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월 청령포+선돌+정암사나들이

2019. 12. 16. 07:56산따라 길따라

>>>영월 청령포+선돌+정암사나들이<<<

0. 일시: 2019.12.15. (일)   * 대구여행자클럽 동행

0. 코스: 영월 선돌-청령포-기차여행(영월-태백)-정암사 수마노탑


단종대왕님의 恨이 서려있는 청령포를 탐방한다. 지금은 관광지로 명성이 높지만 1457년엔 어린 왕이 삼촌의 역적으로 왕권을 찬탈 당하고 앞은 물이요 뒤는 높은 절벽으로 도망갈 수없는 곳에 폐왕을 귀양살이 시킨 지역이 청령포라고한다. 눈으로 직접보니 설명과도 매우 같다는 생각이 든다.역사는 아이러니컬하다. 566 여년 전엔 피로 물들었고 젊은 왕이 눈물을 흘렀을 곳, 이것도 잘못된 역사이지만 오늘날에는 역사와 관광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다니 참 서글퍼진다. 현 세대의 79년 12월 사태와도 다를바가 없지않나 싶다. 여기서 몇달을 살지 못하고 또 사약을 받고 不歸의 魂이 되어 구천을 떠돌고 있지 않을까? 만들어진 어각 주변엔 많은 소나무가 자라고 있지만 신기하게도 대부분이 어각쪽으로 기울어져 있다. 특히 한그루는 완전이 땅에 붙을 정도로 누워서 왕을 처다보고 있는듯하여 사람도 하지 못하는것을 나무가 어린왕을 섬긴다는게 신기할 뿐이다. 1시간 여를 돌아보면서 피비린내난 계유정란(하단)의 시기를 생각해보았다. 건너편엔 사약을 주고 떠난 금부도사 "왕방연"이 강을 건너면서 회한의 시도 남겼다는 말에 가슴이 먹먹해저온다.



○. 선돌-선돌은 영월 방절리 서강가의 절벽에 위치하며 마치 큰 칼로 절벽을 쪼갠 듯한 형상을 이룬 곳으로 높이 약 70m 정도의 입석으로 신선암(神仙岩)이라고도 불리며, 푸른 강물과 층암절벽이 어우러져 아름다운 경관을 보여주는 곳이다.단종이 영월 청령포(명승 제50)로 가는 길에 선돌이 보이는 곳에서 잠시 쉬어 가며, 우뚝 서 있는 것이 마치 신선처럼 보였다고 하여 선돌이 되었다고 하는 전설 등이 담겨있는 명승지이다.






○. 청령포-영월 청령포(寧越 淸冷浦)는 조선 단종의 유배지이다. 단종은 세조 찬위 후 세조 측근들의 탄핵으로 이곳에 유배되었다가 암살되었다. 20081226일 대한민국의 명승 제50호로 지정되었다. 영월 청령포는 어린 나이에 세조에게 왕위를 빼앗긴 단종의 유배지로 서쪽은 육육봉의 험준한 암벽이 솟아 있고 삼면이 강으로 둘러싸여 섬과 같이 형성된 곳으로 한양을 바라보며 시름에 잠겼다고 전하는 노산대, 망향탑 돌무더기 등 슬픈 역사가 남아 있는 유서 깊은 곳이다. 천연기념물인 관음송을 비롯하여 단종의 어가 주변에 조성된 크고 오래된 소나무림이 270° 돌아흐르는 서강과 어우러져 자연 경관이 뛰어난 명승지이다.

