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6. 27. 09:24ㆍ지맥산행/아름다운 가볼곳(해외)
'지구에서 가장 길고 깊은 여행' 동시베리아를 가다
8 days of Happiness in Eastern Siberia
‘지구에서 가장 긴 철도에 몸을 싣고, 지구에서 가장 깊은 호수를 만나러 가는 여행.’
오랜 역사를 거슬러 숱한 여행자의 '단 하나의 꿈'이었던 시베리아가 성큼 다가왔다. 최근 들어 시베리아 횡단열차가 거치는 주요 도시에 비행기 직항로가 잇따라 열린 덕분이다. 길어야 일주일 밖에 여름휴가를 내지 못하는 우리나라 직장인에게도, 시베리아 여행은 더 이상 꿈의 영역이 아니다.
하바로브스크에서 이르크추크까지 2,574km의 거리를 60여 시간을 TSR(횡단열차)를 타고 창밖으로 푸르렀다 붉어지는 하늘을 번갈아 만나는 일. 찰나의 여름을 만끽하려는 활기찬 이국의 도시를 거닐고 어머니의 품 같은 호수에 살포시 발 담그는 일. 기자가 직접 다녀온 8일간의 동시베리아 일주를 기록한다. 세계에서 가장 넓은 벌판으로, 당신의 여름을 초대하기 위해.
겨울왕국의 여름, 8일의 여정
여름과 시베리아. 왠지 어울리지 않는 조합 같다. 우리가 상상하는 시베리아는 온통 눈으로 덮힌 설국의 풍경이니까. "겨울에 가야만 진짜 시베리아를 볼 수 있다"고 조언하는 여행자가 많은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따듯한 시베리아'의 매력도 충분하다. 영하 수십 도의 혹독한 추위를 견디는 대신 광활하고 푸른 초원과 끝없이 펼쳐진 자작나무숲, 시간마다 색이 변하는 '얼지 않은' 바이칼 호수를 감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선택은 떠나는 자의 몫이다.
블라디보스토크부터 모스크바까지 전 구간을 횡단하려면 적어도 보름 이상이 걸린다. 그 대신 동시베리아로 눈을 좁혀보자. 여행의 시작과 끝은 러시아 극동부의 아름다운 도시 하바롭스크부터 '천혜의 호수' 바이칼을 둘러볼 수 있는 이르쿠츠크까지다.
인천공항에서 하바롭스크까지 직항 비행기(사할린항공)를 타면 세 시간도 채 지나지 않아 러시아 땅을 밟는다. 블라디보스토크 직항도 있지만, 하바롭스크에서 출발하면 횡단열차 타는 시간을 반나절 가량 줄일 수 있어 '일주일 휴가'를 내는 직장인들에게 유용하다.
<1day 하바롭스크>
시베리아와의 첫 입맞춤
첫 날 오후. 하바롭스크 공항에 도착해 1번 트램을 타고 시내로 이동한다. 푯값은 20루블. 우리 돈으로 360원이다. 수십 년은 굴렀을 법한 녹슨 트램(거리 전차) 창밖으로는 러시아의 낡은 거리가 엽서처럼 지나간다. 이 도시는 관광지라고 부르기엔 무리가 있다. 별다른 관광명소도, 호화로운 호텔도 찾기 힘들다.
그러나 하바롭스크에 발을 들이자마자 밤 열차로 시베리아 횡단을 시작하는 걸 권하고 싶진 않다. 발걸음을 급하게 거두기엔 이 도시의 일상은 너무 아름답다. 웅장함과 아기자기함이 공존하는 러시아 정교회 건물들, 노을빛을 머금고 무겁게 흐르는 아무르 강변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이 아늑한 풍경 안에 내가 들어와 있다는 사실에 저절로 머리 숙이게 될 것이다.
<2day 하바롭스크>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네
아무르 강. 시베리아 남동부에서 발원해 중국 동북부를 거쳐 다시 하바롭스크를 지나 오호츠크해로 흘러드는 2,824km의 물줄기다. 중국에서는 흑룡강으로 불린다.
하바롭스크에 오면, 아무르 강변을 거닐어야 한다. 활처럼 늘어선 모래벌판에서 누군가는 가족애에 파묻히고, 누군가는 설레는 사랑의 언어를 속삭인다. 이 강변을 걸어본 자만이 이해할 수 있는 감성이 있다.
정말이지,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강이다.
