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타연+을지전망대+제4땅굴 탐방

2016. 6. 19. 09:10산따라 길따라

>>>>>>두타연+을지전망대+제4땅굴<<<<<<

0. 일시: 2016.6.18. (토)

0. 위치: 강원도 양구군 해안면 일대

0. 코스: 두타연(8km),을지전망대,제4땅굴


    산양과 국내 최대 열목어 서식지인 두타연 계곡,, 두타연은 휴전선에서 발원한 수입천 지류의 민간인 출입통제선 북방에 위치하고 있으며 금강산으로 가는 최소의 길목으로 거리가 32km정도 떨어져 있다고 한다. (頭陀속세의 번뇌, 의식주의 대한 애착, 욕망 등을 버리고 오직 청정하게 불도를 닦는 수행. 떠돌면서 온갖 괴로움을 무릅쓰고 불도를 닦는 일을 말함)1천년전의 두타사라는 절이 있었다는 데서 유래가 된 두타연은 휴전후 50여년간은 민간인 출입이 통제된 곳인데  2004년부터 개방하여 지금에 이른다고 하고 방문하여보니 한국전쟁당시 그 많은 전투가 벌어졌던 곳으로 더 유명한 곳이기도 했다. 단장의 고개,피의능선, 펀치볼 전투,도솔산 전투,가칠봉전투,1026전투 등 우리가 이미 기억한 전투가 엄청 많은 곳으로 반면에 또 그 많은 희생을 치른 곳이기도 하였고, 을지전망대에 오르니 북한의 금강산이 구름속으로 잠시 보였다는 반복하고 가칠봉과 마주하고 있는 북한의 여러 산들이 달려가면 1시간내로 갈 수가 있을 만치 지척에 거리를 두고도 처다만 봐야함은 분단의 또 다른 아픔이 아닐까 한다. 마지막의 제4땅굴을 보고 북한의 야욕을 한번 더 실감할 수가 있었기에 나라의 중요성이 강조되는 탐방이자 역사의 교훈을 얻은 그런날이었다.



(두타연)

#1 두타연 이정표-두타연의 대표적인 열목어가 오는 손님을 맞고 있다.

#2 이목정 안내소- 여기서 입산 신고 및 테크 인식표를 받고 비포장 도로를 차량으로 30여분 안으로 들어가면 입구 주차장이 나온다. 주차장에서 트레킹이 시작~


#3 치열했던 백석산 전투 안내판 앞-백석산 전투는 1951년 8월 중순부터 10월 하순까지 중동부 전선의 양구 북방 20km 지점에 있는 백석산(1,142고지)을 중심으로 한 남북으로 각각 6km 지역에서 국군 제7사단과 제8사단(9월 28일 부대교대)이 공방간 전술적 요충인 백석산을 탈취하기 위해 북괴군 제12사단 및 제32사단을 격퇴한 공격전투이다.이 작전의 일환으로 국군 제7사단에 최초로 부여된 공격목표는 554고지였다. 이 고지는 피의 능선 좌측방의 중요고지로서 이를 확보해야만 양구∼문등리를 잇는 29번 도로(현재31번)를 장악할 수 있었다.

국군 제7사단 제8연대는 제1대대와 배속된 전차공격대대로 공격을 개시하여 8월 26일에 이 고지를 탈취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 후 국군 제7사단은 지난 8월 16일 이래 보류하고 있던 883고지에 대한 공격준비를 하고 있을 즈음 미 제10군단장은 국군 제5사단에 가칠봉 일대를 미 제2사단에 단장의 능선을 그리고 국군 제7사단에 883고지를 각각 공격하도록 명령하였다. 9월 16일 제8연대가 743고지를 탈취하고, 다음날에는 사단 좌일선 제5연대가 892고지를 탈취한 데 이어 제3연대는 3일간의 격전 끝에 마침내 목표 883고지를 탈취하였다.

미 제10군단장은 북괴군이 백석산을 확보하고 있는 한 미 제2사단 지역에서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기 어렵다고 판단하여 국군 제7사단으로 하여금 백석산을 동시에 공격하도록 명령하였다.