원래는 영월군에서 관리하였으나 2009년 명승지로 지정되면서 문화재청으로 이관되어서 문화재청 장릉관리소에서 겸임 관리를 하고있다. 청령포는 주변에 강이 흐르고 있어서 청령포 유람선을 타고 갈 수 있으며 단종이 머물렀던 어소(御所)와 금표비, 와송(臥松)과 망향탑 등이 있다. 단종의 어소는 단종이 생전이 머물렀던 곳으로 이 곳에서 글을 읽거나 휴식을 취하였으며 밤에 몰래 찾아온 엄흥도와 대화를 나누었던 공간이기도 하다. 엄흥도는 매일 밤이 되면 청령포 강을 건너서 어소에 자주 들리면서 단종이 암살되어서 영면할 때까지 그의 말동무가 되어서 외로움을 달래주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단종이 영면하게 되었을 때는 최후까지 그의 시신을 영월읍으로 이동하여 안장하였고 이것이 후의 장릉으로 불리게 된다. 유일하게 청령포를 오갔던 사람이자 단종의 말동무 역할을 하였으며 단종의 어소에 무단으로 출입하면 삼족을 멸한다는 어명에도 불구하고 단종을 생각하며 매일 밤이면 감시중인 군사들의 눈을 피해서 청령포 강을 건너서 어소에 있는 단종에게로 찾아와서 말동무가 되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단종은 유배 초기에는 밤이 되면 사람이 없는 외로운 분위기 때문에 슬픔에 잠기게 되었던 편이었으나 엄흥도가 매일 밤 몰래 어소로 들리면서 그나마 위안을 찾은 것으로 알려졌다.


 # 단종어소비-단묘재본부시유지(端廟在本府時遺址)단종이 살으셨던 어소를 표시한 시유지비(時遺址碑)의 내용으로 1457년 6월 22일 조선왕조 6대 임금인 단종대왕께서 왕위를 찬탈 당하고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降封)유배되어 계신곳으로 단종대왕의 거처인 어소(御所)가 있었으나  소실되고 명조 39년 1763년에 이비를 세워 위치를 전하고 있다.시유지비의 후면에 이곳 지명을 청령포(淸玲浦)로 음각되어 있다.

# 강 건너편에서 본 청령포


# 절개를 지키고 있는 한 그루의 소나무-신기하게도 어각쪽으로 완전히 누워 있는 형태로 왕을 모시고 있는 듯하다.(위: 어가 안쪽, 아래:어가 바깥 뿌리 부근)




# 관음송-관음송은 영월의 청령포 안에서 자라고 있으며 나이는 600년 정도로 추정된다. 높이 30m, 가슴높이 둘레 5.19m의 크기로 1.6m되는 높이에서 줄기가 두 갈래로 갈라져 하나는 위로 하나는 서쪽으로 약간 기울어져 자라고 있다.  청령포는 세조 2년(1456)에 왕위를 빼앗긴 단종이 유배되었던 곳으로 단종은 유배생활을 하면서 둘로 갈라진 이 나무의 줄기에 걸터앉아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관음송(觀音松)이라는 이름은 단종의 비참한 모습을 지켜보았다고 해서 ‘볼 관(觀)’자를, 단종의 슬픈 말소리를 들었다하여 ‘소리 음(音)’자를 따서 붙인 것이라고 한다. 나라에 큰 일이 있을 때마다 나무의 껍질이 검은색으로 변하여 나라의 변고를 알려 주었다하여 마을 사람들은 이 나무를 귀하게 여기고 있다. 

이 나무는 단종과 관련된 전설을 가지고 있는 등 역사적·학술적 자료로서의 보존가치가 인정되어 천연기념물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망향대-망향탑은 청령포 뒷산 육육봉과 노산대 사이 서강이 내려다보이는 층암절벽 위에 위치해 있다. 단종대왕이 유배생활을 할 때 자신의 앞날을 예측할 수 없는 근심속에서도 한양에 두고 온 왕비 송씨를 생각하며 여기저기 흘어져 있는 막돌을 주워 쌓아 올렸다는 탑으로, 단종이 남긴 유일한 유적이다.

#노산대-어린 임금 부부는 2년 남짓 신혼 생활을 하다 단종 께서 영월 머나먼 벽지로 귀양가면서 강제 이별을 해야 했다. 단종은 노산대에 돌을 쌓고 왕비를 그렸으며, 정순왕후(1440~1521)는 정업원터 국망봉에 올라 영월땅을 바라 보며 팔십 평생을 그리며, 외로움을 달래야 했다는 애뜻한 사연이 깃든 노산대로 단종이 노산군으로 강봉되어 청령포에 계시는동안 이곳에 올라 시름에 잠긴곳이라고 한다.


