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9. 18. 18:56ㆍ세옹지마 인생길
如 犀 角 獨 步 行
>>>단양우씨 상조 5세조 제단비 방문<<<
0. 일시: 2024. 8. 10. * 죙일/100년지기
0. 위치: 충북 단양군 적성면 애곡리 469-3(희역동)/5세조 제단비는 산쪽으로 1km정도 거리
* 바로 옆엔 6세조 시중 우중대어르신 산소는 별도 있음
몇해전부터 필자의 시조제단비가 단양에 모셔져 있다는것을 언론을 통해서 알았지만 접근하기가 쉽지만 않았다. 오늘 단양 여러곳을 둘러볼려고 왔다가 시간의 허락을 받아서 방문하게되었다. 태어난지 63년만에 처음 상조 5세대 제단비를 방문하니 감개무량이다. 예를 갖추고 주변에 있는 잡풀도 좀 뽑는다. 범위가 넓어서 일부 흔적만 남긴다. 제단비 옆엔 6대조 고려문화시중 우중대선대어르신의 묘소가 별도로 만들어져 있다. 중대 선대어르신은 고려시대에 문화시중(종1품-조선의정부 현재:국무총리격)으로 많은 역할을 하였으며 단양우씨들의 본관을 단양으로 정하셨다고한다. 유일하게 산소가 조성되어 있고 비석에는 "고려시중우공중대지묘"라고 씌어져 있으며, 뒷면엔 충북단양 금수산~~~~판각되어 있다. (문하시중: 하단 참조)
단양 우씨(丹陽 禹氏) 시조 본관 분파 족보 항렬 돌림자 : 네이버 블로그 (naver.com): 참고
<단양우씨 선대어르신 1~11세 >
시조(始祖) 휘(諱) 禹 현(玄)字 - 향공진사(鄕貢進士) ,
2세 휘(諱) 신(臣) - 전법령(典法令),
3세 휘(諱) 인가(仁可) - 문과급제 양주목사(楊州牧使),
4세 휘(諱) 잉순(仍順) - 문과급제 관찰사(觀察使),
5세 휘(諱) 경절(慶節) - 지도평의사사(知都評議司事),
6세 휘(諱) 중대(中大)-고려 문하시중(단양으로 귀임 후 본관을 단양으로 정함) * 子 천규,천계,천석,천우,천성
7세 휘(諱) 천규(天珪:장남)/천석(天錫:3남)- 문하시중평장사
8세 휘(諱) 탁(卓)-역동 문희공(천규의 장남)/천석 장남 칭,차남 팽
9세 휘(諱) 원광(元光):참의공파/원명(元明):봉상정공파
9세 휘(諱) 칭의 자 국진:문강공파
10세 휘(諱) 伻의 손 (복생의 자) 인열:정평공파/ 희열:문숙공파
10세 휘(諱) 偁의 손 (길생의 자) 충정공(玄寶) 5男
11세 휘(諱) 玄寶의 자 洪壽:대제학공파, 洪富:예안군파, 洪康:안정공파,洪得:집의공파, 洪命:판서공파
이 10개 파로 나누어져 있으며 조선초기 고난의시절을 보낸후 이방원이 즉위하면서 가문의 영광을 다시 찾을 수가 있었고 예안군파와 안정공파가 번성하였으며, 족보는 조선후기 1600년 우성적,우선경,우치근어르신이 만든 예안본이라고 하고,1~6대 다시 줄 바꾸어서 6~11대로 친손계만 등재되었으며 부-녀 외손계는 싣지 않았다.
