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7. 17. 14:03ㆍ팔공산 자락
팔공산 주변의 전투사
1. 지옥의 전투(桐藪대전 927년): 敗戰
927년 후백제의 견훤은 경주로 처들어갔다. 신라는 고려에 원병을 요청하였다.견훤은 고려 원병이 도착하기 전에 경주를 점령했다. 경애왕을 죽이고 왕족 김부를 새왕(경순왕)에 앉혔다. 왕건에게 견훤의 경주 점령은 고려 건국후 가장 위급한 사건이었다. 경상도가 후백제 손에 들어가면 통일은 난망한 일, 다급해진 왕건은 병사를 모아 남쪽으로 내려갔다.견훤은 고려 원병이 온다는 소식에 경주에서 퇴각했다. 견훤이 경주를 떠났다는 소식은 왕건의 진로를 바꿔 대구지역으로 향했다. 퇴로 차단 작전을 세운것이다. 두 나라 군대가 맞닥뜨린 것은 오늘날 동화사 인근의 桐藪지역이었다.(현재 대구 동구 지묘동 일대)고려,후백제, 두나라 왕이 직접 지휘하는 전투가 벌어였다.국운을 건 전투였다. 그래서 이 전투를 大戰이라고부른다. 이름하여 동수대전이다.견훤의 경과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이날 승자는 견훤이었다. 왕견의 패배는 거의 궤멸적 수준이었다. 왕건은 부하 장수 신숭겸과 김락이 왕건의 투구와 갑옷을 입고 위장 방어를 하지 않았다면 전사하였을것이다. 두 부하 때문에 왕건은 목숨을 건졌고, 두 장수는 고려시대 내내 영웅으로 추앙받았다고한다. 고려 예종시대에 지은 고려가요인 [悼李將歌]는 그들을 추모한 것이다. 왕건은 자욱한 먼지 사이로 피 냄새가 증기처럼 끓어오르는 팔공산 땅을 간신히 벗어났다. 후백제 군의 추격 때문에 왕건은 현재의 대구.경북 땅을 벗어나기 전까지 죽음을 공포의 패배를 안겨준 지옥이자 사랑하는 부하를 잃은 회한의 전투였다.
2. 고창(안동)전투(930년)/반격의 전투 ; 勝戰
동수대전의 패배 후 완건은 와신상담하였다. 이때 왕건은 그의 장점을 발휘한다. 서두리지 않고 차근차근 힘을 키운 것이다.동수대전 이후에도 고려와 후백제는 여러 번 전투를 벌였다.하지만 두 나라의 운명을 좌우할 전투는 없었다. 왕건의 동수대전 트라우마는 사라지지 않았다. 왕건의 트라우마는 930년 치유된다. 견훤의 군대가 경상도 북부지역을 침공하였다는 소식을 들은 왕건은 병력을 이끌고 소백산 죽령을 넘어 영주땅에 나왔다. 왕건부대의 목적지는 영주 남쪽의 고창군(현재 안동시)이었다. 이때 견훤군대는 경상도 교두보인 고창을 포위한 상태였다. '또 다시 패한다면?'고창으로 향하며 왕건은 불안하였다. 이때 왕건의 공포를 누그러뜨린 일이 일어났다. 한 무리의 신라 병사들이 고려군에 합류한 것이었다.재암성(오늘날 경북 청송 진보지역)의 성주 선필이 이끄는 병력이었다. 930년 겨울의 어느 아침, 3년만에 다시 왕건과 견훤은 외나무다리에서 만났다.양 진영의 선봉장들이 칼을 빼들고 공격 명령을 내리면서 전투가 시작되었다. 전황은 막상막하였다.이때 또 한 무리의 병사들이 후백제의 옆을 첬다. 고창의 지도자와 장정들이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견훤은 3년 전 왕건이 팔공산에서 느꼈던 공포를 느꼈고, 결국 퇴각 명령을 내렸다. 그는 8000여 병사들의 주검을 뒤로한 채 고창 땅을 벗어났다. 반대로 왕건은 지옥의 기억에서 천당의 현실로 복귀했다. 승리의 결과는 달콤했다.고려는 경상도 지역에서 확고한 주도권을 쥐게 되었다. 고창 전투는 안동의 역사에도 영향을 주었다. 930년 왕건은 고창을 府로 승격시켰다. 또 고창이라는 지명을 安東(나라의 동쪽을 편하하게 해주었다는 뜻)으로 바꾸었다.