# 금표비-금표비(禁標碑)는 단종이 유배되어 머물던 이곳을 일반 백성들의 출입과 행동을 제한하기 위하여 영조 2(1726, 단종 死後 269년 뒤)에 세운 비석이다.내용은 "東西三百尺 南北四百九十尺 此後泥生亦在當禁崇禎 九十九年丙午十日 " 동서로는 삼백척 남북으로 사백구십척 내에서는 이 후는 더럽히거나 살거나 또한 머무러는 것을 금한다. 영조2(숭정은 명나라 연호) 병오 10일에" 라고 이렇게 해석해 본다면 단종 유배시에 세운 금표비라고 한것을 "단종 유배지임을 알리는 금표비를 영조2년에 세월을것으로 추정된다.


# 배일치,주천쉼터,물미 어음정,솔치고개

#단종어가 낙성고유축문-유세자 경진년2월~~~~자감고유 경고근고...

# 왕방연 시조비-1457년 금부도사 왕방연이 단종에게 사약을 내리고 한양으로 돌아가는 길에비통한 심정을 가눌 길 없어 청령포를 바라보며 시 한 수를 읊었다.


시조) 천만리 머나먼 길에  고운님 여의옵고 내 마음 둘 데 없어

      냇가에 앉았으니 저 물도 내 안 같도다 울어 밤새 예놋다.

       千里遠遠道 美人離別秋  此心無所着  下馬臨川流 川流亦如我 嗚咽去不休



# 청령포 전경

○. 영월역- 태백역 : 오랫만에 우등기차를 타고 옛 추억을 담아 본다.

# 영월역


4. 태백역

 0.함백산(태백산)정암사- 태백산 정암사는 신라 선덕여왕(善德女王)때 고승 자장율사가 당나라 산서성에 있는 청량산 운제사에서 문수보살을 친견하고 석가세존(釋迦世尊)의 정골사리(頂骨舍利), 치아(齒牙), 불가사(佛迦裟), 패엽경(貝葉經) 등을 전수하여 귀국, 동왕 14년에 금탑,은탑, 수마노탑을 쌓고 그 중 수마노탑에 부처님의 진신사리와 유물을 봉안 후 건립하였다고 한다. 사찰 내에서는 도 지정문화재 자료 32호인 적멸보궁을 비롯하여, 범종각, 육화정사,요사채, 삼성각, 자장각 등이 있으며 국가지정 문화재 보물 제410호인 수마노탑, 천연기념물 제73호 열목어 시식지 등의 문화재가 소장되어 있는 고찰이다.
* 5대 적멸보궁 - 오대산 상원사, 양산 통도사, 영월 법흥사, 설악산봉정암, 정선 정암사



# 수마노탑 (보물 제410호)-정암사의 가장 높은 곳, 적멸보궁 뒤쪽으로 급경사를 이룬 산비탈에 축대를 쌓아 만든 대지 위에 서 있다. 자장율사가 당나라에서 돌아올 때, 가지고 온 마노석으로 만든 탑이라 하여 마노탑이라고 한다. 전체 높이가 9m에 이르는 7층 모전석탑으로 탑 전체가 길이 30~40cm, 두께 5~7cm 크기의 회색 마노석으로 정교하게 쌓아져 언뜻 보면 벽돌을 쌓아 올린 듯하다.

주)계유정난(癸酉靖難 1453.10.10.)

