하며 출세길에 오르게 된다.공민왕이 죽고 나서 우왕 2년(1376) 때 성균관 대사성의 위치에 올라 많은 제자들을 길러냈으며,성리학에 대한 학문적 조예가 깊어 많은 선비들로부터 추앙받게 되었다.그의 스승은 목은 이색은 그를 높이 여거 '동방 성리학의 시조(東方理學之祖)'라고까지 할 정도였다.그러했던 그는 고려 말의 혼탁한 정국 속에서 이성계를 중심으로 한 친명파 세력들과 함께 개혁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타락한 불교에 대한 엄정한 비판과 횡포를 부리고 있는 권문세족 일파의 약화 · 토지개혁 등 전반적으로 이성계 일파와 뜻을 같이 했지만,그러한 이성계가 왕이 되려는 움직임을 보이게 되자 이에 반대하다가 결국 이방원에 의해 선죽교에서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아직까지도 마지막 술자리에서 나누었던 이방원의 '하여가'와 정몽주의 '단심가'는 오래동안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되고 있다.정몽주를 비롯한 많은 고려의 신하들은 조선 건국에 동참하지 않고 지방에 내려가 있다가 조선 성종 이후부터 김종직을 필두고 본격적으로 정계에 진출하기 시작하는데 그들 세력을 '사림'이라고 부른다. 그러한 사림들은 자신의 학문적 뿌리를 정몽주 선생에게 두었고 정신적인 지주 역할로 삼는다.그리하여 그들은 개경의 숭양서원을 건립하였고 출신지역인 영천에 임고서원을 건립하여 지금까지 배향을 드리고 있다.서원 앞에는 서원의 역사를 알려주는 500년이 넘는 오래된 은행나무가 자라있다

​임고서원은 우리나라에서 건립된 가장 오래된 서원 중에 하나이다.풍기군수 주세붕이 안향을 배향하기 위해 1542년에 설립한 백운동 서원이 가장 먼저 건립된 서원이라면 명종 7년(1552) 정여창을 모신 남계서원, 명종 8년(1553) 정몽주를 모신 임고서원이 그 다음으로 건립된 서원들이다. 임고서원은 명종 8년(1553) 지방 유림들의 건의로 인해 건립되었고 명종 9년(1554)에 '임고'라는 사액을 국가로부터 수여받았다.임진왜란 과정에서 불에 타 소실되었다가 선조 36년(1603)에 현재의 위치로 이건하게 되었다. 이후에 장현광과 황보인을 추가로 배향하였으며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에 힘써왔으나,흥선대원군의 서슬퍼런 서원철폐령을 빗겨가지 못하고 훼철되었다.광복 이후 지방의 유림들이 다시 복원사업을 일으켜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으며,최근에 임고서원 주변 지역을 성역화하는 사업이 이루어지면서 대대적인 정비가 이루어졌고 정몽주 기념관도 건립되었다. 임고서원의 정문이자 누각인 영광루 아래를 지나면 정면에 강당인 흥문당이 자리하고 있다.흥문당의 좌우로는 서재인 함육재와 동재인 수성재가 자리하고 있다.그리고 그 뒤편으로 자리한 내삼문인 유정문을 지나면 정몽주 선생의 위패를 모신 문충사가 놓여있다. 이러한 배치는 우리나라의 전형적인 서원배치 양식인 '전학후묘' 양식을 충실히 잘 따르고 있다.임고서원의 강당인 '흥문당'은 정면 5칸 · 측면 3칸의 건물로 가운데 세 칸에 대청을 두었고 좌우 양쪽에 한칸씩 온돌방을 두었다.현판의 글씨는 당시 영천군수를 역임했던 조선후기의 명필 '윤봉오'가 쓴 글씨라 한다. 학문을 위해 마련된 공간인 강당 '흥문당(興文堂)'은 '학문을 흥하게 한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강당 앞의 서쪽으로 함육재 동쪽으로 수성재가 놓여있다.