이렇게 하여 국군 제8사단과의 진지교대를 앞두고 있던 국군 제7사단은 다시 공격준비태세를 갖추어 9월 24일부터 백석산 공격에 나서게 되었다. 또한 좌일선 제8연대는 중간 목표인 894고지를 공격하였으나 북괴군의 완강한 저항으로 말미암아 이를 탈취하지는 못하고, 그 좌측 696고지와 무명고지를 탈취하였다. 국군 제7사단은 25∼26일 양일간에 걸쳐 계속적인 공격을 감행하여, 제8연대가 백석산 정상의 2개 봉우리 중 좌측 봉우리를 탈취하였다가 빼앗기고, 27일에 다시 우측 봉우리를 공격하였으나 끝내 목표를 탈취하지 못하고 말았다. 이리하여 국군 제7사단은 국군 제8사단에게 백석산 공격임무를 인계(9월 28일 12:00부)하고 미 제10군단의 예비가 되어 캔자스선 남쪽으로 이동했다가, 9월 30일부로 육군본부 직할부대로 전환되었다. 국군 제7사단과 임무 교대한 국군 제8사단은 백석산 공격작전을 수행하게 되었다.

국군 제8사단의 주공인 제10연대는 9월 30일 좌우측 능선을 따라 공격을 개시하여 목표의 지근거리까지 진출하였으나 북괴군의 집중 화력으로 저지당하게 되자 더 이상의 진출을 자제하면서 최종적인 돌격준비를 하였다. 10월 1일 유엔 공군의 근접 항공지원 하에 공격을 재개한 제10연대는 목표정상의 좌측 봉우리를 탈취한 데 이어 우측 봉우리마저 탈취함으로써 백석산을 완전히 확보하였다. 이로써 국군 제8사단은 이날로 제3단계 작전을 모두 끝내고 어은산을 목전에 둔 방어진지를 강화하면서 차기작전에 대비하였다.


#4 양구 전적 위령비-잠시 묵념후 당시의 처절했던 전시상황을  생각해본다.

위령비 뒷편이 斷腸의 능선고개라고 한고 앞 쪽이 피(血)의 능선이라고 하는데 내가 여기에 와 있다는 자체만으로 큰 교감이 되는듯하다.당시엔 처절한 싸움으로 풀 한포기도 없었지 싶은데 60여년이 지난 지금에는 많은 나무들로 땅이 잘 보이질 않을 정도로 빽빽하게 우거져 있다.

#4-1 길 가소서: "배고픔으로~~(중략)마디마디 피로 물든 능선~~(중략)새싹 움트고 여명이 밝았습니다.님이시여! 지금의 피 맺힌 원한도 사무친 그리움도 모두 풀 때/이승에서 못다 이룬 민족의 화합 魂界에서 하나되어 밝고 고운 한빛으로 부디 길 가소서. 그리하여 새로운 날/이 땅에 다시 오시어/새 아침의 기쁨 땅 끝까지 누리소서. 고운님이시여 길 가소서!!"(합장)~~~이 시를 전부 읽으니 이자리에 서 있는 나 자신을 넘 초라하게 만든다. 시대를 잘 타고난 운명으로 우린 숨을 쉬고 있지만 선령들의 원혼이 하늘에서 메아리를 치는 듯,,돌격앞으로!!!의 소리가 귓전을 때린다.



#5 조각공원- 당시 전투에 참가한 탱크 포 등이 전시와 7대 전투를 그림으로 설명 

#5 두타연 숲길에서-여기서 근무중인 장병인지 아님 휴가나온 장병인지 면회를 온 부모들이랑 신나는 한때를 보내고 있는 고생하고 있는 장병들이 많이 보인다. 이 장병들을 보고 있노라니 1983년 군생활시절이 많이 떠오르는데 벌써 30여년의 세월이 지났다.

#6 이름모를 전투화 1짝- 외롭게 한짝만 덩그러니 놓여 있는데 작가의 표현을 무슨 뜻으로 한짝만 만들었을까를 곰곰히 생각해본다. 아마도 다른 한짝은 어느 산 어느 계곡 중간에서 주인을 기다리고 흙에 묻혀 섞고 있을것인데 생각만 해도 마음이 아프다. 하루 빨리 두짝이 만나도록 해야만 하는게 지금 우리가 할 일인것같다.