1453(단종 1) 수양대군이 단종의 보좌 세력이자 원로대신인 황보 인·김종서 등 수십 인을 살해, 제거하고 정권을 잡은 사건으로 14525월 문종이 재위 2년 만에 죽자 단종이 13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였다. 어린 임금이 즉위하면 가장 서열이 높은 대비가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하는 것이 일반적인 관례였다. 그러나 당시 여건은 수렴청정을 할 대왕대비가 없었다. 단종의 모후인 현덕왕후(顯德王后) 권씨(權氏)가 단종을 낳은 다음 날에 산욕열(産褥熱)로 죽었지만, 1441(세종 23)에 문종은 다시 세자빈을 맞지 않았다. 후궁으로 귀인 홍씨(洪氏양씨(楊氏)만을 두었던 것이다. 사실 세종의 후궁 혜빈 양씨(惠嬪楊氏)가 있기는 했으나, 정치적 발언권이 없었다. 후궁들은 모두 비슷한 위치에서 다만 내사(內事)를 돕는 일에만 관여할 뿐이었다. 때문에 모든 정치적 권력은 문종의 유명을 받은 이른바 고명대신(顧命大臣) 황보 인(皇甫仁김종서(金宗瑞) 등이 잡고 있었다. 세종과 소헌왕후(昭憲王后) 사이에 출생한 적자(嫡子)는 문종 외에도 수양(首陽안평(安平임영(臨瀛광평(廣平금성(錦城평원(平原영응(永膺)의 일곱 대군이 있었다. 그 무렵 왕권은 약하고 신권은 강한 형세였다. 때문에 능력있는 여러 대군은 왕권에 큰 위협이 되었다. 그 중에서도 둘째인 수양대군과 셋째인 안평대군은 서로 세력 경쟁을 벌이고 있었다. 그런데 두 사람은 성격이 아주 달랐다. 수양대군은 정치적 야심을 가지고 주위에 문무에 뛰어난 문객을 많이 모았다. 반면에, 안평대군은 정치적인 관심보다는 문학·예술을 좋아해 이 방면의 동호인을 끌어들렸다. 이에 수양대군은 처음부터 김종서 등이 안평대군과 정치적으로 연결하는 것을 경계하였다.단종 초 고명대신의 변화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단종이 즉위할 때의 진용은 영의정에 황보인, 좌의정에 남지(南旨), 우의정에 김종서였다. 이후 남지는 1452(단종 즉위년) 10월 신병으로 사임하고 그 후임으로 같은 해 12월 김종서를 좌의정, 정분(鄭苯)을 우의정으로 삼았다.

