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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7. 29. 11:34ㆍ한시와 명언 보기
무흘구곡 경북 성주 출신의 도학자 한강(寒岡) 정구(鄭逑)가 남송 주자의 《무이구곡(武夷九曲)》을 본떠서 성주 대가천을 거슬러 오르며 풍광이 빼어난 아홉곳을 골라 차례로 이름을 붙이고 《무흘구곡》을 지었다. 대가천계곡은 그 무흘구곡의 배경이 될 정도로 경치가 빼어난 곳이다. 기암괴석이 많고 맑은 물이 폭 넓은 계류를 이루어피서철이면 야영객과 피서객으로 붐빈다. 옛날 대가천을 오르내리는 배를 매어 두었다는 배바위, 선바위, 봉비암 등의 명소가 있다. 성주댐에서 계곡으로 이어지는 30번 국도는 드라이브 코스로 잘 알려진 곳이며, 주변에가야산, 독용산성, 정구의 위패를 모신 회연서원 등이 있다.
오늘은 그동안 기회있으면 찾아보기로 생각했던 무흘구곡을 찾아 나섰다.. 그 계곡을 끼고 무흘구곡이 있다는 것은 몇 년 전에야 알았다.. 3곡 배바위에서 6곡 옥류동까지는 수없이 보아 왔지만 1,2곡은 어디 있는지 알 수가 없고 7~9곡은 위치는 대충 짐작 할 수 있지만 아직까지 본 적은 없다. 하여 제1곡 봉비암이 위치하고 있다는 회연서원부터 찾아 나선다.. 봉비암은 회원서원 뒷쪽에 자리하고 있다..
문도 잠겨있어 관광안내 하고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하긴 서원을 찾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오늘도 공휴일이지만 서원앞엔 나 혼자만 있다.. 제법 넓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회연서원이지만 사람들의 발길이 뜸해서인지 적막감이 돈다.. 정문구실을 하는 견도루의 2층 누각이 위압감을 주는데 문은 잠겨있다.. 잠시 난감해하다가 우측을 보니 들어갈 수있는 곳이 있다. 안으로 들어서니 넓은 정원에 나름대로 손질은 되어 있는 것 같다. 하지만 대부분의 전각엔 문이 굳게 잠겨 안으로 들어가 볼 수는 없었다.. 밖에서만 이리저리 주마간산식으로 둘러보는데 한 곳에 사람들이 거주하는 건물이 있다.. 관리하는 사람들인가... 서원을 한 바퀴 둘러보고 서원 뒷쪽에 있다는 봉비암을 보기 위해 다리를 건너간다..
회연서원(檜淵書院)
경북 유형문화재 제51호
회연서원은 조선 선조 때의 대유학자이며 문신인 한강(寒岡) 정구(鄭逑, 1543~1620)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고, 지방민의 유학교육을 위하여 그의 사후인 1627년(인조 5년) 제자들이 뜻을 모아 세운 서원이다. 서원이 위치하고 있는 곳은 1583년(선조 16년) 정구가 회연초당을 세우고 인재를 양성하던 곳이다. 1690년(숙종 16년) 현판, 서적, 토지, 노비 등을 하사받아 국가로부터 서원으로서 권위를 인정받은 사액서원이 되었다. 1868년(고종 5년) 서원훼철령에 따라 훼철되었다가 1970년대에 복원하였으며, 매년 음역 2월과 8월에 향사를 지내고 있다. 서원의 주향(主享)인 한강 정구는 외증조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의 도학을 전수하고, 그 기반위에 퇴계학과 남명학을 통합하여 새로운 학통을 세워 실학의 연원을 확립하였으며, 우주 공간의 모든 것을 연구대상으로 삼아 경서, 병학, 의학, 역사, 천문, 풍수지리 등 모든 학문에 관심을 가졌다. 특히 예학에 많은 관심을 기울인 대학자였다. 그는 평소 관직에 뜻을 두지 않았으나, 국가의 부름을 거절하지 못하여 부득이 관직에 나올 경우에는 주로 외적을 맡아 선정을 베풀었으며 내직으로 우승지, 공조참판, 대사헌 등을 역임하였다. 사후에 문목(文穆)의 시호가 내리고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경내의 견물로는 구(舊)사당, 강당, 동.서재, 신(新)사당, 전사청(典祀廳), 견도루(見道樓) 등이 있으며, 정구가 직접 조성한 서원 앞뜰의 백매원(百梅園)에는 신도비(神道碑)가 서 있다. 그 밖에 한강 정구와 관련된 유물. 유품이 전시되어 있는 유물전시관과 향현사(鄕賢祠), 관리사가 있다. 사당에는 한강 정구를 주향(主享), 석담(石潭) 이윤우(李潤雨)를 종향(從享)으로 모시고 있으며, 향현사에는 신연(新淵) 송사이(宋師?), 용제(容齊) 이홍지(李弘器), 육일헌(六一軒) 이홍량(李弘量). 모제(茅齊) 이홍우(李弘宇), 동호(東湖) 이서(李舒) 등 한강 정구와 동년배로서 지역민들의 존경을 받았던 인물들의 위판이 봉안되어 있다.
