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4.16.-세월호 침몰

2019. 4. 16. 11:44역사속의 오늘

2014.4.16.-세월호 침몰

2014년 4월15일 오후9시 세월호가 인천에서 제주도를 향해 출발했다. 원래 출발시각은 오후 6시30분이었지만 악천후로 출발이 늦춰졌다. 탑승자는 제주도 수학여행을 떠나는 경기도 안산 단원고 2학년 학생 325명을 포함해 교사14명, 인솔자 1명, 일반탑승객 74명, 화물기사 33명, 승무원 29명 등 모두 476명이었다.
4월16일 오전8시49분 전남 진도군 앞바다인 조류가 거센 맹골수도에서 세월호는 급격하게 변침을 했고, 배는 곧 중심을 잃고 기울어져 표류하기 시작했다. 8시51분 단원고 학생이 119에 구조요청 신고를 했다. 배는 침몰하고 있었지만 선내에서는 “이동하지 말라”는 방송이 연방 흘러나왔다. 9시35분 해경 함정 123정이 도착했다. 기관부 선원 7명이 승객을 버리고 탈출해 구조됐고 조타실 선원들도 뒤따라 탈출했다. 침몰전까지 172명이 구조됐지만, 10시30분께 침몰한 이후 단 1명도 구조되지 못했다. 현재까지(2015년 4월) 희생자는 295명, 실종자는 9명이다. 이 같은 상황 속에서 일부 언론은 ‘전원구조’라는 오보를 냈고, 해경 등 구조당국은 구조작업에 우왕좌왕해 희생자·실종자 가족들의 불신의 대상이 됐다.
검찰은 승객들을 버리고 탈출한 이준석 선장 등 세월호 선원 15명에 대해 살인, 살인미수, 업무상 과실 선박매몰, 선원법 위반 등의 혐의를 적용해 2014년 5월15일 구속기소했다.


2017년 4월11일 인양 완료

2015년 8월 세월호 인양업체로 중국 국영기업 상하이샐비지 컨소시엄이 선정됐다. 상하이샐비지는 중국 교통운수부 산하 업체로 중국 양쯔강에서 침몰한 유람선 인양작업에 참여하는 등 약1900건의 선박구조작업에 참여했다. 상하이샐비지는 한국업체인 오션씨엔아이와 지분을 7대3으로 나눠 컨소시엄을 구성했다. 인양 대금은 851억원으로 책정됐다.

인양방식은 상하이샐비지가 제안 한대로 선체에 구멍을 뚫지 않고 부력재와 철재빔을 이용하기로 했다. 세월호 인양은 ‘잔존유 제거->창문·출입구 안전망으로 폐쇄 등 유실방지 작업->선내 막대형(1.5m*30m) 부력재 30여개와 압축공기 주입->선수부분 와이어 감아 크레인 연결해 살짝 들어올림->세월호 아래에 3.5m간격으로 24개 철제 리프팅빔 설치->리프팅빔을 크레인 1대에 연결해 수심 23m까지 올려 동거차도쪽 2km 이동->플로팅독에 올려 목포신항까지 90km 이동’ 순으로 진행하기로 했다. 이때 목표 인양 완료 시점은 2016년 7월 이전이었다. 그러나 인양작업이 차질을 빚으면서 해를 넘겨 2017년으로 이어지게 됐다.

상하이샐비지 컨소시엄은 2016년 3월 인양작업에 본격 착수했다. 같은해 7월말 선수에 리프팅빔 18개를 끼우는 것은 성공했지만, 2016년 11월 현재 10개를 설치해야 하는 선미에는 3개만 설치된 상태다. 세월호 밑에 자갈과 뻘이 굳어져 리프팅빔을 끼우는 데 시간이 걸리고 있다고 해양수산부는 설명했다. 해수부는 당초 선미 들기를 2016년 11월말~12월 초에 시도한 후 후속 작업을 벌여 연내에 인양을 끝내려 했지만, 해저 토사 굴착을 통한 리프팅빔(받침대) 설치 등 일부 작업이 실패해 시간이 지연됐고 인양 작업은 해를 넘기게 된 것이다.