황보 인은 성격이 유약하고 남지는 오래 전부터 앓아온 신병으로 정권에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였다. 때문에 실권은 자연 김종서가 장악하게 되었다. 정분이 우의정이 된 다음에도 계속해서 모든 권력은 김종서에게 기울었다. 단종실록은 이들 대신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 안평대군 등 종친뿐 아니라 혜빈 양씨, 환관 등과 모의해 궁중에까지 세력을 부식하는 한편, 황표정사(黃標政事)라 불릴 정도로 자제를 포함, 많은 당여(黨與)를 요직에 배열해 붕당을 조성했으며 끝내는 종실을 뒤엎고 대군에게 위해를 가하려고 음모를 꾸몄다고 되어 있다.그러나 단종실록이 세조 때 어용사관에 의해 편찬된 것임을 감안하면, 믿기 어려운 점이 많다. , 수양대군은 단종을 몰아내고 세조로 즉위한 다음, 경국대전편찬 과정에서 제2의 창업지주(創業之主) 혹은 조종지주(祖宗之主)임을 내세웠다. 그는 계유정난이 없었다면, 황보 인·김종서 등이 반드시 안평대군과 모의해 종사를 결단내었을 것이라고 언명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은 수성지군(守成之君)이 아니라 창업주라는 점을 강조하였다. 경국대전의 체재는 물론, 많은 신법을 제정한 것을 보아도 그의 야망이 어디에 있었던가를 엿볼 수 있을 것 같다.그러나 황보 인·김종서 등은 고명대신으로서 어린 단종을 끝까지 충성을 다해 보필하려고 했을 뿐, 야심을 품고 붕당을 조성하려 한 것 같지는 않다. 다만, 이들 대신의 합의체인 의정부가 국왕을 보필하고 정사를 협의하는 최고 정무기관으로서의 본래 임무를 넘어섰던 것은 사실이다. 어떤 사관(史官)의 말을 인용하면 왕은 손 하나 움직일 수 없는 괴뢰적인 존재로 전락하고 백관은 의정부가 있는 것은 알았으나, 군주가 있는 것은 알지 못한 지가 오래 되었다.”고 할 정도로 왕권이 미약했던 것은 사실이다.유교적 비전제정치를 내세워 재상중심 체제를 주장하던 정인지(鄭麟趾최항(崔恒신숙주(申叔舟성삼문(成三問하위지(河緯地) 등 집현전 출신의 유신도 황보 인·김종서의 지나친 권력 증대에는 비판적이었다. 뒷 날 수양대군이 황보 인·김종서 등을 제거할 때, 많은 집현전 출신 관료가 수양대군에 동조하거나 중립적인 태도를 취한 것도 이 때문이다. 수양대군도 이 점을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이들이 세력을 더 굳히기 전에 제거할 계획을 추진했던 것이다.그런데 만일 수양대군의 생각처럼 황보 인·김종서 등이 대군에게 위해를 가하려고 했다면, 수양대군이 고명사은사(誥命謝恩使)로 명나라에 가는 기회를 이용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당시 이 기회를 이용할 것이라고 생각한 문객 권람(權擥)은 수양이 사신으로 가는 것을 간곡히 만류하였다. 그러나 수양대군은 웃으며 황보 인·김종서는 호걸이 아니므로 움직이지 못할 것이라고 단언하였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볼 때, 고명대신들은 수양대군의 행동을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수양대군이 거사를 계획한 시기는 단종 즉위 후 2개월이 지난 1452(단종 즉위) 7월경으로 예상된다. 이때 권람이 방문하자, 수양대군은 정계의 움직임에 대해 진심을 털어놓았다. 또한, 이때부터 수양대군은 대권에 야심을 품고서 권람·홍윤성(洪允成한명회(韓明澮) 등을 심복으로 만들었다.수양대군의 거사 계획은 그가 14534월명나라에서 돌아오면서 급진전되었다. 신숙주를 막하에 끌어들이는 한편, 홍달손(洪達孫양정(楊汀) 등의 심복 무사를 양성해 거사 준비를 착착 진행하였다. 같은 해 1010일 밤, 마침내 유숙(柳淑양정·어을운(於乙云) 등을 데리고 김종서의 집으로 찾아가 간계를 써서 철퇴로 쓰러뜨렸다. 그리고 황보 인·조극관(趙克寬이양(李穰) 등 여러 대신을 왕명으로 밀소(密召)하여 궁문에서 퇴살(推殺)하였다. 안평대군은 강화도에 안치했다가 사사(賜死)하였다. 정분·조수량(趙遂良안완경(安完慶) 등은 귀양 보냈다가 곧 교살하였다. 이와 같이, 김종서 등에게 모반죄를 씌워 무참하게 죽인 것은 수양대군 일파가 그들을 제거하기 위해 조작한 명분에 지나지 않았다.한편, 함길도 절도사로 있던 이징옥(李澄玉)도 김종서의 일당이라고 하여 파면하고, 그 후임에 박호문(朴好門)을 임명하였다. 이에 이징옥이 분개하여 박호문을 죽인 다음, 휘하 군사를 이끌고 종성을 근거지로 하여 저항하였다. 그는 대금황제라 칭하면서 기세를 올리기도 했으나, 종성부사 정종(鄭種)의 반간계(反間計)에 걸려 잡혀 죽었다.무단적인 방법으로 정적을 숙청한 수양대군은 스스로 영의정부사·영집현전사·영경연사·영춘추관사·영서운관사·겸판이병조·내외병마도통사 등 여러 중직을 겸하는 등 정권과 병권을 독차지하였다. 그리고 거사에 직접·간접으로 공을 세운 정인지·권람·한명회·양정 등 43(수양대군 포함)을 정난공신으로 책봉하였다. 이로써, 수양대군은 2년 뒤에 강제로 단종의 선위(禪位)를 받아 세조로 즉위할 수 있는 기반을 다졌던 것이다.

