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11. 23. 20:32ㆍ산따라 길따라
如 犀 角 獨 步 行
>>>ㅇ양 시문학 나들이<<<
0. 일시: 2024. 11. 23. 죙일 * 팔공문화대학4기생 일동
0. 코스: 영양자작나무,조지훈생가(주실마을),오일도생가
문학의 고장 가을의 고장을 찾아 팔공문화대학 동기생들과 같이 경북 북부지방 영양나들이에 나선다. 소시적 국어교과서에서 나오는 조지훈님의 고향인 영양 주실마을을 방문한다. 비록 차가운 날씨이지만 주변엔 낙엽과 강가의 갈대꽃 그리고 구기자 열매가 장관을 이뤄 주변 산들과 조화를 이루고 있는것 같다. 생가주변엔 많은 문인들이 살고 있는듯보인다. 하지만 村의 특징 빈집들이 넘 많이 보여 마음이 아프다. 덩달아 군에서도 예산을 들어 이곳저곳 잘 만들어 놓은것 같은데.... 많은 사람들이 다녀갔으면 하는 바램을 해본다.가을날 시인들의 고향(생가)나들이 그런대로 유익하고 뜻깊은 하루 일정인것 같다.12월 송년회를 기다리면서~~
# ㅇ양 한바꾸 흔적
(ㅇ양 자작나무숲)
자작나무숲 주변엔 공사중이라 진입이 어렵고 전기차 출발시간이 맞질 않아서 입구만 구경한다. 아쉽고 다음에 자작자나숲을 보러 다시 와야겠다.
(주실마을 조지훈문학관)
# 주실마을(조지훈시인 탄생지)
# 조지훈(趙芝薰, 1920. 12.3.-1968. 5.17.)- 일제 강점기 이후로 활동한 대한민국의 수필가, 한국학 연구가, 시인으로, 청록파 시인 중 한 사람이다.본관은 한양(漢陽)이고 본명은 조동탁(趙東卓)이다. 경상북도 영양에서 태어났다. 독학으로 중학 과정을 마치고서 동국대학교[에 입학하여 국어국문학과를 나온 그는 1939년 《문장》지에 〈고풍의상〉과 〈승무〉를 추천받아 문단에 등장하였다. 광복 후 경기여자고등학교 교사와 동국대학교 강사, 고려대학교 교수를 역임했다. 1961년 벨기에에서 열린 국제 시인 회의에 대한민국 대표로 참석하였다. 이듬해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장에 취임하면서 민족문화 개발에 주력하였다.청록파의 한 사람으로 명시를 많이 남긴 조지훈의 시는 주로 자연, 무속, 선을 소재로 한 민족다운 색채가 짙고 불교 세계를 향한 관심은 종교의식을 일깨워 작품에 반영되었다. 박목월과 박두진을 비롯한 다른 청록파 시인이 후에 시 세계를 근본으로 변혁했는데 조지훈은 초기 자연과 친화한 시 세계를 꽤 많이 유지하여 1956년 자유문학상을 받았다. 그 후로도 활발히 문학 활동을 하며 고려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던 중 1968년 5월 고혈압으로 토혈한 후 입원, 고혈압과 기관지확장증의 합병증으로 5월 17일 49세의 젊은 나이로 끝내 타계했다.시집으로 《청록집》과 《조지훈 시선》이 있고 수필집 《창에 기대어》, 논문집 《한국 민족운동사》 이 있다.
# 落花-
꽃이 지기로소니/바람을 탓하랴./주렴 밖에 성긴 별이/하나 둘 스러지고/귀촉도 울음 뒤에/머언 산이 다가서다.
촛불을 꺼야 하리/꽃이 지는데/꽃 지는 그림자/뜰에 어리어/하이얀 미닫이가/우련 붉어라.
묻혀서 사는 이의/고운 마음을/아는 이 있을까/저허하노니/꽃 지는 아침은/울고 싶어라.
# 조지훈님 생가(호은종택)에서 *壷:병 호
# 防牛山莊-조지훈님의 소시적 생가
# 僧舞- 학교 교과서에도 등장하는 승무가 아직도 귀에 아른거린다. 공부할때 하도 많이 뇌새김한다고~~~~
얇은 사(紗)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파르라니 깍은 머리
박사(薄紗) 고깔에 감추오고
두 볼에 흐르는 빛이
정작으로 고와서 서러워라.
빈 대(臺)에 황촉(黃燭)불이 말없이 녹는 밤에
오동잎 잎새마다 달이 지는데
소매는 길어서 하늘은 넓고
돌아설 듯 날아가며 사뿐이 접어올린 외씨보선이여.
