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인 한장군 단오제

2019. 6. 10. 19:47팔공산 자락

>>>경산 자인(한장군)단오제<<<

-국가무형문화재 제44호-

0. 위   치: 경산시 자인면 계정숲

0. 볼거리: 한장군묘,공덕비,호장장군행렬,여원무,자인단오큰굿,자인팔광대 등

 모처럼 경산 단오제를 구경코자 자인면으로 달려본다. 계정숲도 처음이거니와 자인 단오제도 처음이다. 도착해서 보니 계정숲(한장군묘소)속에서 모든 행사가 이루어져 더운 날씨임에도 그늘속이 시원함을 느낄수가 있다. 주말이라 많은 구경꾼들로 붐비고 여러가지 행사를 동시에 진행하니 시끌벅적하다. 전 코스를 한바퀴 둘러보고 먹거리도 몇가지 사고 해서 즐거운 마음으로 축제를 보고 집으로 돌아온다. 지금 생각해봐도 장소가 제일 멋진것 같다.  


주)경산자인단오제는 경산시 자인면 지역 주민들의 고을 수호신인 한 장군에게 행하는 유교식 제례로서 고대의 명절인 수릿날, 즉 단오절에 한묘제(韓廟祭)를 올리고 자인단오 굿, 호장장군 행렬(가장행렬), 여원무, 팔광대, 자인계정들소리, 씨름, 그네 등의 각종 민속 연희(演戱)를 연행하는 방대한 형태의 고을 굿이다. 경산자인단오제는 오랜 기간 동안 행해졌던 제례의식과 충의 정신 그리고 다채로운 민속놀이로 독특한 장르의 예술성을 엿볼 수 있으며 자인현 전체 주민들의 마음이 응집되어 신라시대부터 전승되어 오고 있다. 1973년 한 장군 놀이가 중요 무형 문화재 제44호로 지정되면서부터 자인단오-한장군 놀이로 개칭되어 오다가 2007년 3월 경산자인단오제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경산자인단오제로 명칭이 변경된 2007년 행사는 봉산탈춤, 관노가면극, 진주검무 등 우리나라 중요 무형 문화재 초청 공연과 더불어 외국인 장기자랑, 씨름대회 등 외국인을 위한 프로그램을 마련하여 호주, 중국 등 각국의 외교사절과 많은 외국인을 초청하여 국제적인 행사로 개최되었다. 문화의 세기 21세기에는 전국은 물론 세계속의 매력적인 고장 원효, 설총, 일연이 탄생하신 역사 문화 도시, 글로벌 도시, 경산의 전통 문화의 산실로서 경산자인단오제는 그 명성을 더욱 크게 떨치고자 한다.
 

# 단오제 안내 게시판 앞에서 한장

참고)

1. 여원무:세기 전후 신라시대에 왜구의 무리가 자인의 도천산에 성을 쌓고 주둔하면서 주민들을 괴롭히자 한장군이 한 꽤를 내어 그들을 섬멸하고자 하였다.세기 전후 신라시대에 왜구의 무리가 자인의 도천산에 성을 쌓고 주둔하면서 주민들을 괴롭히자 한장군이 한 꽤를 내어 그들을 섬멸하고자 하였다.

장군은 여자로 가장하여 그의 누이동생과 함께 화려한 꽃관을 쓰고 못둑에서 춤을 추었다. 꽃관을 쓰고 춤을 추는 둘레에는 광대가 둘러서 놀이를 벌였으나 풍악을 올려 흥을 돋구고 못에는 화려하게 꾸민 배를 띄웠다. 둘레에는 어느덧 구경꾼들이 몰려들었고 춤과 가락은 한결 흥겨워졌으니 이것이 곧 여원무이다.

장군의 뜻대로 구경꾼 중에서는 도천산을 내려온 왜의 무리도 섞여 있었다. 그들은 처음에는 경계하는 눈치였으나 여원무의 신기함에 눈이 팔리고, 풍악의 흥겨운메 넋을 잃고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가운데서 춤을 추던 한장군이 큰소리로 무어라 외쳤다, 함성이 일어남과 함께 왜의 무리들은 칡으로 만든 그물에 휘말려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모조리 죽여 저 연못에 던져라.” 아름다운 꽃춤의 주인공은 무서운 장군으로 바뀌어 외쳤다. 무당과 구경꾼들은 손에는 모두 비수가 번쩍였다. 그물에 휘말린 왜의 무리들은 외마디 소리를 지르며 차례로 쓰러져 갔다.
춤추던 이도 구경꾼도 모두 한장군이 미리 배치해 두었던 무사요, 칡으로 만든 그물도 미리 깔아 두었던 것이다. 왜의 무리들은 몰죽음을 당했고, 못물은 핏빛으로 바뀌었다. 지금도 못둑에는 왜의 무리를 벨때의 칼자국이 남은 바윗돌이 있다.사람들은 이것을 참왜석 혹은 검흔석이라고 부른다.
그 후 이 고장에는 한장군을 모시는 사당이 생겼고, 해마다 단오절에 제사를 모시어 성대한 놀이가 벌어졌으니, 이것이 곧 ‘한장군놀이’이다. 근세 조선 중기때 송수현이라는 현감이 한장군의 일을 나라에 알려 벼슬을 추시받게 되었다. 현감은 새로 진충사를 지어 한장군을 모시게 되었으니 한묘는 두 개가 되었다. 일제말기에 하나는 헐고 폐쇄 당했다가 해방되어 다시 세워져 오늘에 이르렀다.‘한장군놀이’는 여원무의 복장을 한장군과 누이동생을 꾸며 앞세우고 그 뒤에 사또 행차를 따르게 한 가장행렬이다.




