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9. 4. 09:28ㆍ역사속의 오늘
107년 전 오늘(1909년 9월4일) 대한제국은 힘없이 간도를 빼앗겼다.
총칼을 앞세워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한 일본제국은 이날 남만주철도 건설권·푸순 탄광 채굴권과 2만1000㎢ 간도(백두산 북쪽 만주지역)를 맞바꾸는 조건으로 청나라와 '간도협약'을 체결했다.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제는 간도 매각으로 '만주침략 비용마련'과 '전초기지 확보'라는 두 가지 실익을 얻게 됐다. 당시 미국과 러시아는 대한제국과 청나라간 영토 분쟁지역인 간도를 일제가 지배하는 것을 못마땅해했다.
'만주 정벌'의 야욕을 갖고 있던 일제는 한발 물러서는 듯하면서도 실익을 챙겼다. 일제는 영토와 대한제국 주민을 청나라에 넘기는 대가로 막대한 자금과 보급로 확보를 위한 철도선을 손에 쥐었다. 일제는 눈엣가시였던 독립운동 근원지를 자신들의 관리밖에 두는 것이 다소 께름칙했지만, 당초 경찰서(임시간도파출소) 대신 4곳에 영사관을 설치하는 조항을 포함시켜 항일 움직임도 예의주시했다. 대한제국의 반발은 무력했다. 4년 전 을사늑약(1905년)으로 조선의 외교권을 빼앗은 일제는 일언지하에 대한제국 고종황제의 무효주장을 묵살했다. 을사늑약을 무효라고 주장한 고종은 간도 협약의 무효를 외쳤지만 힘이 없었다. 결국 일제는 청나라와 간도 협약을 맺었다. 간도 협약은 △대한제국과 청나라 국경을 두만강으로 둠 △연길·용정 등 4곳 개방 및 영사관 설치 △한국민 거주승인(청나라 법권) △일제 철도부설권·탄광채굴권 획득을 골자로 한다.
조선인은 하룻밤새 청나라 사람이 됐다. 고조선·고구려·발해의 주요 영토이자 청나라가 들어서기 전 버려진 땅을 일궈 터전을 잡은 우리 주민들은 갑자기 신분이 바뀌었다.
앞서 간도는 19세기 말(1900년대 초) 조선과 청나라 간 소유권 분쟁지였다. 일제의 핍박을 피해 달아난 조선인이 대거 간도로 이주하고 청나라인의 유입이 늘어나면서 '영유권 문제'가 불거졌다. 청나라는 이곳을 '민족의 발상지'로 두고 출입을 금했다가 조선인들의 유입이 늘어나자 이를 해제하고 이주를 허락했다. 영유권 갈등의 핵심은 과거 협약한 영토를 어디까지 봐야하냐는 '해석'의 차이였다. 1712년 백두산정계비에 쓰여진 '토문강'을 두고 조선은 송화강 상류로, 청나라는 두만강으로 달리 해석하며 갈등의 골은 더욱 깊어졌다. 양국은 이와 관련해 1885년과 1887년 두 차례 국경회담을 열었으나 결론을 내리지 못한 채 답보상태에 놓였다. 하지만 일제가 조선을 수탈하고 간도 협약을 체결하면서 청나라의 손에 넘어갔다. 해방 직후 한국은 간도를 되찾고자 노력했지만 특별한 성과는 얻지 못했다. 독립운동가 김무정은 "만주전쟁에서 조선인 군대가 피 흘려 싸운 대가로 조선은 간도를 얻어야 한다"며 '간도 되찾기' 운동을 벌였지만 유야무야 됐다. 간도 영유권 문제는 지금도 해결되지 않은 과제다. 학계와 민간에서 간도되찾기운동본부 등을 마련해 활동 중이다. 간도협약 100주기인 2009년 자유선진당 이명수 의원이 '청일 간도협약 무효안'을 국회외교통상위원회에 제출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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