까만 눈동자 살포시 들어
먼 하늘 한 개 별빛에 모두오고
복사꽃 고운 뺨에 아롱질 듯 두 방울이야
세사(世事)에 시달려도 번뇌(煩惱)는 별빛이라.
휘어져 감기우고 다시 접어 뻗는 손이
깊은 마음 속 거룩한 합장(合掌)인 양하고
이 밤사 귀또리도 지새우는 삼경(三更)인데
얇은 사(紗)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 鳳凰愁(봉황의 근심)- 벌레 먹은 두리기둥 빛 낡은 단청(丹靑) 풍경 소리 날러간 추녀 끝에는 산새도 비들기도 둥주리를 마구 첬다. 큰 나라 섬기다 거미줄 친 옥좌(玉座) 위엔 여의주(如意珠) 희롱하는 쌍룡(雙龍) 대신에 두 마리 봉황새를 틀어 올렸다. 어느 땐들 봉황이 울었으랴만 푸르른 하늘 밑 추석(甃石)을 밟고 가는 나의 그림자. 패옥 소리도 없었다. 품석(品石) 옆에서 정일품(正一品) 종구품(從九品) 어느 줄에도 나의 몸 둘 곳은 바이없었다. 눈물이 속된 줄을 모르량이면 봉황새야 구천(九天)에 호곡(呼哭)하리라. 봉황수는 시인님의 등단 첫 작품으로 나라잃은 설움을 표현한 시가 아닌듯 하네요."아 시펄 와 이리 안풀리노 頭가리 아파 죽갔네"~정1품부터 종9품까지 내 몸둘곳은 찾을 수가 없어 머리가 시기 아프오니껴?ㅎㅎ
# 주실마을 앞 갈대꽃
(오일도시공원(생가))
#시인 오일도님(1901~1946)-시인님은 "본명이 희병(熙秉)으로 경상북도 영양(英陽) 출생하였다. 경성제1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에 건너가 릿쿄[立敎]대학 철학과를 마쳤다. 그의 작품 활동은 1925년 『조선문단(朝鮮文壇)』 4호에 시 「한가람백사장에서」를 발표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창작 활동을 전개한 것은 『시원』을 창간하면서부터였는데, 여기에 「노변(爐邊)의 애가(哀歌)」 · 「눈이여! 어서 내려다오」 · 「창을 남쪽으로」 · 「누른 포도잎」 · 「벽서(壁書)」 · 「내 연인이여!」 등을 발표하였다. 그는 이밖에도 다수의 한시 및 한역시를 많이 남겼으나 시집은 한 권도 내지 못하였다. 귀국 후 한때 서울에서 중등교사로 재학하다가 1931년을 전후하여 문단에 등장, 《시문학(詩文學)》 《문예월간(文藝月刊)》 등에 서정시(抒情詩) 여러 편을 발표하였으며, 1934년 《시원(詩苑)》을 창간, 문단에 예술지상주의의 꽃을 피게 하였다. 그의 작품은 황량(荒凉)과 조락(凋落)이 주조(主調)를 이룬다. 그의 작품은 낭만주의의 기조 위에 애상과 영탄이 서로 얽혀 있는 경향을 보인다. 따라서, 그의 시는 지성으로 감정을 절제하기보다는 오히려 감정의 자유로운 표출에 역점을 두었다. 그리고 거기에 깃든 애상과 영탄은 그로 하여금 어둡고, 그늘지고 암울한 정서를 주로 노래하게 만들고 있다.1935년 4월, 『시원』 2호에 발표된 「눈이여! 어서 내려다오」에서 보이는 ‘서리의 독배에 터진 입술’이나 ‘피투성이 낙엽’, ‘대지의 상처’와 같은 심상을 통해서도 낭만과 애상, 그리고 영탄이 얽힌 암울한 정서를 엿볼 수 있다. 오일도는 작품 활동보다는 순수한 시 전문잡지인 『시원』을 창간하여 한국 현대시의 발전에 기여하였다는 점에서 더 중요한 시사적 의미를 지니는 시인이라 할 수 있다. 기타 유고(遺稿) 시로 「내 창이 바다에 향했기에」 · 「가을하늘」 · 「코스모스꽃」 · 「지하실의 달」 · 「봄아침」 · 「봄비」 · 「바람이 붑니다」 · 「시월(十月)의 정두원(井頭園)」 · 「송원(松園)의 밤」 · 「별」 · 「도요새」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