2. 호장장군행렬



3. 단오굿: 단오굿은 신라시대부터 전승되어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3년마다 한번씩 무당을 불러 큰굿을 했는데 1920년부터 그마저 끊어졌다. 그때는 먼저 ‘장군덤’ (아이들은 ‘따깽이=뚜껑’이라고 하고 있으며 개울가의 절벽 위에 흡사 뚜껑 모양으로 된 거암이 놓여 있고, 이것은 한장군이 가져다 덮었다고 믿고 있다) 옆에 있는 한장군 누님이 계시는 곳(아무것도 없으며 잡목이 우거진 암석)에 가서 인사드리고 쇠치고 난 다음 버드나무 숲의 한장군 사당으로 와서 단오굿을 했다. 용성면 송림리 버드나무 숲에 한장군 누이를 모신 사당이 있어서 단오 전날 동제를 지내 왔는데, 일제 때 철거해 버려 지금은 흔적도 없다. 현재는 정월 15일에 이곳에서 제사를 지내며 ‘동제’라고 부른다. 깨끗한 사람을 가려 제관을 시킨다. 단오굿 때에는 현사(縣司)가 있던 자리(현 우체국)에 집결하여 가장행렬로 진장터(한장군이 진을 쳤던 곳이라 하여 향사(享祀) 때에는 여기서 말달리기?활쏘기?씨름 등을 하였다)까지 온다.
여기서 옛날에는 여원무를 연행하고, 한당으로 가서 제사를 올리고, 도로 돌아가서 고을원에게 여원무를 보이고 해산한다.원은 참여하지 않고 모든 아전청(衙前廳)의 이속(吏俗)은 통인 하나만 남기고 모두 단오굿에 참여한다.



4. 팔광대: 신라시대부터 전승되어 온 자인 단오제는 유교적인 의식을 바탕으로 행하여져 왔으므로 제례의 축문이나 영신사, 홀기 등은 소상하게 기록으로 남아있다. 그러나, 그 외의 잡다한 행사들은 서민들이 주도한 민속으로 구전에 의한 전승에 의존해 왔다.『자인읍지』에 ‘한장군이 여원무를 설치하고 배우잡희를 벌였다. 왜구들이 산에서 내려와 구경하고 있을 때 한장군은 칼을 휘둘러 왜구들을 죽였다. 고을사람들이 그 뜻을 추모하여 도천산 서편 기슭에 신당을 건립하고 단오날에 동남 2명을 여장시켜 여원무를 추게 했고 배우잡희도 열었다’라는 기록이 있다. 옛날부터 배우를 광대라 불러왔고 고려사에도 탈놀이하는 자를 광대라 했으며, 줄타는 사람, 판소리꾼, 일반배우들을 범칭 배우라 불러왔으니 읍지에 기록된 배우도 흔히 부르고 있는 광대로 해석할 수 있다.자인은 원효대사가 출생하여 자라고 출가한 곳이다. 원효는 파계한 뒤에 당시의 광대들이 춤출 때 쓰던 박의 형상을 본따서 도구를 만들고, 그것을 가지고 추는 무애무로 전국을 누비면서 국민들을 계도했는데 후에는 이 춤이 여기(女妓)들의 향약무로 정비되어 오락화되었다고 한다. 한장군이 창작해 낸 여원무는 바로 이 무애무를 본딴 것이다. 그런데 ‘設女圓舞又陣俳優雜戱’에서 보듯이 춤과 배우잡희는 별개로 행해진 형태임을 알 수 있다. 한편에서는 무애무의 변형인 여원무를 추고, 또 한편에서는 배우들의 잡희(춤과 음악이 가미된 일종의 가면극)가 어우러져 배우잡희가 단순히 여원무의 들러리를 위한 무희가 아님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 배우잡희는 기록이 없어 변천과정을 정확히 고증할 수 없으나 시대의 흐름에 따라 내용의 변화를 일으켜가며 주민 속에 뿌리를 내리고, 민중의 연극이자 새로운 형태의 가면극인 자인 팔광대에 영향을 주어왔다. 즉, 이 배우잡희는 자인 단오제 때마다 여원무와 같이 공연되어 왔으며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여원무와 분리되어 자인팔광대로 독립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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