#7 두타연 한반도 지도-물결이 한반도 지도인듯한데 이 그림엔 잡히질 않았다.다리 바로 아래에 있어서 그런지 흐르는 물만 보일뿐이다.

#8 평화누리공원 -길을 가다 만들어진 아치형 쉼터로 날씨는 엄청 덥지만 파고라 아래에서는 그래도 시원한 감이 든다. 

#9 금강산 가는길- 손가락으로 가르키는 곳으로 쭈욱가면 금강산이 나온다고 적혀 있다.

여기서 직진으로 30여km라고 하지만 더 이상 갈 수가 없음이 무척이나 안타깝다. 하루 빨리

금강산을 걸어서 갈 날을 기약해 본다. 금강산은 백두대간을 지나는 능선인데 사못 아쉽다.

또 뒤로 가면 을지 전망대로 가는 비득안내소가 나오는데 여기서 6km정도 거리다. 을지 전망대 가면서 비득안내소 앞 월명저수지도 본듯하다.


#10 진입 금지 차단벽 -이곳으로 쭈욱~~gogo Ssing  Mt. kumgang!!!



#11 하야교 앞 아치형 다리- 아래쪽의 물가의 경치가 엄청 좋다.아무리 좋은 곳이라고 "지뢰"라는 팻말로 들어갈 수가 없으니 물을 깨끗 그 자체다.

#12 하야교 3거리

#12-1 하야교 3거리에 세워진 두타산 이정표- 금강산이 31km라고 적혀 있다. 

#13 금강산 가는길 되돌아서 징검다리를 건너면서 두타교 출렁다리와 두타연 앞쪽으로 진행하여 주차장으로 옮기는 길-날이 더워서 인지 많은 사람들이 발을 물에다 놓고 나올 생각을 않는것 같다.


#14 두타교 출렁다리 위

#14 두타연 야생화 포토존 식물도감도 앞

#15 두타연- 매스컴에 자주 등장하는 비경,,그 옛날 1박2일에서 나온곳



(을지전망대+제4땅굴)

#1 양구 통일관 앞 - 튼튼하게 생긴 사람이 예의도 깍듯하다.


#2 도솔산,펀치볼 전쟁 기념비 앞-도솔산 전투는 1951년 6월 4일부터 19일까지이다. 이 전투지구는 38선 이북의 강원도 양구와 인제 사이에 있는 태백산맥의 험준한 산악지역이며, 특히 도솔산을 중심으로 한 이 일대는 높이 1,000m를 오르내리는 높은 봉우리가 연이어 있으며, 기암절벽과 험하고 깊은 골짜기로 형성되어 있다.그리고 좌우로 양구와 인제에서 북상하는 도로를 끼고 있으므로 만약 이 지역을 확보하지 못하면 좌우편에서 북상중인 한국군의 전선부대가 한 걸음도 진격하지 못하게 되므로 전술적으로 매우 중요한 지역이었다.그러므로 북한 공산군은 이러한 전술적인 이점과 천연적인 지세를 최대한으로 이용하여 견고한 진지를 구축하고 있었다.

이 도솔산지구 전투는 처음에 미 해병대 제1사단의 제5연대가 맡았으나 많은 손실만 입고 탈환하지 못하자, 1951년 6월 3일 한국 해병대 제1연대(연대장 대령 김대식)가 공격 임무를 인수하여 6월 4일 첫 공격을 시작하였다.북한 공산군은 약 4,200명의 병력으로 무수히 많은 지뢰를 매설하고 수류탄과 자동화기를 퍼부으며 완강히 저항했으므로 한국 해병대는 한 걸음도 진격할 수 없었다.그러나 한국 해병대는 치열한 육박전과 강력한 야간 기습공격을 감행하여 24개 고지를 하나하나 점령하면서 전진하였다. 하나의 고지를 점령하면 적의 공격을 받아 다시 빼앗기고, 또 빼앗는 가운데 불가능하다고 판단되었던 24개 목표 고지를 6월 19일 완전 탈환하는 데 성공하였다.이 전투에서 2,263명의 북한 공산군을 사살하고 44명을 생포했으며, 개인 및 공용화기 등 198점을 빼앗는 큰 전과를 올린 반면, 아군 또한 700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산악전 사상 유례없는 대공방전으로서 해병대 5대 작전의 하나로 기록되고 있다.이 전투로 한국 해병대 제1연대는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으로부터 부대 표창을 받았다. 그 뒤 해병대에서는 〈도솔산의 노래〉라는 군가를 제정하여 그날의 용전의 기백을 후배 해병들에게 알리고 있다

