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해지맥 1구간(남해대교-산성산-대국산-현촌마을)

2019. 3. 10. 09:29지맥산행/남해지맥-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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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일시: 2019. 3. 9.(토) 08:28 ~14:59 (6시간 31분, 휴식 1시간)

0. 코스: 남해대교-산성산-구두산-금음산-약치곡산-대국산-가청재-삼봉산-현촌마을

0. 거리: 15.0km(전체: 57.1km중  지맥:15.0k,총계15.0k 진행:26.3%)

          

  작년부터 가 볼려고 준비한 남해지맥.. 바닷가의 그림을 그리면서 희망을 가지고 새벽5시에 렌카로 집을 나선다. 시내를 지나 일행을 태워 고속도로를 달리니 새벽바람은 시원하다. 일기예보에선 날씨가 좋다고 했는데 걱정 아닌 걱정을 하며 남해대교 들머리에 도착한다. 현장에 도착하니 8시를 조금 넘긴다. 산행준비를 하고 남해대교를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은후 출발하는데 여기가 노량해전 장소라는걸 깨우치게하는 안내판이 걸려 있다. 아뿔사 그 상흔이 있는 전쟁터인데 내가 잠시 잊고 있었다니 부끄럽기까지하다.영화 "명랑"에서 마지막 싸움을 한 곳이 여기라고한다. 그 당시 장군과 장졸들은 온데간데 없으나 역사는 흐르는 세월과 함께 우리 기억속에만 살아 있다. 남해지맥은 분명 바다를 끼고 산을 탈것이라는 예감은 산을 걸으면서보니 바닷산행길은 온데간데 없고 그냥 일반 산행길과 다름이 없다. 한번 후회..ㅎㅎ 바닷가라서 크게 높지 않는 산길이라고 쉽게 생각도 좀 했으나 막상 산을 타보니 오르막 내리막이 많이 심하니 2번 후회(웃음) 첨부터 끝까지 우리가 지나온 산길이 한눈에 아스라이 보이기도 한 산길...새로 생긴 노량대교는 두 郡이 다리 명칭 갖고 언론에서 한동안 시끄러웠는데,,,정리되어서 "노량대교"라고 불러진다고한다.그리고 참 이곳이 임진왜란때 노량해전으로 이순신장군이 전사한 곳이면서 정유재란이 끝이 난 마지막 전쟁이라고 한다. 하산후 하동 제첩국도 오랫만에 먹어보고 힘든 산행을 마치고 차를 또 2시간 끌고 집에오니 8시를 간당간당하고 있다. 손수 운전하면서 산행은 많이 힘들게한다.

 

#1 들머리-남해대교 입구에서 남해지맥 1구간의 발을 들어놓는다.

 

(노량대교)

 

 

#2 노량해전 안내판- 1597년 재침한 왜군은 그 해 9월 명량해전(鳴梁海戰)에서 패배한 데 뒤이어 육전에서도 계속 고전하였다. 다음 해 8월 도요토미(豊臣秀吉)가 병사하자, 왜군은 순천 등지로 집결하면서 철수작전을 서둘렀다.이 소식을 접한 이순신은 명나라 수군도독(水軍都督) 진린과 함께 1598년 9월 고금도(古今島) 수군 진영을 떠나 노량 근해에 이르렀다. 명나라 육군장 유정(劉綎)과 수륙합동작전을 펴 왜교(倭橋)에 주둔하고 있는 왜군 고니시(小西行長)의 부대를 섬멸하기 위함이었다.그 때 고니시는 수륙 양면으로 위협을 받게 되자 진린에게 뇌물을 바치고, 퇴로를 열어줄 것을 호소하였다. 이에 진린은 고니시가 마지막으로 요청한 통신선 1척을 빠져 나가게 하고, 이순신에게 그 사실을 알렸다.

고니시는 통신선으로 사천(泗川) 등지의 시마쓰(島津義弘)와 연락해 남해·부산 등지에 있는 왜군 수군의 구원을 받아 조·명 연합수군을 협공하면서 퇴각하려는 생각이었다. 그러한 고니시의 전략을 잘 알고 있는 이순신은 진린을 꾸짖고 함께 진형을 재정비해 왜군을 맞아 격멸하기로 하였다.11월 18일 밤 이순신의 예견대로 노량 수로와 왜교 등지에는 500여척의 왜선이 집결해 협공할 위세를 보였다. 200여척의 조·명 연합수군을 거느린 이순신은 “이 원수만 무찌른다면 죽어도 한이 없습니다(此讎若除死則無憾)”고 하늘에 빌고 전투태세에 들어갔다.