견도루
정구선생 신도비..
정구 선생은 1543(중종 38)∼1620(광해군 12).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로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도가(道可), 호는 한강(寒岡)으로 성주(星州) 출신이다. 아버지는 판서 정사중(鄭思中)이고, 김굉필의 외증손으로 성주이씨(星州李氏)와 혼인한 인연으로 성주에 정착하였다. 7세 때 ≪대학≫·≪논어≫의 대의를 통했을 정도로 어려서부터 신동이라 불리었다. 1554년(명종 9)인 조식의 제자였던 오건(吳健)이 성주향교의 교수로 부임하자 그 문하생이 되어 ≪주역≫ 등을 배웠고, 1563년(명종 18) 당대 최고의 학자인 이황·조식에게서 수학하였다. 이듬해 상경하여 과장(科場)까지 갔다가 시험에 응하지 않고 귀향한 후, 과거를 단념하고 학문에만 열중하였다. 1573년(선조 6) 유일로 천거되어 예빈시참봉에 제수된 후, 1580년에는 창녕현감으로 재임 중 선정을 베풀어 생사당(生祠堂)이 세워졌다. 그후 사헌부지평·군자감판관·동복현감을 거쳐, 1585년 교정청의 교정랑(校正郞)이 되어 ≪경서훈해(經書訓解)≫ 간행에 참여하였다. 그후 통천군수(通川郡守)·승정원우승지·강원도관찰사·성천부사(成川府使)·충주목사·공조참판 등을 역임하였고, 1608년(광해군 즉위년) 대사헌 재임중 임해군(臨海君)의 옥사가 일어나자 관련자를 모두 용서하라는 상소를 올리고 고향으로 내려갔다. 1613년 계축옥사(癸丑獄事)가 일어나자 다시 상소하여 영창대군(永昌大君)을 구하려 하였고, 향리에 백매원(百梅園)을 세워 유생들을 가르쳤다. 그는 경학을 비롯하여 산수(算數)·병진(兵陣)·의약·풍수에 이르기까지 여러 분야에 정통하였다. 특히 예학(禮學)에 밝았으며 글씨도 뛰어나 당대의 유명한 문장가로 알려졌다. 그는 수령직을 맡을 때마다 그 지역의 인정·산천·물산·풍속을 정리한 읍지들을 간행하였는데 현전하는 것으로 ≪함주지(咸州誌)≫가 있다. 또한 문집으로 ≪한강집(寒岡集)≫과, 편저로 ≪성현풍(聖賢風)≫·≪태극문변(太極問辨)≫·≪와룡지(臥龍誌)≫·≪역대기년(歷代紀年)≫· ≪관의(冠儀)≫·≪혼의(婚儀)≫·≪장의(葬儀)≫·≪계의(·儀)≫·≪갱장록(羹墻錄)≫ 등이 있다. 성주의 회연서원(檜淵書院)·천곡서원(川谷書院), 충주의 운곡서원(雲谷書院), 창녕의 관산서원(冠山書院) 등과 통천(通川)의 경덕사(景德祠)에 제향되었다. 인조반정 후 이조판서에 추증되었고, 문목(文穆)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향현사
회연서원 모습 景晦堂(경회당)의 문도 굳게 잠겨있고 400년된 느티나무가 지키고 있다.
숭모각
관리사인듯 사람들이 거주하고 있다.
서원 앞뜰..
서원에서 본 견도루..
武屹九曲詩
서곡 (序曲) 天下山誰最箸靈(천하산수최저령) 천하의 산 중에 어느 곳이 가장 신령한가 人間無似此幽淸(인간무사차유청) 인간 세상에서 이처럼 그윽하고 맑은 곳이 없으니 紫陽況復曾樓息(자양황복증루식) 더욱이 자양(주자)이 다시 깃들이니 萬古長流道德聲(만고장류도덕성) 영원토록 도덕성이 길이 흐르네
제1곡 : 봉비암 (鳳飛岩) 한강(寒岡) 정구(鄭逑)선생의 무흘구곡중 제1곡으로 깎아지른 듯한 기암절벽 숲속에는 이름 그대로 아름다운 새들이 날아 들며 절벽 밑에는 수정같이 맑은 물이 푸른 소(沼)를 이루고 있는 경치가 뛰어난 곳으로 한강 선생은 여기에 회연초당(檜淵草堂)을 세우고 수많은 후학들을 양성하며 그 절경을 다음과 같이 노래하였다.
一曲灘頭泛釣船(일곡탄두범조선) 일곡이라 여울목에 낚시배를 띄우니 風絲繚繞夕陽川(풍사요요석양천) 석양이 부서지는 시냇물에 실바람 둘러도네 誰知捐盡人間念(수지연진인간념) 그 누가 알리오 세상근심 다 버리고 唯執檀漿佛晩煙(유집단장불만연) 박달나무 삿대 잡고 저문 연기 헤칠 줄을....
