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양(위양지,영남루,월연정)나들이

2021. 8. 19. 17:40산따라 길따라

如 犀 角 獨 步 行

>>>밀양(위양지,영남루,월연정)나들이<<<

-위양지수양버들,영남루,월연정-

0. 일시: 2021. 8. 19.(목)   종일 * 백년지기

0. 간곳: 위양지수양버들숲,영남루,월연정

수양버들나무 숲으로 유명하다는 밀양 위양지를 찾아간다. 아침에 흐린 날씨가  낮이 되니 해가 따갑게 내리쬔다. 위양지를 돌아보니 수양버들과 소나무 기타 많은 고목들이 연못 둘레를 빽빽하게 감사고 있는듯하다. 경산 연곡지보다 훨씬 나무도 많고 그늘도 좋고 연리지가 압권이다. 그리고 옆에 있는 가산지를 갔지만 둘레길이 시멘트 포장길이라 포기하고 영남루  둘러보러 향한다. 영남루는 밀양강을  끼고 있어 전망이 넘 좋다. 망루에 오르니 넘 시원하기도 하고  삼삼오오 앉아서 더위를 피하고 있는 관람객들이 많이 보인다. 구경후 월연정을 들러 잠시 돌아본다. 태어나서 백송은 처음본다. 소나무 껍질이 흰색과 푸른색으로 섞여있다. 넘 귀한 소나무가 아닌가 생각해본다. 밀양주변은 대부분이 산지이라 정상은 대부분 올랐지 싶은데...이런곳도 있으리라고 생각하지 못했지만 유익한 하루가 아닌가한다.

 

1. 위양지 수양버들숲

0. 위치: 경남 밀양시 부북면 위양리

# 위양지 안내판- 위양지는 논물을 공급하기 위한 농업용수를 저장한 호수로  넓은 들판에 풍부한 수량의 물을 공급하기 위해 넓은 못을 만들었는데 백성들을 위해 만들었다고 하여 위양지라 한다고 하며 위양지의 못둑에 심어진 아주 오래 된 나무들 덕분에 멋진 산책길로 만들어져 있다. 트렌드인 관광지와 산책로가 같이 갖추어져 있다는 점이다. 시원한 그늘밑으로 둑길을 걸으며 호수를 바라보는 정취는 가히 일품이다. 오래된 나무들이 괴목처럼 멋지다. 특히 연못안으 나무가 휘어져 있고 다리를 걸어 섬으로 들어가면 완재정이란 정자를 보면 가히 선경이 따로 없어 보이고 섬에는 여러 나무들이 잘 가꾸어져 꽃이아름답고 수령이 오래된 배롱나무가 있으며 저수지 나뭇가지위엔 자라들이 일광욕도 즐기는 모습이 이채롭다.

# 소나무 연리지

# 맥문동 꽃- 산 중간중간에 보인다.

# 위양지 포토죤

# 수양버들 연리지-이건 한나무에서 가지가 본체에 붙어 삼각형을 이루고 있다.

# 또 다른 나무의 연리지(수종은 모름)

# 수양버들 고목엔 아름다운 버섯도 자라고 있고~

# 고목과 고목사이

# 아름드리 수양버들- 꼭 성주숲의 고목과 비슷한거 같다.

# 고목에서 난이 자라고 있다.

# 완재정-밀양 완재정(密陽 宛在亭)은 경상남도 밀양시 부북면 위양리 296번지에 있는 정자이다. 2016년 10월 13일 경상남도지사가 경상남도의 문화재자료 지정을 위한 행정예고를 거쳐  2017년 3월 30일 경상남도의 문화재자료 제633호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으며  완재정은 안동권씨의 재실로써 1900년에 조성된 정자인데, 위양지에 조성된 섬의 중앙에 정자를 설치하고 배로 출입하도록 한 특별한 구성은 중앙에 정자의 문화가 많이 남아있지 않은 경남지방 및 조선 후기의 조원의 사례로서 대표적인 모범이 될 만한 구성이다. 건축적인 특성도 놓은 가치가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펀글)