이러한 동 · 서재는 학생들의 기숙사 역할을 하였던 곳으로 많은 인원의 학생들을 수용하기에는 어려웠던 듯 싶다. 동재와 서재는 좌우대칭으로 똑같은 모양을 지니고 있지만 수용대상이 조금 달랐다고 한다.동재에는 높은 양반가문의 자제를 서재에는 그보다 조금 낮은 가문의 자제 혹은 서얼들을 수용했다고 한다.강당 뒤편 언덕에 포은 정몽주 선생의 위패를 모신 사당 문충사가 자리하고 있다.문충사로 들어가는 내삼문의 이름은 '유정문(由正門)'인데 이는 마음가짐을 바르게 하라는 의미가 담겨있다.​정몽주와 틀어진 이성계 일파는 고려에서 가장 명망이 높았던 학자인 그를 외면할 수 없었고,몇 차례 회유하려 시도하였으나 강직한 절개로 끝내 한편이 되기를 거부한다.많은 지지세력을 형성하고 있던 정몽주를 살려둘 수 없었기에 결국 이방원은 선죽교에서 정몽주를 습격하여 피살하게 된다. 그 때 정몽주 선생의 나이가 쉰여섯이었다. 이성계 일파는 "정몽주는 도당을 만들어 나라를 어지럽게 하였다"라고 다시 효수하고 정몽주와 함께 뜻을 같이 했던 학자들과 신하들은 유배 보내어 정적들을 완전히 제거하게 된다. 정몽주가 죽고 나서 3개월 뒤에 이성계는 공양왕을 폐위시키고 결국 왕위에 올라 새로운 왕조인 조선을 열게 되었다. 정몽주가 죽은 뒤 13년이 지난 1405년, 이방원은 정몽주를 영의정에 추증하고 '문충(文忠)'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정적이긴 했지만 이방원의 입장에서는 그런 뛰어난 학자이자 선비가 조선 건국에 동참을 했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지 않았을까...​그러한 정몽주 선생의 위패를 모신 사당 '문충사'는 현재에도 매년 2월과 8월에 두 차례 제사를 지내오고 있다.​십년 전 즈음에 이곳에 왔을 때는 강당과 사당을 비롯한 몇 동의 건물들이 전부였는데, 최근 성역화 사업이 완료되면서 임고서원 일대에 수많은 전각들이 들어서게 되었다.(펀글)

#2 효자리비


 

정몽주는 효심이 매우 지극하여 열아홉살 되던해 부친상을 당해 삼년상을 지냈고십년 뒤에 모친상을 당하여 역시 삼년상을 지내었기에 이 사실이 조정에 보고되어 그의 출생지인 임고 우항리에 당시 영천군수인 정유가 '효자리(孝子里)'라는 비를 세우게 되었다 한다.​하지만 비석이 세워지고 나서 시간이 지나면서 비석은 땅 속에 묻혀지게 되었다.그리고 약 100년이 지난 성종 18년(1487) 경상감사 손순효가 지방을 순시하던 길에 잠시 영천에서 묵게 되었는데,꿈 속에서 신령이 나타나 임고면 우항리 인근의 땅을 가리켰다고 한다.그래서 꿈 속에서 신령이 짚어준 터를 파내어보니 땅 속에 비석이 하나 묻혀져 있었기에 꺼내보니 정몽주의 비석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원래의 터에 비석은 다시 세워지게 되었고 그 후 선조 40년(1607)에 군수 황여일이 비각을 중수하여 현재의 모습에 이르고 있다. 아마도 조선이 건국되는 과정에서 정몽주의 행적을 남긴 비석은 철거되는 비운을 맞게 되지 않았을까...그래서 이를 염려한 후손들이 비석을 땅바닥에 묻어 두었다가 훗날 조선 성종 연간 사림세력들이 정계에 진출하면서 고려의 충신으로 정몽주가 다시 인정을 받게 되자 그 때에 비로소 다시 땅 위로 올라와 빛을 보게 되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3 동방성리학의  시조 표지석

 

 

#4 선죽교와 임고서원 전경-개성의 선죽교를 임고서원 봤다. ㅋㅋ 꼭 개성에 포은선생을 만난 기분이다.

 

#5 주인은 온데간데 없는데 주인이 가고난 자리엔 고목인 은행나무만이 주인을 대신해서 자리를 지키고 있으나 외로워 보인다.(가신님이 언제나 찾을랑가?)

 

#6 그 유명한 단심가 표지석---此身死了死了一百番更死了~ (이몸이 죽고 죽어  일백번 고쳐

   죽어~~포은 선생의 절개가 묻어나오는 듯~

 

 

#7 임고서원 현판(臨:임할 임  皐:부르는 소리 고)

 

 

#8 釣翁臺- 정면 오른쪽위에 조옹대가 자리를 잡고 있는데 임고면이 한 눈에 들어오고 옆으로는 뒷산으로 오르는 산길로 연결되고 외로운 전망대는 혼자 쓸쓸히 주인을 기다리고 있는듯 외로움에 지쳐있다.

 

 

(丹心歌)

此身死了死了一百番更死了

白骨爲塵土 魂魄有也無

向主一片丹心 寧有之改里也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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