<2day 하바롭스크>
횡단열차에 오르다
하바롭스크에서의 둘째 날 밤, 시베리아 횡단열차에 몸을 싣는다. 이르쿠츠크까지 60시간 여정의 출발. 샤워 시설은 기대하기 어렵고, 승객 수에 비해 식당도 턱없이 좁다. 약간의 먹거리와 찝찝함을 견딜 마음가짐을 준비하자. 물론 기착지마다 길게는 30분씩 정차하기 때문에 음식은 틈틈이 채울 수 있다. 객실 등급에 따라 6인실과 4인실, 2인실이 있다. 푯값은 등급마다 대략 두 배씩 차이가 난다.
<3day 시베리아 횡단열차>
책 몇 권, 창밖의 풍경, 미니 보드카와 컵라면.
혼자 떠난 여행이라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열차 안에서의 시간은 생각보다 금세 흐른다. 무뚝뚝하고 영어를 못하는 러시아인 승객들과 대화를 나누기는 어렵지만, 그들은 대부분 남모르게 배려가 깊다. 수십 시간 좁고 어두운 방에서 함께 머물다 어느 순간 아무 말 없이 빵조각을 건네받기라도 할 때는, 오묘한 '동지애'가 끓어오를지도 모른다.
물론 함께 떠난 친구나 연인, 가족이 있다면 더할 나위 없다. 스마트폰 데이터로밍도 잘 터지지 않는 갇힌 공간에서 심심하지 않을 방법은 대화뿐이다. 그 대화의 상대가 누구든 더 깊이 알게 될 것이고, 더 사랑하게 될 것이다.
<4day 시베리아 횡단열차>
횡단열차의 또 하나의 매력, 기착지와의 못내 아쉬운 만남이다. 주요도시에서는 30분 가까이 정차하는데, 그 짧은 휴게의 순간은 보물과도 같다. 10㎡ 남짓한 열차 칸에서 벗어나 폐에 바깥 공기를 불어넣는 시간이자, 어느새 위장으로 흡입된 간식거리들을 다시 열차 테이블에 채워 넣는 시간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미묘하게 서로 다른 분위기를 내뿜는 도시들을 짧게나마 둘러보며, 내가 넓디넓은 시베리아의 한가운데를 흐르다 잠시 멈췄다는 걸 오감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테니 말이다.
<5day 이르쿠츠크> 기차여행의 끝, 바이칼의 시작.
닷새째 새벽, 이르쿠츠크역에 내리며 60시간 열차 횡단의 마침표를 찍는다. 초췌해진 몰골로 무거운 짐과 함께 몸을 내리면, 잠시 멍한 기분에 휩싸일지 모른다. 대장정을 끝낸 공허감이랄까.
그러나 정신을 차리자. '시베리아의 파리'라고 불리는 이 우아한 도시는 여행의 끝이 아닌 새로운 출발선이 될 테니까. 열차에서 내려 바로 바이칼 호수로 떠나는 일정도 있지만, 시간이 허락한다면 하루 정도는 이르쿠츠크를 둘러보며 '나무로 만든 도시'의 매력에 취해보기를 권한다.
<5day 이르쿠츠크>
나무로 만든 도시
오래된 목조 건물이 길가를 듬성듬성 채웠다. 강변을 따라 거창한 러시아 정교회 건물이 늘어섰고, 거친 대륙과 어울리지 않는 아기자기한 집들도 한 풍경에 담겨 있다. 러시아 발레와 오페라가 자주 열리는 문화의 도시이자, 파스텔 톤으로 덧칠한 목조건물을 실컷 감상할 수 있는 나무의 도시. '시베리아의 파리'라는 별명으론 다 설명할 수 없는 매력이 거리마다 흩뿌려져 있다.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즐거움. 시베리아의 주요 관광지라 그런지 이르쿠츠크에는 훌륭한 펍과 칵테일 바가 많다. 목조건물 단지인 130구역의 드래프트 맥주 바 '하라츠펍', 소설가 헤밍웨이의 초상을 간판으로 내세운 칵테일 바 '리버티'(모스크바게이트 가는 길에 위치) 등에서는 우리나라보다 저렴한 값에 품질 좋은 술을 실컷 마실 수 있다.
<6day 알혼섬>
바이칼 호수 만나러 가는 길
엿새째 아침, 분주하게 짐을 싸서 미니버스에 오른다. 전 세계에서 모인 배낭여행자들이 20인승도 되지 않는 버스에 다닥다닥 붙어 앉았다. 다섯 시간 정도를 달리면 바이칼 호수를 만날 수 있다. 선착장에서 배를 바꿔 타고 10여 분을 더 가면, 바다 같은 호수에 놓인 거대한 섬에 다다르게 된다.