 

2. 영남루

밀양 남천강 옆 아동산에 위치한 영남루는 보물 제 147호로 진주의 촉석루, 평양의 부벽루와 함께 우리나라의 3대 누각으로 손꼽힌다. 동서 5간, 남북 4간의 팔작지붕에다 좌우로 2개의 딸린 누각을 거느린 이 거대한 2층 누각은 신라의 5대 명사 중의 하나였던 영남사의 부속건물인 소루였으나, 영남사가 폐사되고 난 이후 고려 공민왕 때 그전부터 있던 누각을 철거하고 규모를 크게 하여 세웠다는 기록이 있으며, 현재의 건물은 1884년에 밀양부사 이인재가 다시 세운 것이다. * 영남루의 건물과 볼거리 * 부속건물로 능파각, 침류각, 사주문, 일주문, 천진궁이 있으며 영남루 누각에는 역사의 흐름을 조명해 볼 수 있는 당대 명필가들의 작품들이 편액으로 즐비하게 남아 있고, 뜰에 깔린 석화 또한 방문객들의 눈길을 끌게 한다. 영남루의 침류각과 본 누각 사이를 달월(月)자형의 계단형 통로로 연결하여 건물의 배치와 구성에 특징을 배가 시켰는데, 웅장한 기풍으로 인해 당당하면서도 회화적인 아름다움의 진수를 보여주고 있다. 또한, 밀양강에 임한 절벽 위에 위치하여 웅장한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어 그 경관이 수려하여, 1931년 당시 조선총독부에서 조선의 16경을 선정할 때 영남루가 그 16경중에 하나로 선정되었다.

 

# 천진궁과 탑사- 역대 왕조의 시조를 모시고 있는 사당.

# 마당에 있는 2그루의 은행나무 사이로~

# 밀양아리랑-날좀보소 날좀보소~

# 밀양 무봉사와 석불- 전국 절을 많이 돌아다녔지만 대웅전에 석불이 모신곳은 내 기억엔 본적이 없지 싶다.

# 여기도 또 연리지가 있는데 3군데가 붙은것 같다.

# 작곡가 박시춘님의 고향집-많은 곡을 쓰신 박시춘님의 아담한 초가와 흉상

 

