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5. 6. 17:32ㆍ산따라 길따라
>>>상주 경천대&공검지 나들이<<<
0. 일시: 2019.5.6. 연휴
0. 찾아가기: 경북 상주시 사벌면 경천로 652 경천대
3일 연휴 마지막날 상주 낙동강 자락에 자리를 잡고 있는 경천대를 보러 고속도로를 질주한다. 경천대(擎天臺)는 경상북도 상주시 사벌면에 있는 낙동강을 바라볼 수 있는 전망대이자 낙동강 제1경으로 손꼽히는 곳으로 원래는 자천대(自天臺)라고도 불렀다. 후에 채득기가 경천대라는 이름으로 고치면서 지금의 이름으로 불린다. 상주시내에서 동쪽으로 떨어진 사벌면 낙동강변에 있으며, 조선왕조 병자호란 일어난 후인 1628년 봉림대군(17대 효종)의 주치의로 있던 채득기가 터를 잡아 지었으며 주변에 채득기가 만들었던 정자인 무우정이 있다. 또한 조선의 장수였던 정기룡이 천마를 얻었다는 전설이 있으며 실제로 천마의 구유 유물이 있다. 경천대 입구 인공폭포에 정기룡 장군 동상이 있다. 낙동강과 운치를 이룬 곳이라 무우정과 함께 영남 지방 유림들의 모임터로 쓰였다고하며,전망대에 올라보면 멀리서 나마 낙동강이 있고 그 사이로 상주 농촌지역의 밭지대와 기암절벽이 한눈에 보이며 경천대 위에 있는 전망대에 올라보면 더욱 높은 쪽에서 낙동강과 밭지대 등을 볼 수 있으며 예전 상도 드라마 촬영지로 소촐하게 보존되어 운치를 한껏 높이고 있는 아름다운 곳이기도 하다. 공검지는 삼한시대의 우리나라 4대 저수지 중 하나인데 관리상태가 생각만큼 좋질 않은게 아쉬움이 남는다.(제천 의림지, 밀양 수산제,김제 벽골제, 상주 공검지)
#1 擎天臺 입구 안내석 (擎: 들 경)
#2 전망대 오름 황토 지압길이 조성되어 피로한 발을 잠시 나마 풀어 볼 수가 있었고~
#3 전망대 부근 돌탑- 누군가 쌓아둔 공든탑 너머 낙동강이 한구비 휘몰아 돌아가고 있다.
#4 전망대서 바라본 낙동강과 한참 모내기가 진행중인 상주시 중동면 일대 농경지(건너편)
#5 전망대에 있는 아름다운 식수대가 술 호리병과 비슷하고 이태백이 나왔으면 또 한 수를 읊고 지났지 싶은데.....
#6 낙동강 강바람길 탐방로- 전 구간을 함 걸어보고도 싶지만 시간이 그만큼 허락하질 않는게 아쉬움이 크다.
#7 MBC "상도" 드라마 촬영지- 과거 "상도" 드라마 촬영지 주변 경관이 낙동강 암벽과 잘 어울리게 자리잡고 있는듯하다.
#8 주변 흔들다리
#9 무우정-낙동강 1300리 제1경 경천대(擎天臺) 절벽 위 조그마한 정자.병자호란 후 소현세자‧ 봉림대군‧ 인평대군이 청나라에 볼모로 갈 때 호종 한 우담 채득기(雩潭 蔡得沂)가 훗날 모든 관직을 마다하고 은거하던 곳. 우담의 집터와 사용하던 세 개의 돌그릇과 정상 바위틈 우담이 세운 비석이 생생하다. 돌그릇은 연을 기른 연분(蓮盆), 세수를 하던 관분(盥盆), 약물을 제조하던 약분(藥盆)이고, 비석의 “大明天地 崇禎日月"의 뜻은 임진왜란 때 우리를 도운 명나라와의 의리를 지키고 오랑케인 청나라의 원수를 갚겠다는 뜻이란다.경천대는 하늘이 스스로 만들었다고 일명 자천대(自天臺)라 부른 절경이다!경천대 앞 벌판을 휘감는 물길은 안동의 하회마을과 예천의 회룡포와 함께 낙동강의 3회(三回)라 불린다. 자세한 설명은 하단
擎天臺感吟 攀蘿峭壁上雩亭 넝쿨 엉겨붙은 절벽 위 무우정이 서있고,
洛水彎彎去杳冥 낙동강 구비구비 아득히 흐르는구다.