봉비암은 다리를 건너 맞은 편 둑에 전망대도 설치되어 있지만 수풀에 가려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제2곡 : 한강대 (寒岡臺) 二曲佳妹化作峰(이곡가매화작봉) 이곡이라 어여쁜 여인 산봉우리 되어 春花秋葉靚粧容(춘화추엽정장용) 봄 꽃과 가을 단풍으로 아름답게 단장했는데 當年若使靈均識(당년약사영균식) 당시에 영균이 있어 알았더라면 添却離騷說一重(첨각이소설일중) 이소(영균의 시)에다 한 두 구절 더했으리라..
제3곡 : 무학정 (舞鶴亭) 한강(寒岡) 정구(鄭逑)선생의 무흘구곡중 제3곡으로 바위의 생김새가 배 모양과 같아서 또는 옛날 대가천을 오르내리는 배들을 이 곳에 매어 두었다하여 일명 배바위(船岩, 舟岩)라고 한다. 주변 산수의 경관이 빼어난 이 곳에 정자가 있었으니 이를 무학정이라 불렀으며 한강 선생은 그 절경을 다음과 같이 노래하였다.
三曲誰藏此壑船(삼곡수장차학선) 삼곡이라 누가 이 골짜기에 배를 숨겼는가 夜無人負己千年(야무인부기천년) 밤이라 타는 사람 없어 지난 세월 이미 천년 大川病涉知何限(대천병섭지하한) 큰 냇물 건너기 어렵거늘 그 끝이 어디인가. 用濟無由只自憐(용제무유지자련) 건너갈 길 없으니 다만 절로 가련하네.
제4곡 : 선바위 (立 岩) 四曲雲收百尺巖(사곡운수백척암) 사곡이라 백척 바위에 구름이 걷히고 巖頭花草帶風髮(암두화초대풍발) 바위 위에는 꽃과 풀이 바람에 흩날리네 箇中誰會淸如許(개중수회청여허) 그 중 청정함이 이같은 줄 누가 알리요. 霽月天心影落潭(제월천심영락담) 하늘에 개인 달그림자 연못에 드리우네...
제5곡 : 사인암 (舍人岩) 한강(寒岡) 정구(鄭逑)선생의 무흘구곡중 제5곡으로 티끌 한 점 없는 푸른 삼봉과 깎아지른 듯한 절벽 아래로 대가천의 맑은 물이 흐르는 이 곳은 옛날 사인(舍人) 벼슬을 지낸 중이 이곳의 아름다운 수석을 사랑하여 바위집을 짓고 살았기에 사인암(舍人岩) 이라고 하고, 혹은 속세를 버리고 이곳에 온 사람은 누구나 심신을 이곳과 영원한 인연을 맺고자 한다 해서 사신암(舍身岩)이라고도 한다 하며 한강선생도 이곳에서 자신의 마음을 비우면서 다음과 같이 노래하였다.
五曲淸潭幾許深(오곡청담기허심) 오곡이라 맑은 연못이 얼마나 깊을까? 潭邊松竹自成林(담변송죽자성림) 연못가의 솔과 대는 저절로 수풀을 이루네 幅巾人坐高堂上(복건인좌고당상) 두건 쓴 사람은 단위에 높이 앉아 講設人心與道心(강설인심여도심) 인심과 도심을 강설하고 있구나
제6곡 : 옥류동 (玉流洞) 六曲茅茨枕短灣(육곡모자침단만) 육곡이라 초가집이 짧은 물굽이에 자리하니 世紛遮隔幾重關(세분차격기중관) 어지러운 세상사 몇 겹으로 막았던고 高人一去今何處(고인일거금하처) 높은 사람들 한 번 가니 지금은 어디 있나? 風月空餘萬古閑(풍월공여만고한) 풍월만 속절없이 남아 만고에 한가롭기만 하네
수도암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옛날솜씨마을..
제7곡 : 만월담 (滿月潭) 七曲層巒繞石灘(칠곡층만요석탄) 칠곡이라 층층 봉우리 돌여울에 둘러 있어 風光又是未曾看(풍광우시미증간) 이러한 풍광 또한 일찍이 보지를 못했어라 山靈好事驚眠鶴(산령호사경면학) 산신령은 호사가라 자던 학 놀래 깨워 松露無瑞落面寒(송로무서낙면한) 소나무 이슬이 무단히 얼굴에 떨어져 차갑네
제8곡 : 와룡암 (臥龍岩) 八曲坡襟眼益開(팔곡파금안익개) 팔곡이라 마음을 여니 눈도 더욱 열리어 川流如去復如廻(천류여거복여회) 냇물이 흘러가다 다시 돌아오는 듯 하여라 煙雲花鳥渾成趣(연운화조혼성취) 자욱한 구름 꽃과 새는 혼연하 어울려서 不管遊人來不來(불관유인래불래) 나그네 오든 말든 관계하지 않을래라.
제9곡 : 용 추 (龍 湫) 九曲回頭更喟然(구곡회두갱위연) 구곡이라 머리돌려 다시 탄식하노니 我心非爲好山川(아심비위호산천) 내 마음 산천이 좋아 이러함이 아니로세 源頭自有難言妙(원두자유난언묘) 근원은 본디부터 말로 못할 묘함이 있나니 捨此何須問別天(사차하수문별천) 이를 버리고 어찌 별천지를 묻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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