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6. 12. 15:30ㆍ세옹지마 인생길
아버지는 엿장수
저자:박태칠/수필
“아이고, 온 집안에 잎사귀들 뿐이네.”
아내는 청소를 하면서 혼잣말을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온 집안 곳곳에는 펼쳐진 식물도감과 주워온 나뭇잎들로 어지러이 흐트러져 있었습니다. 나는 창밖의 팔공산을 바라보았습니다. 그것들은 그 숲속에서 주워 온 것들이었습니다.
아버지가 생각이 났습니다. 평생을 아버지와 같은 삶을 살지 않겠다는 다짐을 하며 살아왔으면서도 결국 나는 아버지를 닮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시골에서 초등학교에 다닐 때의 일이었습니다. 지금도 그렇겠지만 그 당시에도 부모님 직업을 조사하는 일이 자주 있었습니다. 그것도 공개적으로 하였습니다.
“부모님이 농사짓는 사람 손들어.”
선생님이 말씀하시면 반 아이들 대부분이 손을 들었습니다. 그러면 선생님은 대충 훑어보시고 이번에는, “손 안들은 사람 손들어.”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나를 포함한 몇 명이 손을 들었습니다. 그러면 선생님은 제일 앞자리에서부터 구체적으로 무슨 직종에 종사하는지 묻는 것이었습니다. 구멍가게를 한다는 학생도 있었고, 공무원이라고 대답하는 학생도 있었습니다. 나는 그때 공무원이라고 대답한 학생이 제일 부러웠습니다. 드디어 내 차례가 왔습니다. 나는 그 순간이 가장 싫었습니다. 한동안 대답을 못하고 얼굴이 달아올라 붉어진 채로 고개를 숙이고 가만히 있었습니다. 선생님이 의아한 얼굴로 쳐다보고 교실안의 시선은 모두 나를 향하였습니다. 그때 누군가가 이야기를 했습니다.
“쟤 아빠는 엿장수예요. 자! 엿이 왔어요. 엿! 떨어진 고무신이나, 못 쓰는 화로 있으면 가져 오세요. 찰강, 찰강.”
그 아이는 손 하나를 쑥 올려 가위질 모습까지 하면서, 아버지의 모습을 흉내 내는 것이었습니다. 조용하던 교실 안은 갑자기 웃음소리와 박장대소하는 학생들의 모습으로 난리가 나고 말았습니다. 부끄러워서 죽고 싶었던 순간이었습니다. 그런 일은 학년이 바뀔 때마다 일어났고, 상급학교로 진학하고 직장에 입사를 해도 방법만 다를 뿐 꾸준하게 부모님 직업을 묻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그것을 왜 조사하는지 지금도 알 수가 없습니다.
어쨌든 당시 아버지의 직업은 엿장수였습니다. 아침에 손수레에 엿을 싣고 나가면, 산길을 돌고 돌아 사라졌다가 해가 저물녘에야 고물로 가득 찬 손수레를 힘겹게 밀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악기를 잘 다루고 사람 좋다는 소리를 들었던 아버지는 동네입구에서 하모니카나, 피리를 곧 잘 불었고 바쁜 농사철에는 아무 논에나 들어가서 농사일도 거들어 주곤 하였습니다. 촌로들에게 편지를 대신 읽어주고, 멋진 글씨로 한자(漢字)를 섞어서 대필한 답장을 우체국에 전달 해주곤 하였다고 합니다. 여름철, 길을 가다가 강을 만나면 목욕을 한 후 버드나무 그늘에 누워 매미소리를 들으며 잠을 청하면 세상 부러울 게 없었다고 제게 이야기를 해주곤 하였습니다.
그러나 나는 친구와 길을 가다가도 저 멀리서 가위소리가 들리면 슬며시 골목길로 아버지를 피해서 집으로 돌아오곤 하였습니다. 시골에서 엿장수를 하니 집 형편도 말이 아니었습니다. 방세를 못내 이리저리 골짜기로 빈집을 찾아다니기 일쑤였고, 먹는 것은 조반석죽(朝飯夕粥)도 호사였습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직업은 내가 중학교에 들아 간 후에 바뀌었습니다. 머리가 제법 굵어진 제가 ‘엿장수 아들’로 불리던 것이 싫어, 아버지에게 제발 엿장수를 그만두라고 대들기 시작하여 몇날 며칠을 울고 밥을 먹지 않자, 드디어 아버지는 항복을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아버지의 직업은 엿장수에서 ‘농민’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러나 송곳하나 세울 땅이 없던 아버지는 죽도록 남의 농사일만 하였습니다. 벼를 수확하는 가을이면 일손이 모자라는 이웃사람들은 매일 밤마다 우리 집을 찾아와서 일해 줄 것을 요청하였고, 아버지는 저녁마다 경운기에 가득 실린 볏단에 검불처럼 매달려 집으로 돌아오곤 하였습니다. 농사일을 많이 해보지 않았던 아버지는 밤마다 허리를 낫처럼 꾸부린 채 엎드려서 “아이고, 허리야”를 반복하다 싸늘한 냉방에서 수건을 베게삼아 잠이 들곤 하였습니다.