間歇鶯歌濃樹岸 짙은 숲속 꾀꼬리는 울다 말다 울다 말다,
長閑鷺睡白沙汀 백로는 강가에서 자는 듯 한가롭다.
漁磯寂歷巖陵黙 자갈밭서 낚시해도 바위구릉 묵묵한데,
鶴駕從遊典屬零 세자따라 주유한 공, 벼슬이 내렸더라.
戀慕天臺成繪畵 경천대를 어여뻐 여겨 그림 그려서
聖君爲作袞龍屛 임금님 용상 뒤 병풍을 만들었도다.
#10 경천대 표지판 앞
#11 경천대와 천년송
#12 봉산곡- 조선 인조 때 채득기(蔡得沂)가 지은 가사로 천대별곡(天臺別曲)’이라고도 한다. 4음보 1구로 헤아려 모두 102구(전구 1구 포함.)이며,
음수율은 3·4조와 4·4조가 주조를 이루며, 2·3조, 4·3조, 2·4조 등도 드물게 나온다. 「봉산곡」은 장지(壯紙)에 귀글체로 쓰여졌고, 「천대별곡」은 『군신언지록(君臣言志錄)』에 줄글체로 쓰여져 전한다.
그 내용과 평가는
병자호란 때에 세자와 대군이 볼모가 되어 청나라의 심양(瀋陽)에 들어갈 때 작가가 왕자를 호종(扈從)하라는 명을 받고 대궐에 나아가 임금의 망극한 은혜를 읊은 시이다.내용은 7단으로 나눌 수 있다. 제1단에서는 왕명을 받고 감격하여 장도에 오르면서 은둔지의 자연경물을 읊고 되돌아오겠다는 의사를 밝히고 있다. 제2단에서는 오랑캐에 대한 원분과 증오의 생각을 이길 길 없어 속세를 떠나 은둔하여 안빈낙도(安貧樂道)하는 심회를 읊었다.제3단에서는 은둔지의 천연적 기경(奇景)을 찬미하였다. 제4단에서는 은둔지의 가을과 겨울의 경물의 아름다운 변화상을 찬미하였다. 제5단에서는 유유자적하는 자신의 생활상을 읊었다. 제6단에서는 우국충군의 지극한 정을 노래하였다.제7단에서는 성은의 망극함을 갚고 자연으로 다시 돌아오겠다고 읊었다. 병자호란을 배경으로 하는 가사작품으로서, 그 내용과 작자가 분명히 전해오는 작품이라는 점에서 가사문학사상 귀중한 자료이다.
#13 이색 조각공원-장인의 아름다운 손 솜씨가 확 드러나는 것 같은 목각 조각이 이체롭다.
#14 공검지- 경상북도 상주시 공검면 양정리에 있는 저수지로 남한에서 규모가 가장 큰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서력 기원을 전후한 시기에 벼농사의 중요성과 함께 정치적·사회적 발전에 의한 노동력의 징발에 의해 거대한 저수지가 축조되었는바, 제천 의림지(義林池), 밀양 수산제(守山堤), 김제 벽골제(碧骨堤) 등과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졌다고 믿어지고 있다. 문헌 기록으로는 고려 때인 1195년(명종 25) 상주사록(尙州司錄)으로 있던 최정분(崔正份)이 예로부터 있어 오던 제방을 그대로 수축했다고 하며, 제방의 길이는 860보(步)이고, 너비가 800보라고 한다. 저수지의 둘레는 22리나 되며, 이 저수지에 의해서 혜택을 받는 몽리(蒙利)면적은 260결(結)에 이르렀다. 조선 초에 홍귀달(洪貴達)이 쓴 「공검지기(恭儉池記)」에 의하면 축조연대는 언제인지 모르고 공검(恭儉)이라는 이름은 쌓은 사람의 이름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평상시 못의 둘레가 1만 6,647척(尺)이며 이때 물의 깊이는 4, 5장(丈)이나 되었다.이 제방은 고대의 제방들에서 흔히 볼 수 있듯이, 토사(土砂)를 판축(板築:판자와 판자 사이에 흙을 넣고 다짐)하여 단면이 사다리꼴이 되도록 쌓아 올린 것이다.
