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2. 27. 17:32ㆍ팔공산 자락
如 犀 角 獨 步 行
>>>역사의 아픔을 간직한 수성못<<<
0. 일시: 2021. 2. 27.(토) * 마눌
0. 코스: 수성못 트레일길 한바퀴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이상화님 시 테마가 된 수성못과 주변 길...세월은 흘러 못 아래는 아파트, 상가촌(들안길)으로 변했지만 지금부터 100 여 년 전 일제시대엔 수많은 논과 밭 경작지가 있었다고 한다. 1908년 수성못이 건설되면서 수리세 등을 징수하니 농사를 지어도 온전한 수입이 되지 않았을터(물세 명목 수탈),,,그리하여 시인이 그 시를 지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당시 일본인인 미즈사키 신타로가 주민들을 위해 많은 일을 했다고 했지만 내용을 살펴보면 본인의 사업과 제국주의의 지원 아래 대구시민들에게 많은 물세를 부과했기에 이게 칭송되어야만 하는지 의문이다. 엄밀히 따지면 수탈인데도 추모제를 한다니 좀 아이러니컬하다.ㅋㅋㅋ 과연 우리 국민을 위하여 진정성을 가진가에 대해서는 의문을 품지 않을 수가 없었다. 당시 신타로는 많은 면적의 농사에 눈썹만큼의 물세를 부담했다는데...그리고 이상화의 시비와 미즈사키 신타로의 墓가 마주하고 있는것도 올바른 배치인지? 일본인의 묘지는 없애든지 아님 다른곳으로 옮겨감이 마땅하지 싶다.(필자의 견해)
# 1927년 건립된 취수탑과 안내문
# 새들의 낙원 섬-못 중간 섬엔 많은 새(가마우지,오리,학)등의 보금자리가 되어 더불어 살아가고 있지만 새똥으로 인해 주변이 심하게 오염되어 나무가 고사되고 있는게 안타깝다.
# 수양버드나무와 오리배
#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이상화 시비
# 연리지-단풍나무 연리지로 되어 있는것은 처음보는 듯하다.
# 미즈사키 린타로 묘-대구 수성못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못의 남쪽 식당 뒤쪽에 한 일본인(미즈사키 린타로(水崎林太郞))의 묘지가 있다. 여러 곳의 안내표식과 묘의 안내판에 따르면 이 사람이 수성못을 축조한 사람이다. 그는 1915년 수성면으로 와 화훼농장을 운영했다. 신천의 물이 대구부의 식수로 이용되면서, 수성들의 농업용수가 부족해지자 조선인 4명과 수리조합을 만들고 수성못 축조에 앞장섰다. 자신이 죽으면 장례는 조선식으로 하고 수성못이 보이는 곳에 묻어달라 했다고 한다.(일설)
(의문점)
미즈사키가 추앙된 근거는 2개의 신문-1927년의 매일신보와 동아일보 기사다. 알다시피 매일신보는 조선총독부 기관지로 사시가 내선일체였고, 동아일보는 일제강점기에 친일에 협조한 신문이다. 동아일보는 그 당시에는 친일이 아닌 실제 조선인을 위한 보도를 했다는 주장도 있다.미즈사키는 일본 기후현의 면장'읍장급 공무원이었다. 1915년 치러진 중의원 선거에서 낙선해서 가산을 탕진한다. 그래서 궁여지책으로 인연이 있던 수성면으로 온 '개척농민'이었다. 개척농민이란 일제가 조선을 내선일체화하기 위해 조선으로의 이주를 권한 일본인 농민을 말한다. 즉 조선을 뿌리까지 식민지화하기 위해 조선총독부의 첨병 역할과 그 하부 조직으로 끌어들인 일본 농민이다.미즈사키는 수성면의 대부호인 '서수인'의 도움을 받고, 화훼농장을 운영하며 6년 만에 2만㎡(6천 평)의 농장 경영인으로 성장한다. 당시 대구부에 일본인이 많이 이주해 와 10만 명에 이르렀고, 신천 물을 대구부의 식수로 이용하기 위해 상수도를 내자 수성 들녘에 농업용수가 부족해졌다. 이렇게 되자 미즈사키는 조선인 4명과 수성수리조합을 창립하고, 조합장은 진희채에게 맡긴 후 자신은 부조합장을 맡는다. 진희채 는 중추원 참의와 도평의원을 지낸 부호로 해방 후 반민특위에 체포된 대표적인 친일 귀족이다. 조합원은 436명인데, 조선인 414명, 일본인 21명, 프랑스인 1명이었다. 여기서 조선인이 대부분이란 사실 때문에 다른 식량 수탈을 위한 수리조합과 다르다는 주장도 있다.사업비는 16만7천원인데 동양척식주식회사에서 6만2천500원을 차입하고 총독부 1만1천원, 도청 지방비 2만원, 대구부청에서 4만원을 보조받았다. 나머지 3만3천500원은 조합원이 부담했다. 1927년 완공 후 물세는 990㎡(300평)에 연간 2원60전을 균일하게 징수한다. 그 수입이 매년 9천600원이었다고 하니, 총공사비를 17년 만에 다 갚을 수 있는 어마어마한 수익사업이었다. 물세를 받은 사실이 있는데도 조선인에게 마치 엄청난 혜택을 베풀었다는 것은 오류다. 미즈사키 자신은 1년에 물세를 8전밖에 물지 않았다고 하니 6천 평의 지주인 점을 감안하면 스스로 대단한 혜택을 받았다. 수성수리조합은 조합원의 분쟁(반대운동)이 없었으므로 미즈사키의 치적이 인정되지 않느냐는 주장도 있지만 의문은 여전히 남는다.부자가 한두 번 적선했다 하더라도 높여서는 안 되는 것과 같이 일제강점기에 설령 일본인의 선행 사실이 나타났다 하더라고 검증에 검증을 거쳐야 한다.수성못 곳곳에 자리 잡은 안내표시판은 대대적으로 수정과 삭제를 해야 한다. 미즈사키 묘의 안내판은 없애고 싶지만 이 또한 역사라고 한다면 문구를 '축조의 혜택이 소수의 친일 지주에게 돌아갔다' '식량 수탈의 목적도 있었다'고 병기해 놓아야 한다. (펀글)
과연 이런대도 1년에 한번씩 추모제를 해야만 하는지 곱씹어봐야할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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