주) 단종대왕 왕비 정순황후 송씨

정순왕후 송씨(定順王后 宋氏, 1440~ 152177(음력 64)) 는 조선 단종(端宗)의 정비이다. 시호는 단량제경정순왕후(端良齊敬定順王后)이다. 여량부원군 송현수(礪良府院君 宋玹壽)의 딸로, 본관은 여산이다김종서의 사후 1454년에 간택령에 따라 왕비교서를 받고, 즉위하였다. 남편 단종이 강등되면서 군부인(君夫人)으로 격하되었다가, 관비가 되었다. 한때 신숙주가 그를 자신의 종으로 달라고 했다가 물의를 빚기도 했다. 이후 세조는 그를 노비이지만 아무도 범하지 못하도록 정업원(淨業院)으로 보냈다. 이후 남편 노산군의 명복을 빌다가 사망하였으며, 그녀의 능의 소나무는 동쪽 방향으로 굽는다는 전설이 있어 한때 화제가 되기도 했다.

 중종 때부터 복위가 거론되다가 송시열, 김수항의 거듭된 건의로 1698(숙종 24)에 단종과 함께 복위되어 왕후로 추봉되었다. 전라북도 출신이다세종의 왕자 영응대군의 부인 대방군부인 송씨는 그녀의 고모이자 시숙모이다본관은 여산으로 전라북도 정읍군 태인면(현 칠보면[1])에서 태어났으며, 판돈녕부사 등을 역임하였고 영돈녕부사로 추증된 여량부원군(礪良府院君) 송현수(宋玹壽)의 딸이다. 어려서 아버지 송현수를 따라 한성부로 이사하였다. 성품이 공손하고 검소해 가히 종묘를 영구히 보존할 수 있는 인물이라 하여 간택되었는데, 그 배경에는 고모가 영응대군의 부인이라는 점이 크게 작용하였다. 1454219(음력 122)에 열 다섯의 나이로 한살 연하였던 단종과 혼인하여 왕비에 책봉되었다. 1455, 단종이 수양대군(세조)에게 왕위를 일임하고 상왕이 되자 왕대비가 되어 의덕(懿德)의 존호를 받았다. 그러나 1457, 성삼문, 박팽년 등 사육신이 추진하던 단종 복위 운동이 발각되자 상왕 단종은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되어 영월로 유배되었고, 의덕왕대비는 군부인이 되어 궁에서 쫓겨났다. 친정마저 풍비박산 난 상태였던 그녀는 동대문 밖 숭인동 청룡사 근처에 초암을 짓고 시녀들과 함께 살았다. 송씨는 시녀들이 동냥해온 것으로 끼니를 잇고 염색업을 하며 어렵게 살았는데, 이를 안 세조가 집과 식량 등을 내렸으나 끝내 받지 않았다. 한편, 그녀를 가엾게 여긴 동네 아녀자들이 조정의 눈을 피해 그녀의 집으로 먹을 것을 건네주고자 시장을 조직하는 일도 있었다. 청계천에 있는 영도교(永渡橋)는 귀양 가는 단종과 정순왕후가 마지막으로 헤어진 곳으로 전해지는데, 결국 두 사람은 이승에서는 만날 수 없었다. 단종이 끝내 유배지인 영월에서 생을 마감했기 때문이다. 부군의 죽음을 전해 들은 송씨는 매일 아침 저녁으로 큰 바위를 올라 영월을 향해 통곡을 하며 단종의 명복을 빌었다. 이후 세조는 그녀에 대해 '신분은 노비이지만 노비로서 사역할 수 없게 하라'는 명을 내려 아무도 범하지 못하도록 정업원(淨業院)으로 보냈다. 정업원은 부군을 잃은 후궁들이 출궁하여 여생을 보냈던 곳이다. 후일, 영조가 친히 동망봉(東望峰)이라는 글씨를 써서 바위에 새기게 하였다. 일제 강점기 때 동망봉 근처 지역이 채석장으로 쓰였으며 그 바위는 깨어져나가버렸다. 2011년 현재, 서울 종로구 낙산 근처인 이곳 동망봉 남쪽에는, 동망정이라는 이름의 정자가 들어서 있다.