3. 一利川(일리천)전투(현 구미) 936년 6월-高麗 건국전투
936년 6월 고려군은 수도 개경을 출발하여 천안부(충남 천안)까지 남하하였다.천안에서 남쪽으로 내려가면 공주와 논산을 거쳐 후백재 수도 전주까지 도달할 수가 있지만 돌연 동남쪽의 일선주(구미)로 방향을 틀었다. 고려군의 움직임을 주시하던 후백제군도 고려군을 따라 일선주로 몰려 들었다.일선주에서 벌어진 전투가 일리천 전투라고 한다. 일리천을 사이에 두고 고려군과 후백제군이 대치했기 떄문이다.일리천(일선주)는 낙동강 북에서 남으로 흐르고 있는데,일리천은 이 낙동강과 연걸된 지류의 하나로 파악되며 북쪽에서 내려온 고려군과 서쪽에서 동쪽으로 이동한 후백제군의 상황과 당시 교통로를 감안하면 일리천은 구미시 선산읍의 남쪽을 흐르는 감천으로 추정된다. 감천은 서쪽에서 동쪽으로 흘러 낙동강에 합류한다.왜 천안에서 곧장 남하하지 않고 동남쪽의 구미로 행군하였을까? 935년 경순왕이 귀부하였지만 신라 세력은 완전히 고려로 넘어간 것이 아니었다. 당시 경상도 호족들은 사태를 관망하려던 경향이 강했다. 후백제군이 다시 고려군을 크게 이긴다면 입장을 바꾸어 후백제로 돌아설 수도 있었다. 왕건은 바로 이점을 우려했던 것 같다. 왕건은 의도적으로 방향을 틀어 경상도 지역으로 남하했다. 그 과정에서 자신의 군사력을 과시하고 자신에게 동조하겠다는 세력의 병력과 물자를 이끌어 모았던 것이다. 당신 고려군이 동원한 군사는87,500명에 달했다.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던 시기에 동원한 병력 5만 명 정도였던점을 감안하면 엄청난 숫자라고 할 수 있다. 왕건은 전체 군사를좌.우.중 3군으로 나누고 30명의 장수로 하여금 인솔케하였다. 병력은 기병 4만 경기병9,800명, 보병 23,000명 구원병 14,700명으로 구성되었다. 이 많은 군사가 일리천에서 후백제군과 마주했다.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이때 왕건은 일부러 견훤과 함께 고려군을 사열했다. 후백제군의 동요를 고려한 셈이었다. 사실 후백제군의 장수들은신검의 부하들이 아니고 견훤과 함께 동고동락하면서 성장해 온 무장들이었다. 자신이 모시던 주군은 적에게 이미 항복해 버렸고,주군의 아들을 모셔아 하는 입장이였던 것이다. 속으로 신검의 지휘를 받는 것이 못마땅했을지도 모른다.<고려사>의 기록을 보면 당시 정황이 그대로 드러난다.후백제의 좌장군 효봉 등이 고려의 군제가 대단한 것을 본 후 투구와 창을 벗어던지고 견훤의 말 앞으로 와 항복했다고 기록되어있다. 이에 후백제군은 사기를 상실하였고 감히 움직이지 못했다고 한다. 왕건은 후백제군이 동요하자 총 공격 명령을 내렸다.일리천은 건너 고려군은 후백제군을 여지없이 격파했다. 후백제군의 참패였다. 3,200명 포로와 5,700명은 목이 달아났고 신검의 후백제군은 더 이상 재기가 불가능했다. 신검은 논산으로 물러나 전열을 재정비하고자 하였으나,이미 전세가 기운 것을 보고 아우 양검, 용검과 함계 고려에 항복하였다.936년 9월 일리천 전투로 인해 후삼국시대는 막을 내렸고,진정한 고려시대가 시작되었다.
<<출처: 향토와 문화 제75권(2015.6.30.발행)-대구은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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