판축의 방법은 토성(土城)을 쌓는 방법에서 비롯되었으나 안팎의 물매를 더하여 물의 압력에 견디도록 아랫부분의 너비가 부채꼴로 넓게 되어 있다. 잔자갈과 흙을 다질 때 뻘흙을 사용하고 각각의 재료 사이에 있는 공극(空隙)을 거의 없앰으로써, 물분자가 공극으로 흡수될 틈을 막는 원리를 이용하였다. 현재 규모는 주변이 모두 논으로 개답되고, 만수 시 약 1,000평 정도의 작은 규모만 남아 있다. 이는 문화유산으로 그 흔적을 보존하고자 한 것으로, 수리시설의 기능은 하지 못한 채 남아 있다.
#15 공검지 (공갈못)표지판-꼭 일제시대때 황국 신문화를 구실로 신사참배하는 제단같이 되어 있어 첫눈에 봐도 눈에 거슬린다. 이런 일제 잔존물을 빨리 없애고 새로운 안내판을 세웠으면하는 바램이다. 간 기념으로 흔적은 남겼지만 기분이 영 아니올시다이다.
#16 공검지 전경
#16 경북선 기찻길이 공검지 옆을 통과하고 있다.
주1)경천대(擎天臺)와 무우정(舞雩亭)소재지: 상주시 사벌면 경천로 652
백두대간 ‘밤원숭덕지맥’의 끝자락 옥주봉(玉柱峰159m)기슭 낙동강 가에 위치한 「경천대」는 예부터 낙동강 1,300리 물길 중에서 아름답기로 첫 번째라 한다.
강돌이 듬성듬성 박힌 역암(礫巖)으로 이루어진 바위와 수백 년의 나이를 자랑하는 송림이 우거져 있어 그야말로 한 폭의 그림이다. 혹자는 부여 낙화암, 충주 탄금대와 더불어 우리나라 3대 절경의 하나라고 말하기도 하며, 안동의 하회마을과 예천의 회룡포와 함께 낙동강의 3회(三回)로 불리는 회상 벌판은 물길이 급히 휘감아 돌면서 은빛 백사장과 절벽이 기묘한 조화를 이루어 드디어 낙동강 제1경을 만들어 낸 것이다.도처에 개발을 명목으로 본래의 모습이 훼손되거나 없어진 경우가 많은데, 이곳만큼은 아직도 자연의 순수한 아름다운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성산지에는 「擎天臺 在州南二十里國士峰之右麓新坪村後峰巒秀偉洞壑幽深遂開雲谷曠區差西北面越數岡三四百弓重重巨岩盤錯蹲踏圍可數百尺高可八九丈頭盤陀而坐可十人箎齋趙緯經盤旋之地有記及題詠 주남 20리 국사봉 우록 신평촌 후에 봉만이 수위하고 동학이 유심하며 운곡이 열리고 서북이 넓게 트였으며 수강을 넘어 삼사백궁허에 거암이 중중이 반선하여 주위가 수백 척이고 높이가 팔 구장이나 되며 위가 평평하여 십여 인이 앉을만하다. 호재 조위경이 반선하던 곳이니 기와 제영이 있다」라 적고 있다.
