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5. 19. 18:14ㆍ산따라 길따라
如 犀 角 獨 步 行
>>>의성 조문국 나들이 <<<
0. 일시: 2021. 5. 19.(수) * 불기2565년 부처님 오신날/백년지기
0. 간곳: 조문국 사적지 및 박물관, 전시관,수정사,산운생태마을
0. 위치: 의성군 금성면 대리리 일대
오늘은 불기 2565년 부처님 오신날이다. 조용하게 하루를 보내고자 작약꽃으로 유명한 의성 금성산 부근 조문국 고분군을 찾아보러 차를 몰아본다. 국도를 타고 조문국 사적지로 가다보니 군위 화본역을 거쳐가면서 화본역도 둘러본다. 여긴 2019년에도 잠시 왔다 간 적이 있었지만 얼마전 모 방송국 "간이역" 프로그램(주연: 손현주,김준현,임지현님)이 나와 갑자기 유명세를 타기 시작한 곳이기도하다. 조문국을 둘러보고 금성산과 비봉산을 종주할때 산 정상에서 내려다본 "수정사"에도 들러 부처님 오신날을 봉축도 하고..금성산 입구의 산운생태마을도 잠시 구경하면서 조용하게 하루를 보낸다.
1. 조문국(召文國)
의성에 있는 조문국은「삼국사기(三國史記)」 권이(卷二) 신라본기(新羅本紀) 제이(第二) 벌휴이사금(伐休尼師今)조에 「二年 春正月 親祀始祖廟 大赦 二月 拜波珍飡 仇道 一吉飡 仇須兮 爲左右軍主 伐召文國 軍主之名始於此」라는 기록에 ‘벌휴이사금 2년 1월에 왕이 친히 시조사당에 제사 지내고 죄수를 크게 사면했으며 2월에 파진찬 구도와 일길찬 구수혜로서 좌우군주로 삼아 조문국을 정벌했는데 군주라는 이름이 이때 처음 시작되었다.’는 뜻이며, 벌휴이사금은 신라 9대왕으로 동왕 2년은 서기 185년에 해당되므로 조문국이 신라에 복속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1830여년 전의 일이다. 의성군 금성면이 조문국 도읍지로 지금까지 규모가 매우 큰 100여기 등 모두 374여기(2015.4 의성 금성산고분군 일원 문화재 지표조사 보고서)의 고분군(古墳群)이 남아 있는 점으로 미루어 보아 최소한 몇 세기에 걸친 족적(足蹟)이라 짐작되므로 삼한의 초기부터 존재하던 부족국가라 추정할 수 있는 곳으로 유명하며 봄이되면 작약꽃이 만발 많은 사람들이 찾아드는곳으로 유명하고, 중간엔 경덕왕릉이 있으며 그 외 많은 고분군이 존재하는 곳으로 나타나 있다. 1960년 11월 국립박물관(김재원 박사팀)에서 거대한 조문국 고분 1기를 발굴 (금동관 등 다수유물 발견) 조사하여 당시 상황연구에 큰 업적을 남겼다라고 전해지고 있다.(펀글)
# 조문국 사적지 입구에서(*召: 부를 "소"/땅이름 "조"/대추 "조")
# 금성면 금성고분군 종합 안내도
# 기마병마상
# 조문국 사적지 전경- 고분군에 한그루씩 서 있는 소나무가 주변과 너무 잘 어울리고 찍사들의 경연장이 따로 없다.
#경덕왕릉 앞 아름다운 아름드리 활송(활소나무)
#경덕왕릉-삼한시대 부족국가 조문국의 왕릉인 경덕왕릉은 금성군 대리리에 있는 왕릉으로 고분군 중에 조문국 경덕왕릉이라고 추정되는 무덤으로 조문국은 삼한시대의 부족국가였던 나라로 현재의 경상북도 의성군 금성면 일대를 도읍지로 하여 존속하다가 185년(신라 벌휴왕 2년)에 신라에 병합되었다고 전한다. 하지만 조문국이 실재했었다는 기록은 삼국사기에 짧게 언급되어 있을 뿐 문헌자료는 거의 남아 있지 않고,옛 조문국 경덕왕릉은 그 형식이 전통적인 고분으로서 봉 아래 화강석 비석과 상석이 있고 능의 둘레가 74m, 높이가 8m이며 능의 정면에는 가로 42㎝, 세로 22㎝, 높이 1.6m의 비석이 서있다. 1725년(영조 원년) 현령 이우신이 경덕왕릉을 증축하고 하마비 등을 세웠다고 하는데 그때부터 왕릉제사를 지내오다가 일제강점기에 중단되었고, 그후 경덕왕릉보존회가 구성되어 다시 제사를 지내고 있다. 소나무로 둘러싸인 묘역은 ‘조문국경덕왕릉’이라고 쓰여진 비석과 문인석·장명등·상석으로 단장되어 있다. 경덕왕릉이 발견된 전설에 대하여 경덕왕릉이 발견된 배경에 대한 신기한 전설이 조선 숙종 때 허미수 문집에 실려있다. 현재의 능지는 약 500년 전에 오극겸의 외밭이었다. 외를 지키던 어느 날 밤 꿈에 금관을 쓰고 조복을 한 백발의 노인이 나타나서 “내가 신라시대 조문국의 경덕왕인데 너의 원두막이 나의 능위이니 속히 철거를 하라.”고 이르고는 외직이의 등에다 한줄의 글을 남기고 사라졌다. 이에 놀란 외밭 주인은 일어나 보니 꿈속에 노인이 써준 글이 그대로 자기 등에 씌어 있어 현령께 고하고 지방의 유지들과 의논하여 봉분을 만들고 매년 춘계향사를 올렸으며 지금도 제례행사는 계속되고 있다.(펀글)