한편 조선 말의 문장가이자 역사가인 김택영은 자신이 지은 야사에서 "신숙주가 그녀를 자신의 종으로 달라고 했다."라고 주장했는데, 이에 대해서는 반론이 많아 사실 여부는 알 수 없다. 그녀는 세조의 증손이자 단종의 종손뻘인 중종(中宗) 16년인 152177(음력 64), 82세의 나이로 한많은 생을 마감했다. 중종의 재위 초기, 사림파인 조광조 등에 의해 복위가 주장됐으나 중종은 이를 거부했다. 그 뒤 현종 때부터 송시열과 김수항 등은 단종과 그녀의 복위를 거듭 건의했다. 그들은 세조의 단종 살해는 측근들의 오도에 휘둘린 것이며 본심은 단종 살해에 있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그 건의로 1698127(숙종 24년 음력 116), 단종과 그녀는 복위되어 시호를 받고 종묘 영녕전에 신위가 모셔졌다. 그녀의 별세 때에는 대군부인의 격에 따라 치러진 장례로 경기도 양주군(楊州) 군장리(群場里, 현재의 남양주시 진건읍 사릉리)에 매장됐다. 단종과 그녀의 복위로 종묘에 배향되면서 능호를 사릉(思陵)이라 했는데 이는 억울하게 살해된 남편을 사모(思慕)한다는 뜻에서 지은 것이다. 그녀의 묘소 뒤편에 심은 나무들이 단종의 능인 장릉쪽을 향해 고개 숙여 자란다는 전설이 한 때 전해졌다. 무속의 신의 한 명으로 숭배됐는데, 무속에서는 그녀를 송씨부인 신이라 부른다.

주)장릉 (莊陵) 강원도 영월군에 있는 조선 6대 임금인 단종의 릉으로 사적 제196호이다.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영흥4리에 있으며, 단종이 세조의 왕위 찬탈로 1457년 노산군으로 강등되어 영월에 유배되었다가 상왕 복위계획이 탄로되어 죽음을 당하자 영월호장 엄흥도가 비밀리에 장례를 치렀다. 선조 때 김성일(金誠一정철 등의 장계로 묘역을 수축하고 표석을 세웠다. 1610(광해군 2) 노릉암이라 했으며 1668(현종 9)에 수호하는 참봉 2명을 두었다. 1681(숙종 7) 대군으로 추봉되었으며 1698년 복위되어 묘호를 단종, 능호를 장릉이라 했다. 상설은 추봉된 정릉의 예에 따라 난간과 무석을 설하지 않았고, 양식은 간단하게 작은 후릉 석물의 것을 따랐다. 따라서 장릉의 석물은 숙종·영조 연간에 만들어진 왜소하면서도 간단한 능석물의 선구를 이루는 것이며, 명릉(숙종의 능) 이래 만들어지는 4각옥형의 장명등은 장릉에서 그 첫선을 보이게 되었다. 세월이 지나면 정순황후와 합장하거나 같이 모시는것도 생각해볼 여지를 남긴다.

국립공원공단이 이달 초 구천계곡 인근 조선시대 채석장에서 발견한 '금표석' /사진제공=북한산국립공원사무소 © 뉴스1

(최근 북한산에서 발견된 사릉 정순왕후 잃어 버렸다는 금표석을 찾았다.(2019.12.17.))

주)사릉(思陵)-사릉은 단종대왕의 왕비인 정순황후의 릉으로 경기 남양주시 진건읍 사릉로180번지에 소재하고 있으며, 정순왕후는 단종 2년에 왕비가 되었으나 이듬해 단종이 세조에게 왕위를 물려주자 왕대비가 되었고 세조 3년에 단종이 폐위되자 군부인으로 강등되어 정업원 (왕실의 여인들이 출가하여 수도하던 절)에서 생활하였다.매일 정업원 뒤 봉우리(동망봉:종로구 숭인동 소재)에 올라 단종이 머물던 영월을 바라보며 슬퍼하였다 한다. 중종 16년 82세로 세상을 떠나자 단종의 누나 경혜공주 의 시댁인 해주 정씨 집안에서 묘를 조성하여 제사를 지냈다. 숙종 24년 단종이 왕으로 복위되면서 정순왕후도 복위되어 종묘에 배향되었고, 단종을 평생 그리워하며 살았다하여 능의 이름이 思陵으로 불리게 되었다.  