나는 아버지처럼 살기 싫었습니다. 엿장수가 아니면, 남의 농사일이나 해줘야 하며 살아가는 것도 부끄러웠고, 일손을 구하러 오는 내 또래의 아이들에게도 굽실거리는 모습을 보고 화가 나기도 하였습니다. 어서 커서 ‘엿장수 아들’을 기억하지 않는 대도시로 나가 살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성인이 된 나는 결국 도시로 나와 공무원이 되었습니다. 어려운 형편이었지만 결혼도 하여 일가를 이루고 열심히 살았습니다. 제법 살림규모가 갖추어지자 시골에서 어렵게 사는 부모님을 모셔와 함께 살았습니다. 동창회에도 나가지 않으니 이제 그 시골은 우리와 완전히 단절되었습니다. 도시에는 더 이상 우리의 과거를 아는 사람도 없었고 나를 ‘엿장수 아들’로 부르는 사람도 없어졌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새장 같은 좁은 방에 갇혀서 몹시 갑갑해 하였습니다. 시멘트 담으로 이웃과 단절하고 살아가는 도시의 생활에 적응을 하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늘 예전의 시골을 그리워하며 살았습니다. 녹음이 우거진 산속에서 들리던 새소리, 산길에서 마주치던 다람쥐의 모습, 강가의 버드나무에서 들리던 매미소리를 그리워하였습니다. 고향은 아니었지만, 엿장수를 하며 살던 그곳을 아버지는 고향처럼 그리워하였습니다.
노령에다 거동이 불편하여 아들인 나에게 몇 번씩 그곳에 가보자고 하였으나 나의 완강한 반대로 그 곳에 갈수가 없었습니다. 내 이름보다는 ‘엿장수 아들’이라 불리던 그 곳, 늘 기죽어 어린 시절을 보내던 곳에 나는 가고 싶지 아니하였습니다. 아직도 ‘엿장수 아들’인 나를 기억하는 동창생들 몇 명은 그대로 살고 있을 그 시골에 나는 죽어도 가고 싶지 아니하였습니다. 결국 아버지는 좁은 아파트에서 박제된 새처럼 창밖만 바라보며 떠나온 산천을 그리다가 돌아가시고 한줄기 연기가 되었습니다. 나는 직장에서 열심히 뛰었습니다. 경쟁에 뒤지지 않으려고 낮에는 직장으로 밤에는 학원으로 쫓아 다녔고, 집을 넓히려고 열심히 이사도 다녔습니다. 늦지 않게 진급도 하여 어엿한 구청 계장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너무 몸을 혹사 한 것일까요. 몇 년 전, 나는 그만 뇌졸중으로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생전 처음으로 병원에 입원을 하게 되었습니다. 병실에 누워 며칠을 보내니 어릴 때 살던 시골이 생각났습니다. 푸른 하늘과 마을 앞을 흐르는 강, 골짜기에 옹기종기 둘러앉은 집들의 굴뚝에서 나오는 저녁연기들이 그리워졌습니다. 그리고 손수레에 고물을 가득 싣고 힘겹게 고개를 넘어오던 아버지의 모습도 생각이 났습니다.
생각 해 보면, 가난했던 아버지로서는 당시에 가족들을 부양하기 위해 달리 선택해야 할 직업이 없었을 것입니다. 비록 ‘엿장수’라는 직업을 선택하긴 했어도 아버지는 정당한 노력의 대가로 살았던 것이었습니다. 사실 고물을 수거하는 것이야말로 자원을 재활용하는 떳떳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내가 가정형편상 중퇴를 하긴 했어도, 국립 대학교를 다닐 수 있었던 것도, 아버지의 영향 때문이었습니다. 아버지는 헌 책들을 수거 해오면 제일 먼저 내게 책들을 골라 툭툭 털어 건네주곤 하였습니다. 당시 궁벽한 그 시골에서 나는 많은 양의 책들을 읽었고 그 독서량이 오늘날까지 살아오는데 가장 도움을 준 마음의 양식이 되었던 것입니다.
또한 내가 공무원으로 재직시에, 팔공산의 사라져 가는 골짜기 이름과 유래를 조사하여 시의 혁신대회에서 우수상을 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외로운 홀몸 어르신들에게 노래봉사를 제공하여 주민자치 경연대회에서 우수상을 받은 때도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제가 잘해서 그런 줄 알았는데 지나고 보니 모두 다 자연을 사랑하고 음악을 즐기며, 노인을 공경하던 아버지의 영향 때문이란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후 저는 별 탈 없이 퇴원을 하고, 25년간 다니던 직장생활을 명예퇴직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자연주의자였던 아버지처럼 산과 숲을 찾아다녔습니다. 삶이 한결 여유로워지게 되었습니다. 얼마 전에는 숲 해설가 양성과정을 수료 하고 지금도 나뭇잎들을 채집하여 숲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얼마 전 이곳에서 사귄 지인(知人)이 우연한 기회에 나의 초등학교 동창을 만난 모양입니다. 어쩌다 대화중에 내 이야기가 나왔던 모양입니다. 그러자 나이 쉰은 되었을 그 여자 동창이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그 얘, 알아요. 엿장수 아들 아니에요?”
나는 그 소리를 전해 듣고 쓸쓸히 웃고 말았습니다. 아무리 세월이 지나고, 살던 곳을 벗어나려 해도 나는 여전히 ‘엿장수 아들’을 탈피 할 수 없는 모양입니다. 긴가민가해서 확인 하려고 얼굴을 빤히 쳐다보는 지인에게 나는,
“맞아. 아버지는 엿장수셨지”
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이제는 더 이상 부끄럽지 않은, 자랑스럽고 소중한 직업을 가졌던 아버지를 떠올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