러시아인들에게 '주술을 이뤄주는 신비의 섬'으로 불리는, 알혼섬이다.
<6day 알혼섬>
어머니 호수의 품에 안긴 신비의 섬
제주도 절반 크기의 섬이 바다가 아닌 호수에 있다는 사실부터 신비롭다. 바이칼 호수를 감상하는 지점은 여러 곳이 있지만, 알혼섬을 빼놓고는 바이칼의 영험함을 이야기하기 힘들다.
가장 번화한(?) 후지르 마을에는 여행자 숙소가 밀집해 있다. 그 중 단연 돋보이는 숙소는 니키타 하우스다. 200여 명의 여행자를 받는 이 게스트하우스는, 비밀의 섬처럼 여겨지던 알혼으로 전 세계 여행자를 이끈 공로를 인정받고 있다. 매일 아침 이곳에서 마련한 다양한 일일투어 프로그램에 따라 여행자들이 헤쳐 모인 뒤 어디론가 떠난다. 굳이 투어에 참여하지 않고서도, 인근 가게에서 자전거를 빌려 섬을 둘러보는 것만으로도 하루는 금세 흘러갈 것이다.
<7day 알혼섬>
그저 바라보다
"거기서 무얼 해?"라고 묻는다면, 대답하지 않겠다. 딱히 할 게 없는 마을이니까.
"거기에 뭐가 있어?"라고 묻는다면, 대답하겠다. 바이칼이 있다고.
세계에서 가장 깊은 담수호. 하루 종일 바라만 봐도 질리지 않을 광활한 호수 앞에서, 한낱 먼지 같은 존재인 내가 '뭘 해보려고' 하는 것 자체가 우습게 느껴진다.
오랜 시간 멍하니 호수를 마주하다 보면 몇 가지 깨달음을 얻게 된다. 물의 색깔은 1백 가지가 넘는다는 것. 물빛은 시간마다, 시선마다 다르게 옷을 갈아입는 다는 것. 하늘은 맑을수록 멀어졌다가 흐려질수록 점점 내 곁에 다가온다는 것. 그리고 나는 정말 작은 존재라는 것.
<8day 이르쿠츠크>
여행 마지막 날 아침, 다시 짐을 챙겨 미니버스를 타고 이르쿠츠크로 돌아온다. 밤늦게 출발하는 비행기를 타기 전까지 다시 한 번 도시를 두르며 정들었던 러시아의 풍경을 눈에 아껴 담는다. 중앙시장과 130구역 등에서 기념품을 사는 것도 여행의 끝을 매듭짓는 좋은 방식이다.
늦은 밤 공항으로 가는 택시나 버스에 몸을 싣고, 좀처럼 해가 지지 않는 한여름의 동시베리아에게 작별의 인사를 건넨다.
안녕, 시베리아.
언젠가의 겨울에 또 만나.
머물렀던 숙소들
- 발렌시아 미니 호스텔 / 하바롭스크스페인 발렌시아 출신 아주머니가 운영하는 시내 한복판의 조그만 게스트하우스. 대개 4인실이며, 주인장은 영어를 못하지만 구글 번역기 등을 이용해 최선의 설명을 다해준다. 6월 기준 1인 1박에 우리 돈으로 1만 7천 원 정도다.
- 롤링스톤즈 게스트하우스 / 이르쿠츠크청년 세 명이 운영하는 도심 한복판의 게스트하우스. 올드록의 향수와 젊은 주인장들의 열정을 동시에 느낄 수 있다. 2인실부터 4인실까지 다양하다. 1인 1박에 1만 6천 원 가량(6월 기준). 인근 칵테일바의 웰컴 드링크 쿠폰도 주고, 200루블(3천 6백 원)만 더하면 '삼겹살 수준'의 베이컨을 포함한 훌륭한 조식도 제공한다.
- 니키타하우스 / 알혼섬알혼섬을 관광명소로 탈바꿈한 주인공. 후지르 마을 중앙에 있다. 화장실 공용 여부, 난방 방식 등에 따라 방 가격이 바뀌는데 대개 1인당 2만 원 전후다. 아침과 저녁식사를 제공하며 맛도 매우 훌륭하다. 전 세계 여행자를 벗 삼기에도 더할 나위 없는 곳이다.
따라 방 가격이 바뀌는데 대개 1인당 2만 원 전후다. 아침과 저녁식사를 제공하며 맛도 매우 훌륭하다. 전 세계 여행자를 벗 삼기에도 더할 나위 없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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