옛 이름은 자천대(自天臺)였으나, 1636년(丙子年)에 국운이 쇠약하여 병자호란을 당하고, 1637년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심양에 볼모로 가게 되었을 때, 호종(扈從)한 우담(雩潭) 채득기(蔡得沂1604~1646)선생이 8년 만에 돌아와 낙향한 뒤 이곳 ‘자천대’에 물러나 은거하고 있었다. 봉림대군(鳳林大君)을 도와 북벌의 의지를 다졌으니 이때부터 경천대라 한다. 선생의 본관은 인천(仁川), 자(字)는 영이(詠而), 호(號) 우담(雩潭)·학정(鶴汀)이고, 경사백가(經史百家)에 통달하였고, 특히 역학에 밝았으며, 천문, 지리, 의학, 복서, 음률, 병법 등에도 조예가 깊었다한다. (雩: 기우제 우)
그리고 봉일정(捧日亭)에 대명천지(大明天地) 숭정일월(崇禎日月)이라는 글자를 새기고, 올곧은 충절의 뜻을 세웠는데, 이 후 그 대(臺)는 경천대로 이름하고, 그 정자는 봉일(捧日), 언덕은 미구(薇邱), 원(園)은 율원(栗園), 암석은 난가(欄柯)라고 하여 백년의 부(訃)로 우거하니 풍천에 감정이 능히 한 명구(名區)를 보전 하였다 한다. 귀국한 뒤 봉림대군이 불렀으나 나가지 않으니 화사(畵師)로 하여금 ‘자천대 28경’을 그려 산수병풍을 바치게 했다고 한다.
또한 임진왜란 때 충의공 정기룡(鄭起龍, 1562~1622)이 경천대 남쪽 용마봉(龍馬峰)아래 용소(龍沼)에서 용마(龍馬) 한 마리를 얻어 훈련시켰다는 전설이 서린 곳이기도 하다.
낙동강을 굽어보는 절벽에 세워진 「무우정」은 우담선생이 경천대에 터를 닦고, 은거하면서 기우제(祈雨祭) 터 우담(雩潭) 위에 지은 강계연변형(江溪沿邊形) 정자로 충절과 북벌의지를 다지며 공부 하던 곳이라 전한다.상산지에 「舞雩亭 在洛江上自天臺下別坐蔡得沂所建金淸陰尙憲崔遲川鳴吉李澤堂植皆有記中廢有遺址今 上戊辰春牧使李侯埉重創募人守護有記詩 낙강상 자천대하에 별제 채득기가 세우고, 청음 김상헌 지천 최명길 택당 이식이 기를 썼으며, 중간에 폐하고 유지만 있었는데, 1748년에 목사 이협이 중창하고, 사람을 두어 수호하게 하며 기와 시를 썼다」라 적고 있네요.1748년 목사 이협이 중건했으나 허물어진 것을 1948년에 크게 보수하고, 2005년에 서까래를 교체하고 번와(翻瓦)를 했다.정자의 이름은 우담선생이 공부뿐만 아니라 가뭄이 심할 때 이곳에서 악공과 무희를 동원하여 기우제를 지내 해갈이 되었다는 데서 연유한 것이라 알려지고 있다. 한글가사 봉산곡(鳳山曲)을 낳은 창작 공간으로, 이 곡(曲)은 당시 경천대를 떠날 때 그가 읊은 한글가사이다. 이 노래는 일명 천대별곡(天臺別曲)이라고도 하는데, 101구로 3·4조 또는 4·4조로 된 충신연주(忠臣戀主)의 노래다. 봉산곡은 「가노라 옥주봉(玉柱峯)아, 잇거라 경천대(擎天臺)야, 요양만리(遼陽萬里) 길이, 머다야 얼마 멀며, 북관일주년(北関一周年)이 오래다 하랴마는.....」이다. 이곳은 많은 선비들이 시문을 남기기도 한 곳으로 낙강시회(洛江詩會)의 중심이 되어 문향(文鄕)상주를 전국에 알리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무더운 여름 날씨에도 이곳에 오르면 맑은 바람이 늘 스치고 있어 땀을 가뿐하게 날려버리는 이 정(亭)은 전면 3칸, 측면 1.5칸의 5량가(五樑架), 홑처마 팔작 기와지붕으로 사방이 모두 트이게 마루를 놓았네요. 정면에 ‘舞雩亭’이라는 현판을 달고, 내부에는 택당 이식의 무우정기(舞雩亭記), 청음 김상헌의 우담신정기(雩潭新亭記), 방후손(傍後孫) 광식(光植)의 경천대감음(擎天臺感吟)의 편액이 걸려 있고, 정자 옆의 봉우리 암반사이에「擎天臺 大明天地 崇禎月日」이란 1704년에 세운 비(碑)와 말구유 등이 있지요.