19일 새벽, 싸움은 막바지에 이르고 이순신과 진린은 서로 위급함을 구하면서 전투를 독려하자 왜의 수군 선박 200여척이 불에 타 침몰하거나 파손되고 100여 척이 이순신함대에 나포되었으며 나머지 패잔선들이 관음포 쪽으로 겨우 달아났다.이순신은 같은 날 오전 관음포(觀音浦)로 도주하는 마지막 왜군을 추격하던 중 총환을 맞고 쓰러지면서 “싸움이 급하니 내가 죽었다는 말을 하지 말라(戰方急愼勿言我死)”는 세계사상 길이 빛나는 유언을 남기고 숨을 거두었다.이 해전에서 명나라 장수 등자룡(鄧子龍)과 가리포첨사(加里浦僉使) 이영남(李英男), 낙안군수(樂安郡守) 방덕룡(方德龍) 등이 전사하였다. 한편, 순천 왜교에서 봉쇄당하고 있던 고니시의 군사들은 남해도 남쪽을 지나 퇴각해 시마쓰의 군과 함께 부산에 집결, 철수했다. 노량해전을 끝으로 정유재란은 막을 내렸다.

 

#3 초입지부터 급 오르막 계단으로 산행길이 시작된다.

 

#4 산성산

 

#5 노량마을 입구

 

 

#6 저멀리 삼천포의 화력발전소도 보이지만 요사이 미세먼지의 주 원인이 아닌가 의구심이 든다.

 

 

#7 편백나무 숲길

 

 

 

#8 구두산- 여기를 찾느라고 길이 아닌 산길 그리고 급 오르막길을 30여분 동안 힘차게 올랐는데 정상은 넘 초라하기까지 하다.

 

#9 금음산 대국산 진입로- 여기서 10분간 휴식

 

#10 저멀리 사천과 출발지 남해대교가 발 아래에서 까마득하게 보인다. 연기를 내뿜는 화력발전소와 사천 와룡산도 보이고~~

 

#11 금음산-산 봉우리는 많은데 정상석은 전부다가 보잘것없이 초라하기만 하다.

 

#12 약치골산- 그 누군가가 산정상을 표시해 놓지 않으면 그냥 지나치기 쉬운 산

 

#15 대국산과 대국산성-대국산성은 둘레 약 1,500m. 경상남도 기념물 제19호. 현재 문지(門址)·연못지·건물지 등이 남아 있다.이 산성은 높이 375m의 대국산의 능선을 따라 축조되었는데, 주위의 요소요소에는 석축으로 긴 네모꼴의 경계초소가 있어 접근하는 적을 경계하였던 것 같다.석축 주위에는 동·서·남의 삼면으로 모두 10m의 토대를 둘러서 성내에서도 외곽 지역을 잘 볼 수 있도록 하였고, 북쪽은 약 2m 정도로 길게 하여 성내의 도로를 은폐시켰던 듯하다. 석축에 사용된 석재는 20∼30㎝ 크기의 자연석을 겹겹으로 쌓아올린 다음 흙으로 메웠다.입구는 동남쪽과 북쪽 두 곳에 두었는데, 동남쪽의 것이 정문이었던 것으로 추측되며, 북쪽의 일부를 제외하고는 거의 완벽하게 보존되어 있다.

이 성은 인접한 고현(古縣)의 산성으로 추측되는 바, 삼국시대에서 조선시대에 이르는 사이에 왜구방비를 위하여 축조한 산성으로 여겨지며, 외성도 현존하고 있다. 성내에서는 여러 종류의 기와조각과 토기조각·자기조각 등이 채집되고 있다.

전설에 의하면 조선 경종 때 천장군(千將軍)과 칠시녀(七侍女) 사이에 얽힌 낭만적인 사연이 있다. 그래서 이 성은 당시 천장군이 쌓았다고 하며, 수년 전까지만 하여도 성내에 천장군의 목상(木像)을 안치하여 제를 지내기도 하였다.

 

 

#16 대국산과 남해바다

 

#17 등산로 주변엔 새파란 보리가 한창 자라고 있다.

 

 

#18 가청고개

 

#19 삼봉산 전망대- 전망대에서 바라보니 오늘 들머리부터 지나온 산길을 한 눈에 다 들어오고 있다.

 

 

#20 삼봉산 정상에서

 

#21 오늘 날머리인 현촌마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