#조문정
# 조문사적지 포토존
#조문사적지의 하이라이트 작약꽃- 사랑하는 님을 따라 꽃이 되어버린 공주의 혼이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는 기품을 가진 꽃이 되었다. 먼저가신 님은 모란이 되었고 그 옆에 남아있게 해달라고 빌어서 작약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누구나 좋아하는 서양의 꽃이 장미라면 그에 대적할만한 동양의 꽃으로 볼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뿌리를 약용으로 쓰려고 주로 재배되어 왔으며, 꽃이 화려하고 아름다워 최근 관상용으로 개발하려는 노력들이 진행 중이다. 모란이 나무라면 작약은 풀이다. 꽃은 5∼6월에 피는데 단일(밤의 길이가 낮의 길이보다 짧은)에서 꽃눈이 분화하는 단일성식물이다. 추위나 음지에 대한 적응성이 좋으나 따뜻한 곳이 좋다. 씨앗은 이른 봄이나 가을에 뿌리며, 포기나누기는 가을에 눈을 2-3개씩 붙여 나눠주면 이듬해 꽃이 잘 핀다. 원종은 약 30여종이 분포하는데, 주로 유럽, 아시아 동부, 북미 등지의 초원에 자생한다. 미나리아재비과의 여러해살이 풀이며 뿌리가 백색인 것은 백작약, 뿌리가 적색인 것을 적작약이라 한다. 작약은 꽃이 크고 화려해 화훼 선진국에서는 원예종으로 많이 개발하고 있으며, 이미 품종으로 나온 것만 해도 무수히 많다.(펀글)
2. 수정사
경상북도 의성군 금성면 비봉산(飛鳳山)과 금성산 사이 골짜기에 있는 통일신라의 승려 의상이 창건한 사찰로 대한불교 조계종 제16교구 본사인 고운사(孤雲寺)의 말사이며, 신라 신문왕 때 의상(義湘)이 창건했다고 한다. 조선 중기까지의 연혁은 전하지 않는다. 1481년(성종 12)에 편찬된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는 수량사(水量寺)라고 나와 있으나, 신경준(申景濬)이 편찬한 『가람고(伽藍考)』에는 ‘지금은 수정사라고 부른다’고 나와 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당시에 유정(惟政)이 머물면서 금성산(金城山)에 진을 치고 왜적을 격퇴했다. 절의 규모가 컸으나 1835년(헌종 1) 큰 불로 대광전만 남기고 모두 탔다. 그 뒤 전홍(展鴻)이 옛터 위쪽 지금의 자리에 중창하였다. 1965년 이래 6년 동안 월산(月山)이 중수하여 요사와 월영루, 격외선원, 사명영당, 영지, 축대 등을 세웠다. 1973년에는 정부의 보조금으로 성견(性見)이 대광전을 중수하고, 향각(香閣)을 중건하였다. 이어 1993년 주지 총혜(聰惠)가 명부전과 범종각을 새로 짓고, 산신각과 설선당(說禪堂)을 수리하였다. 건물로는 대광전을 비롯하여 명부전, 월영루, 격외선원, 사명영당, 산신각, 설선당, 요사채 등이 있다. 유물로는 유정의 영정을 비롯하여 응규(應奎), 전홍의 영정 등이 있다.(펀글)
3. 산운생태공원(마을)
산운 생태공원은 구) 산운초등학교(폐교)를 활용하여 자라나는 세대의 자연학습 및 환경에 대한 가치관 형성을 위한 공간으로 마련하였다. 이곳은 자연생태관찰과 전통문화를 체험하는 산교육장으로 의성의 명산인 금성산과 신라시대 의상조사가 창건한 수정사로 가는 길목에 위치하고 있다. 보유수종은 관목류 및 초화류 53종이며, 주요시설로는 생태관 1동, 연못 2개소, 분수, 목교, 관찰데크, 솟대, 쉼터, 산책로 등이 있다. 넓은 마당에는 50여 종에 이르는 나무와 풀·꽃들이 자라며, 연못·분수·나무다리·관찰데크·솟대·장승·쉼터·산책로 등을 조성하였다.(펀글)
* 참 오랫만에 그네도 타본다. 세월무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