# 희역당 사당-단양우씨 선대5세제단과 6세 우중대어르신의 묘소를 위하여 만들어진 제사로 내부엔 희역당기,헌성록이 보관되어 있다.
# 제단비로 가는 입구
# 상조1~5세대 어르신 제단비(*충북 단양군 적성면 애곡리 소재)
# 6세 고려시중 우중대어르신의 묘지와 비석
# 7세조 우천석,8세조 우팽어르신 묘소(충주 소재) -우천석(禹天錫)어르신은 고려 후기의 문신으로, 우중대(禹仲大)의 3남이고, 우탁(禹倬)의 숙부이며, 우인열(禹仁烈)과 우현보(禹玄寶)의 증조이며,1266년(원종7) 문과 을과(乙科) 급제하고,1268년(원종9) 도병마녹사(都兵馬錄事)로서 낭장(郞將) 박신보(朴臣甫)와 함께 원의 사신인 왕국창(王國昌)과 유걸(劉傑) 등을 따라 흑산도(黑山島)의 바닷길을 살폈는데, 이는 남송(南宋)과 일본을 견제하기 위한 원의 조처였다. 1273년(원종14) 서해도안찰사(西海道按察使)로 재직 중 제주를 거점으로 저항하는 삼별초를 공격하였으나 이때 서해도(西海道)의 전함이 많이 파선되었다는 이유로 원의 다루가치(達魯花赤) 이익(李益)의 문책을 받고 투옥되었다. 충렬왕(忠烈王)조에 전라도안렴부사(全羅道按廉副使)를 거쳐 1280년(충렬왕 6) 감찰잡단(監察雜端) 진척(陳倜)을 비롯한 감찰사(監察司)의 관원들이 유배 또는 파직되자 낭장에서 감찰단으로 승진했다.이후 전리정랑(典理正郞)을 거쳐 증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올랐다.
# 8세조 문희공 우탁어르신비(경북 안동 소재):문희공파
# 10세 우현보어르신-우현보(1333-1400)어르신은 1333년에 태어나 1355년에 과거에 급제하고, 최고 권력자인 시중(侍中) 벼슬에 올랐다. 그는 당대에 상례(喪禮)를 삼년상으로 하고 동성동본 혼인 금지, 유학 증진, 의관(衣冠) 제도 확립 등에 힘썼다. 안향에서 우탁으로 이어진 성리학의 기반을 넓히는 데 기여한 셈이다.우현보에게 가장 큰 자랑거리는 아들 5형제, 홍수(洪壽)·홍부(洪富)·홍강(洪康)·홍득(洪得)·홍명(洪命)이 모두 과거에 급제한 것이다. 아버지와 아들 5형제가 정부 요직에 두루 포진했으니, 한 집안에서 국사(國事)를 논할 정도였다. 더욱이 큰손자인 우성범(禹成範)이 공양왕의 부마(사위)가 되면서 왕실과 튼튼한 인연을 맺기도 했다. 이 때문에 우씨 집안은 성리학 정착에 기여한 신진 사대부 집안이면서도 왕실의 외척으로 왕의 비호를 받는 집안이라는 엇갈린 평가를 받게 된다. 그러나 비극이 찾아온 것은 1392년 4월 정몽주가 선죽교에서 살해되면서부터다. 참살된 정몽주의 시신을 거둬준 이가 바로 우현보였다. 우현보는 계림(경주)으로 유배당하고 아들 5형제도 뿔뿔이 유배를 당했다. 그해 7월 공양왕이 이성계에게 내쫓기던 날 우현보의 손(우홍수의 자)우성범은 개성 남문밖에서 공개 참살되고 조선 개국이 선포된 뒤에는 유배지에 있던 첫째 홍수, 넷째 홍득, 다섯째 홍명이 장살(杖殺·곤장을 맞고 살해)됐다. 곤장을 많이 맞으면 장독이 올라 죽는 수도 있지만, 사형(死刑)이 따로 있었으니 죽지 않을 만큼 때리는 게 장형(杖刑)이다. 그런데 세 형제가 죽음에 이른 것은 죄다 정도전(鄭道傳)의 사주로 빚어진 일이라고 실록은 기록하고 있다.고려와 함께 몰락한 우씨 집안이 극적으로 부활한 것은 이방원이 주도한 제2차 왕자의 난 때로 정종 2년(1400년)에 우현보의 문하생인 이래(李來)가 이방원의 바로 위 형인 방간이 방원을 제거하려 한다는 사실을 우현보에게 알렸고, 우현보는 이 사실을 둘째 아들 홍부에게 알려 이방원에게 대응하게 했다. 이방원은 즉시 사병을 움직여 방간의 사병들을 제거했고, 정종으로부터 권력까지 승계할 수 있었다.고려의 원수이자 집안의 원수인 조선에 우현보가 돌연 협조적인 태도를 취한 것은 왜일까? 이는 우현보와 이방원의 인연 때문이었다. 이방원이 과거에 급제할 때 우현보가 시험관을 맡았다. 당시 급제자들은 자신을 입신시켜 준 시험관을 은문(恩門)이라 칭하며 평생 스승으로 모셨다. 그들 사이에서는 스승과 제자보다도 더 강한 인연이 맺어졌다. 이 같은 인연이 이방원에게 결정적인 제보를 한 것이다. 이 일로 인해 홍부와 셋째 아들 홍강은 원종공신이 돼 우씨 집안은 정치적인 재기를 했고 이를 기반으로 조선시대에도 벼슬이 끊이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아쉽게도 묘소가 북한땅 개성에 있어 찾아 볼 수가 없다.