1987년 국민관광지로 지정되면서 경천대 일원에 많은 투자를 하여, 옥주봉 정상 3층 전망대는 사방 60여 명산을 조망할 수 있으며, 2007년에는 경천대 서쪽에 상주박물관을 열었으며, 이후 자전거박물관, 국제승마장, 상주보, 자전거국토종주길, 국립낙동강생물자원관, 수상레포츠, 오토캠핑촌 등 많은 즐길 거리와 체험공간이 들어서면서 최근 관광객이 날로 증가하는 상주의 자랑스러운 명소가 되어가고 있다.
주2)공갈못: 전설에 의하면 이 못의 얼음 어는 것을 보고 흉년, 풍년을 예측하였다고 한다.
또 정월 열나흗날 밤, 소들이 땀을 흘리는데 그것은 밤을 이용하여 소들이 못에 얼음을 갈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또 경주 용담의 암용이 공갈못 숫용에게 시집온 이야기도 있다.
또 볶은 콩 서되를 하나씩 먹으면서 말을 타고 못 가를 돌아도 콩이 모자란다는 말도 있다.
속설에 "저승에 가도 공갈못을 구경하지 못한 사람은 이승으로 되돌려 보낸다"고 하였다.
함창 읍지에는 이 못의 서반에는 몇 리에 걸쳐 연꽃이 피어 있으며 마치 중국의 전당호를 방불케 하는 풍취를 지녔다고 하여 그 아름다움과 연꽃의 풍광을 말하여 주고 있다.
그러므로 옛부터 이곳을 찾는 사람들은 주옥같은 글을 남기어 그 아름다운 풍광을 연상케
하여 준다. 이 못의 이름이 공갈못이라 부르게 된 것은 못 둑을 쌓을 때 "공갈"이라는 아이를 묻었다는 매아설화에 의하여 붙여진 것이라고 한다. 이와 같이 향민들은 이 못을 신비롭고 영험스러운 영지로 신앙하여 왔다.이제는 이와 같은 전설과 연밥 따는 노래가 공갈못을 상기시켜 줄 뿐 못은 논으로 변하여 그 모습과 풍광을 찾을 길이 없다. 다만 옛 못을 알려주는 비석이 옛 못 뚝에 외롭게 서서 이곳을 찾아주는 나그네의 발길을 멈추게 하고 서운한 발걸음을 되돌려야 하는 곳이 되었다. 공갈못 하면 곧 우리 어머니를 연상케 하는 것은 연밥 따는 노래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 노래는 공갈못을 배경으로 하여 발생 형성된 민간의 노래로 지방성과 토속성을 짙게 띈 민요의 성격으로 이 노래의 내용은 연정, 사친, 완월관어, 호련 등의 유형을 이루었다. 형식으로는 기본형, 복합형, 생략형, 후렴첨가형 등이 형태를 보이고 있다.
이 노래는 동남 동녀를 대상으로 한 한국민요의 대표할 만한 노래군이라 할 수 있다.
이 노래군이 상주, 함창을 중심으로 한 이 지역에서 전승 보존되는 이 지방 특유의 무형 문화재로 귀중한 가치를 지닌 것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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