주). 송현수(宋玹壽) 조선조 제6대 단종(1441-1457)의 장인(국구國舅) 여량부원군 송현수(? -1457. 10. 21)는 고려때 추밀원부사 여산송씨 유익(惟翊)을 시조로 하여 그의 11세손이다.선친 정3품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 송복원(宋復元)의 3형제 중 2째 아들로 태어나 여흥민씨 의암공파 삼척부사 효원(孝源)의 딸과 혼인하여 그의 사이에서 난 딸 정순왕후(定順王后 1440-1521, 사적 209호 사릉, 남양주 진건면 사릉리)가 「단종실록」단종2년(1454) 1월 22일 왕비로 책봉되자 같은해 1월 14일 풍저창부사(豊儲倉副使) 여량군(礪良君)에 봉군되고 2개월 후 4월 4일 종2품 동지돈녕부사로 특진하였다가 10월 19일 정2품 지돈녕부사로 오르고 다시 12월 2일 종1품 판돈녕부사로 고속 승진하였다. 「세조실록」세조3년(1457) 6월 21일 백성 김정수(金正水)가 반역을 도모한다고 고변하여 의금부에 투옥되고 다음날 파직시키고 같은해 8월 16일 곤장 100대를 때려 그의 처와 아들 송거(宋琚) 등 자녀와 함께 먼 지방의 관노비로 내쳤다가 만 4개월이 되는 10월 21일 교형(絞刑)에 처하였다.
「숙종실록」숙종24년(1698) 2월 28일 벼슬이 복관되고 이듬해 7월 15일 과천현 동면 우면리(현 서초구 우면동 479-6, 686㎡)에 부인 민씨의 묘가 있는데 허위(虛位)를 진설하게 하고 제사 지내주는 이를 거행하도록 명하였으며 「정조실록」 정조15년(1791) 2월 25일 시호를 정민(貞愍)이라고 내렸다. 여흥민씨 묘소 오른쪽 앞에는 ‘여흥부부인 민씨지묘(驪興府夫人 閔氏之墓)’라고 쓴 묘갈이 있고 바로 옆에 묘갈보다 작은 회색 비갈에는 ‘여주민씨지묘’라고 희미하게 쓰여 있는데 글자를 간신히 알아볼 수 있다고 예조참판 오도일(吳道一)이 현지 답사 후 보고한 비갈로 여겨진다(「숙종실록」 숙종 25년 7월 15일 조).묘 앞에 설치한 상돌 왼쪽에는 ‘대광보국 숭록대부 증 영돈녕 행판돈녕 여량부원군 시 정민 죽헌 여산송공 휘 현수 지 단(大匡輔國 崇祿大夫 贈 領敦寧 行判敦寧 礪良府院君 諡 貞愍 竹軒 礪山宋公 諱 玹壽 之 壇)’이라고 위에서 아래로 해서로 세줄로 쓴 표석을 세웠는데 음기를 볼 수 없어서 세운 년대를 확인하지 못하였다. 그밖에도 경혜공주는 그의 남편 정종(鄭悰)과 함께 광주로 정배되었다가 남편은 참형되고 그 또한 살해되었다. 그가 죽기 전에 배소에서 아들을 낳았는데 그 아들이 후일 찬성(贊成)의 지위에 올랐던 정미수이다. 이렇게 죽은 사람은 사적에 뚜렷이 나타나 있는 것만 하여도 그 수가 백을 넘으며, 그 밖에 살해된 이들은 부지기수이다. 이른바 5외척이라 하여 단종의 장인인 여양부원군 송현수, 단종의 외숙 예조판서 권자신, 단종의 매부인 영양위 정종, 태종의 사위되는 일성위 정효전, 딸이 문종의 후궁으로 들어갔던 돈녕판관 권완 등이 모두 죽임을 당했으며 민신(閔伸)·조극관·김문기 등 세 사람은 문종의 고명을 받은 재상으로 역률에 몰려 죽으니, 이들을 세칭 삼재상(三宰相)이라 한다. 그리고 사육신과 같이 절사한 이들로 유응부·성승·박쟁이 있으니 이들을 일러서 삼운검(三雲劍)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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