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2. 28. 11:10ㆍ역사속의 오늘
1919.3.1.-3.1운동
1919년 3월 23일부터 28일까지 구로 인접 지역에서 전개된 항일 운동.
[역사적 배경]
1910년 일제가 우리나라의 국권을 강탈한 후 식민지 경영의 통치 기구로 조선총독부를 설치하였고, 한국 사회를 재편하기 위해 폭압적인 무단통치를 실시했다. 한민족은 무단통치하에서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 등 근대적 기본권을 박탈당하였다. 또한 회사령의 실시로 민족 자본가의 발전을 가로막고, 1910년부터 1918년사이에 진행된 토지 조사 사업으로 불법적인 일본인들의 토지 소유가 인정되었고 지주의 권리가 강화되면서 농민들이 소작농으로 전락하면서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불만과 저항이 거세졌다.
이러한 거족적인 민족 해방 의지를 바탕으로 1910년대에는 국외에서의 독립군 기지 건설 운동, 국내에서의 비밀결사 운동, 교육 문화 운동 및 생존권 수호 투쟁 등을 통해 운동 역량이 강화되어 갔다. 이와 함께 1910년대 말 국제 정세가 크게 변화되었다. 1918년 1월 미국의 윌슨 대통령이 민족자결주의를 주장하였는데, 이는 식민지 약소민족을 크게 고무하여 민족 해방 운동을 고양시켰다. 손병희·최린 등 천도교계, 이승훈 등 기독교계, 한용운 등 불교계가 독립 선언을 계획하여 독립선언서, 파리강화회의 등에 보내는 독립청원서, 일본 정부에 보내는 독립의견서 등이 작성되었고, 2월 27일 독립선언서가 인쇄되어 종교 교단을 중심으로 미리 배포되었다. 그 후 고종의 장례일인 3월 1일 정오 서울을 비롯하여 평양·진남포·안주·의주·선천·원산 등지에서 동시에 독립선언식이 이루어짐으로써, 전국적인 민족 해방 운동이 전개되었다.
[경과]
구로 인근 지역에서의 만세 운동은 부천군 지역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1919년 3월 23일 이보경·이무경·최선택·이창범·이재경·이상태·최개성 등의 주동으로 문학면 관교리에서 횃불 만세 시위운동이 일어났다. 이후 조명원이 조종서·최봉학·문무현 등과 협의하여 혈성단을 조직하였다. 태극기와 격문 80매를 제작하여 남북리·거잠리·을왕리·덕교리 주민에게 격문을 배포하고 150명의 주민들과 함께 만세 시위운동을 전개하였다.
1919년 3월 1일을 기하여 한민족은 국내외에서 조선의 독립을 외치는 거족적인 만세 운동을 펼쳤다. 이에 계양 주민들도 3월 24일 오후 2시경 오류리의 심혁성의 주도하에 장기리 황어장터 장날을 이용하여 600여 명이 참여한 가운데 태극기를 흔들며 ‘조선 독립 만세’를 힘껏 외쳤다. 황어장터의 만세 운동은 인천 지역에서 전개된 가장 큰 규모의 만세 운동이었으므로 당황한 일제는 심혁성을 체포하는 한편 이의 진압에 적극 나섰다. 이에 장기리의 임성춘 등 주민 600여 명은 만세 운동과 더불어 체포되어 가는 심혁성의 탈환 운동을 전개하였다.
[결과]
한편 부내 경찰관 주재소 일본 경찰은 칼을 휘둘러 선봉에 섰던 선주리의 이은선을 즉사케 하고 윤해영에게 부상을 입히는 만행을 저지르기에 이른다. 이은선의 피살 소식이 전해지자 이담·최성옥·전원순·이공우 등 천도교인, 기독교인, 일반 농민 등이 주축이 되어 분연히 떨쳐 일어나 일제의 만행을 규탄하는 한편 진실 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촉구하였다.
격분한 계양 주민 100여 명은 우선 선주리에 있는 면사무소 서기 이경응이 친일적인 혐의가 있다고 보아 그의 집으로 달려가 집을 부수어 민족정기가 살아 있음을 보여주고자 하였으며 주민들을 억압 탄압하던 면사무소를 파괴하여 친일 기관을 응징하였다. 28일에는 150여 명의 주민들이 오류리에서 만세 시위운동을 벌였고, 31일에는 남동면 서창리에서 송성용·송윤중·오창조·김춘근·윤영택·박중일이 주축이 되어 4월 1일 질천시장에서 만세 시위운동을 계획하였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실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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