# 애수의 소야곡 악보- 운다고 옛사랑이~~~~

# 밀양강의 시원스러운 강물을 바라다보고 저멀리 예전에 올랐던 산봉우리도 보인다.

주) 박시춘은 한국의 대중음악 작곡가. 한국 가요사의 산증인으로 알려져 있으며, 1982년 대중가요 창작인 최초로 대한민국 문화훈장 보관장을 받았다. 일본 유학시절 순회공연단을 따라다니면서 트럼펫과 바이올린, 기타 등 악기 연주를 익혔다. 우라타 연예단 시절 <몬테카를로의 갓난이> 등을 발표하면서 작곡가로 데뷔했고 가수 남인수가 부른 <애수의 소야곡>으로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이후 3,000여 곡이 넘는 대중가요를 작곡하고 수많은 히트곡을 발표했다. 일제강점기 말에는 일본군국주의에 부응하는 음악활동으로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되었다. 본명은 순동(順童). 부유한 집안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으나, 9세 때 세상을 떠난 아버지의 병을 치료하느라 가산이 소진되어 곤궁한 생활을 했다. 아버지의 영향으로 어릴 때부터 다분히 풍류적인 분위기를 즐기면서 자랐으며, 일본 유학시절 중학생의 신분으로 순회공연단을 따라다니면서 트럼펫·바이올린·색소폰 등 다양한 악기들의 연주방법을 익혔다. 특히 기타를 치는 솜씨가 뛰어났고 한때는 연예단에서 영사기 돌리는 일을 하기도 했다. 1929년 우라타(浦田) 연예단 시절 〈몬테카를로의 갓난이〉·〈어둠 속에 피는 꽃〉 등의 곡들을 발표하면서 작곡가로 데뷔했다. 1935년경부터 박시춘이라는 예명으로 작곡을 발표했는데, 1938년 가수 남인수가 부른 〈애수의 소야곡〉이 히트하여 명성을 얻기 시작했으며, 이후 1930년대말부터 1960년대까지 40여 년 동안 무려 3,000여 곡이 넘는 대중가요를 작곡, 수많은 히트곡을 내놓아 가요사의 산증인으로 일컬어지기도 했다. 1939년 조선악극단의 일본 공연에 참여할 때는 현경섭·송희선 등과 함께 '아리랑보이즈'라는 남성 보컬팀을 만들어 공연했으며, 일제말과 1950년대 초반에 이르는 시기에는 악극 제작에 참여하기도 했다. 1942년부터 <고성의 달>, <아들의 혈서>, <아세아의 합창>, <결사대의 아내>, <혈서지원> 등 일본 군국주의에 부응하고 조선인의 지원을 고무하는 군국가요를 작곡하고, 1943년부터 1944년까지 전시물자 증산을 위한 산업전사격려위문예능대 등에서 활동하는 등의 친일행위로 <친일인명사전>(2009)에 수록되었다. 해방 후에는 한국방송공사(KBS)의 경음악단을 이끌면서 방송가요와 영화음악도 다수 작곡했다. 1958년에는 영화음악에서 한걸음 나아가 직접 오향영화사를 설립해 영화제작도 했으며 〈육체의 길〉과 같은 히트작을 내기도 했다. 대한 레코드 작가협회 초대회장(1958), 연예협회 초대 이사장(1961), 예술윤리위원회 부회장(1966) 등 대중문화계의 요직을 역임했다.

1965년 이후로는 창작활동을 중단했으며, 1982년에는 대중가요 창작인으로는 최초로 대한민국 문화훈장 보관장을 수여받았다. 애상성 짙은 트롯 가요의 전반적인 분위기 속에서도 그의 작품들에는 비교적 밝고 소박한 곡들이 많다. 대표작으로는 첫 히트곡〈애수의 소야곡〉 외에 〈가거라 38선〉·〈럭키 서울〉·〈비내리는 고모령〉·〈전선야곡〉·〈굳세어라 금순아〉·〈이별의 부산정거장〉 등의 노래를 꼽을 수 있다

3. 월연정

월연정은 조선 중종 15년(1520) 월연 이태 선생이 지은 것으로 원래는 월영사가 있던 곳이다.

이태 선생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성리학에 입각해 개혁정치를 추구한 조광필 파가 죽음을 당하는 기묘사화(1519)가 일어나자 벼슬을 버리고 이곳으로 내려왔다. 월연정의 대청인 쌍경당은 임진왜란으로 불탔으나 영조 33년(1757)에 월암 이지복이 다시 지었다. 그리고 고종 3년(1866)에 이종상과 이종증이 정자 근처에 있는 월연대를 보수하고 재헌을 지었다.

월연정은 앞면 5칸·옆면 2칸으로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으로 되어있다. 쌍경당에는 문을 달아 열면 주위 경관을 볼 수 있게 했으며 방, 아궁이를 설치해 4계절 두루 살 수 있도록 했다. 재헌 또한 앞면 5칸·옆면 2칸의 규모로, 대청·방·대청의 형태로 지었다. 제일 높은 언덕에 있는 월연대는 앞면 3칸·옆면 3칸으로 중앙 1칸만 4면에 미닫이문을 단 방을 만들었다. 경관이 뛰어난 곳에 모여 있는 이 모든 건물들은 주변의 아름다움을 감상하는 정자의 기능을 가지며 각기 다른 형태로 지어져 있어 흥미롭다. 이 건물들 외에 탄금암, 쌍천교 등의 유적과 백송, 오죽 등의 희귀한 나무들이 있다.

 

# 월연정 안내판에서

# 월연대

# 신기로운 백송나무

 

# 월연터널-과거 경부선이 다니던곳을 기차선이 이동하고 지금은 차량들이 지나가는 터널로 탈바꿈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