또 해수부는 기존 장비인 ‘해상크레인’과 ‘플로팅독’을 바람이 강해지고 파도가 높아지는 겨울철 작업을 위해 ‘재킹바지선’과 ‘반잠수식 선박’으로 바꾸기로 했다. 선체에 걸린 와이어를 공중에서 끌어올리는 해상 크레인과 달리 자체적으로 탑재한 유압잭의 힘으로 끌어당기는 재킹바지선과 날개벽이 없는 개방형 선체인 반잠수식 선박이 바람과 파도의 영향을 덜 받기 때문이다. 2014년 10월27일 전남 진도에 머물고 있던 세월호 미수습자 가족들은 선체 인양을 추진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수중수색을 통해 미수습자를 발견할 가능성이 아직 남아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실제 이 결정 이튿날 295번째 희생자를 수습했다. 그러나 이후 성과가 없었다. 겨울이 오면서 더 이상 수색이 힘들어지자 2014년 11월11일 가족들은 수색 종료에 합의했다. 수색 중단 직후부터 가족들은 조속한 인양을 요구했다. 2015년 4월22일 정부는 선체를 인양하기로 결정했다.  2015년 8월 세월호 인양업체로 중국 국영기업 상하이샐비지 컨소시엄이 선정됐다. 상하이샐비지는 중국 교통운수부 산하 업체로 중국 양쯔강에서 침몰한 유람선 인양작업에 참여하는 등 약 1,900건의 선박구조작업에 참여했다. 상하이샐비지는 한국업체인 오션씨엔아이와 지분을 7대3으로 나눠 컨소시엄을 구성했다. 인양 대금은 851억원으로 책정되었지만 이후 916억원으로 불어났다. 목표 인양 완료 시점은 2016년 7월 이전이었다. 그러나 인양작업이 차질을 빚으면서 해를 넘겨 2017년으로 이어지게 됐다.

2017년 봄부터 세월호 인양을 급물살을 탔다. 3월19일 시험 인양이 줄꼬임 현상으로 실패했지만 3월22일 시험 인양에 성공한 뒤 오후 8시50분부터 본인양을 시작했다. 본인양 시도 하루만인 3월23일 새벽 4시47분 눈으로 확인 가능할 정도로 선체가 올라왔다. 선미 램프(자동차 등이 출입하는 통로의 출입문)가 열려 있는 것이 뒤늦게 발견돼 절단 작업을 벌이기도 했다. 3월25일 수면위로 올려진 세월호가 반잠수식 선박 화이트마린호에 선적됐다. 3월28일에는 동물뼈가 반잠수식 선박 갑판 위에서 발견되면서 유실방지책에 구멍이 뚫린 것 아니냐는 지적을 받기도 했다. 3월31일에는 세월호를 실은 화이트마린호가 참사 지점인 동거차도 인근 해역을 침몰 3년만에 출발해 목포 신항에 도착했다. 1만7000t 내외로 추정되는 세월호의 무게 때문에 육상 거치에 어려움을 겪었다. 4월9일 참사 1089일만에 세월호가 완전히 부두 위로 올라왔다. 4월11일 참사 1091일만에 세월호 인양작업이 완료되어 내부 수색이 진행되었다.

내부 수색 진행

5월 5일 침몰해역 수중수색 작업 중 미수습자로 추정되는 유골 1점이 발견되었다. 이후 진행한 선체 내부 수색 과정에서도 사람의 것으로 추정되는 뼈가 몇 차례 발견되어 현장수습본부가 국립과학수사원에 DNA 분석을 의뢰하였다. 참사 1127일 만인 5월 17일, 국과수의 DNA 검사를 통해 지난 5일 수중수색 중 세월호 침몰해역(SSZ-2)에서 수습한 유골의 신원이 미수습자 9명 중 한 명인 고창석 교사로 확인되었다. 이후 5월 19일 3층 중앙부 우현 에스컬레이터 자리에서 수습한 유골의 신원이 허다윤양으로 확인되었다. 5월 25일 4층 선미에서 수습한 유골의 신원이 조은화양으로 확인되었다. 6월 5일 세월호 3층 객실에서 수습한 유해의 신원이 이영숙 씨로 확인되었다.

6월 20일 세월호 객실 1차 수색이 마무리됐다. 이날 오전까지 선체 내부와 침몰 해역에서 발견된 옷, 휴대폰, 가방 등의 유류품은 약 4,101개로, 그중 370여 개가 유가족에게 돌아갔다. 6월 21일 세월호 객실부와 화물구역, 침몰해역에 대한 2차 수색이 시작됐다. 10월 24일 세월호 침몰해역에서 진행됐던 수중 수색 작업이 공식 종료됐다. 11월 16일 세월호 미수습자 가족들이 기자회견을 통해 목포신항을 떠나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11월 18일 세월호 미수습자 5명(단원고 남현철, 박영인 학생, 양승진 교사, 권재근 씨, 권혁규 군)의 합동 추모식이 진행됐다. 세월호 참사가 발생한 지 1313일 만이다.

2018년 5월 10일 낮 12시 10분 세월호가 직립됐다. 세월호 선체가 똑바로 세워진 것은 목포신항에 거치된 2017년 4월 11일 이후 394일 만이다. 세월호 참사일 기준으로는 1485일 만이다. 직립 작업은 세월호 하부에 수직 철제빔을 설치하고, 뒤편 부두에 자리 잡은 1만t급 해상크레인에 와이어(쇠줄)을 앞뒤로 걸어 선체를 뒤편에서 끌어당기는 방식으로 진행했다. 이후로는 선체가 누운 상태에서 살펴보기 어려웠던 세월호 좌현을 중심으로 미수습자 수색과 사고 원인 조사를 진행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