# 11세조 예안군파 우홍부선조비(예조판서,예안군,정평공,원종공신/경기도 여주시 대신면 상구리 441-2 소재)-문음(門蔭)으로 입사하여 1382년(우왕 8) 장복서령(掌服署令)으로 예부시(禮部試)에 급제하였으며,1392년(공양왕 4) 6월 전의감부령(典醫監副令) 재직 중에 이성계(李成桂) 일파의 구신(舊臣) 제거와 관련되어, 관직을 삭탈당하고 원방에 유배하도록 결정되었다. 1392년(태조 1) 7월 고려 구신에 대한 재논죄와 함께 직첩을 몰수당하고 결장(決杖) 후 원방에 유배되었다가 곧 방면되었으며, 1398년(태조 7) 윤5월 직첩(職牒)을 환급받았다.1400년(정종 2) 1월 회안군(懷安君) 방간의 처질 판교서감사(判校書監事) 이래(李來)가 우홍부의 아버지 우현보에게 회안군이 정안군(靖安君)을 제거하려 한다고 하자, 이를 전해 듣고 정안군에게 고변하였다. 이 공로로 이해 11월, 특별히 개성유후사부유후(開城留後司副留後)에 서용되었다.1412년(태종 12) 이방간의 난에 대한 공로가 다시 논의되어 원종공신(原從功臣)에 추록되고, 예안군(禮安君)에 봉군되었다. 1413년 왕거을오미(王巨乙吾未) 사건에 관련되어 고신(告身: 벼슬아치에게 주던 사령장)을 몰수당하였으나, 이듬해 질병을 기한 태종의 특은으로 고신을 환급받은 뒤 1414년 사망하였다.
주)문하시중(門下侍中)은 고려 문화성의 최고 관리로 실질적으로 정무를 담당하는 관직 중 최고위 관직이었다. 품계는 종1품이다.982년(성종 1) 내사문하성(內史門下省)을 설치하면서 처음으로 문하시중(門下侍中)을 두었으며, 문종(文宗, 재위 1046∼1083) 대 내사문하성이 중서문하성으로 개칭되면서 중서문하성의 장관을 일컫게 되었다. 종1품으로 정원은 1명이며, 같은 종1품직인 중서령(中書令), 상서령(尙書令)과 함께 재신(宰臣)으로 일컬어졌다. 고려 시대 중서령이나 상서령은 일반적으로 명예직이나 증직(贈職)인 경우가 많아, 문하시중이 수상에 해당하는 최고위 관직으로 기능하였다.
1275년(충렬왕 1) 원나라의 간섭으로 중서문하성과 상서성을 병합하여 첨의부(僉議府)로 격하되면서, 문하시중의 명칭도 첨의중찬(僉議中贊)으로 바뀌고 좌⋅우첨의중찬을 두었다. 이후 첨의부의 개칭과 관제 개편에 따라 도첨의시중(都僉議侍中), 도첨의정승(都僉議政丞) 등으로 명칭을 바꾸고 인원도 1명으로 줄였다. 1356년(공민왕 5)에는 반원 운동으로 관제가 전면적으로 복구되면서 중서문하성이 부활되었고 다시 문하시중이라 하였다. 그러나 이후에도 관제 개편으로 첨의정승, 첨의시중 등으로 명칭이 바뀌곤 하였다. 1369년(공민왕 18)에는 도첨의부가 문하부(門下府)로 개편되면서 다시 문하시중이라 하였고, 문하좌시중, 문하우시중 2명을 두었다. 창왕(昌王, 재위 1388~1389) 대 왼쪽을 더 우대하는 원칙에 따라 좌시중은 문하시중으로, 우시중은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으로 각각 바뀌었다. 조선 시기에 들어 문하부가 의정부(議政府)에 병합되면서 좌시중과 우시중은 의정부의 좌의정과 우의정으로 계승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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