#2 양구 을지전망대- 한국전쟁때 한국 해병대 제1연대는 1951.8.31.~9.3.까지 현재 을지 전망대일대(924봉전망대:김일성고지, 1026:모택동고지)에서 북한군 제3군단 1사단 3연대를 지형상 불리한 조건에도 치열한 혈전 끝에 격퇴하고 양구 북방 해안분지인 펀치볼을 확보한 전투로 당시 924봉을 김일성봉,1026봉을 모택동봉이라고 불러 장병들에게 적개심을 고취하여 4일간의 전투를 승리로 이끌어서 당시 대통령에게" 선인의 경탄한 공훈"이라고 격찬하였다. 을지 전망대는 양구에서 북쪽으로 27km 군사분계선으로 후면 1km지점으로 전망대에서 보 올라니 금강산과 북한의 초소 그리고 북한의 산들이 한 눈에 들어오고 좌측 가칠봉에서 북한군 초소까지가 불과 700미터의 거리를 두고 있다고 한다.


#3 핀치볼 포토존- 뒷편이 주민들이 살고 있는 양구군 해안면 일대 펀치볼


#4 펀치볼 전망대- 전망대에서 본 펀치볼

#5 924봉(김일성 고지)작전 전몰 위령비- 당시 작전으로 아군전사자 93인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진혼제 기념비도 만들어져 있다.


#6 제4땅굴-제4땅굴은 북한의 새로운 침투 방법으로 모색되어 굴설된 땅굴로 1978년 제3땅굴이 발견된 지 12년 만인 1990년 3월 3일에 양구 동북쪽 26㎞ 지점 비무장지대 안에서 발견되었으며 군사분계선에서 1.2km 떨어진 곳에 있다. 그 규모는 높이와 폭이 각 1.7m, 깊이가 지하 145m이며, 총 길이는 2,052m로서 지난 1974년 고랑포 동북쪽 8km지점에서 발견된 제 1땅굴의 높이 1.2m, 폭 0.9m, 길이 지하 46m와 비교해 볼 수 있다. 육군 백두산 부대는 땅굴 발견 이후, 1992년 2월까지 37억 원을 들여 안보기념관과 기념탑을 세우고 갱도 및 갱내시설을 설치해 안보교육장으로 활용하고 있다. 땅굴 출입구에는 발견당시 땅굴을 수색하던 중 북한군이 설치한 수중지뢰에 의해 산화한 군견을 위로하는 충견비가 세워져 있고, 땅굴 내부에는 투명유리 덮개로 덮인 15인승 전동차가 운행되고 있어 앞서 발견된 1,2,3 땅굴에 비해 매우 편리하게 관람할 수 있으며, 전동차에는 방송시설과 좌석별 헤드폰을 부착해 안내 방송을 하고 있다. 또한, 땅굴 내부에 화강암층을 통해 흘러내리는 비무장지대의 오염되지 않은 지하수를 마실 수 있는 기회도 가질 수 있다.


#7 충견비-충견 헌트는 세퍼드 종으로 제21사단 활약한 군견으로 제4땅굴 소탕작전중

탐사견으로 땅굴 소탕작전에 투입 북한군이 설치해 놓은 수중 지뢰 밟아 폭발하여 1개 분대원의 목숨을 구한 명견으로 생후 4년만에 산화하였고, 비록 말을 못하지만 생명을 구한 공을 인정받아 군견으로는 최초로 소위의 계급을 추서받아 인헌무공훈장을 받았다.


#8 제4땅굴 기념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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