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11. 28. 18:32ㆍ산따라 길따라
>>>세계 문화유산 九대 서원 나들이(1)<<<
-옥산,도동,남계서원-
0. 등재일: 2019. 7. 6. 제43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
0. 등재서원(9): 소수서원(1543년 첫 사액서원), 남계서원(1552년), 옥산서원(1573년), 도산서원(1574년),
필암서원(1590년), 도동서원(1605년),병산서원(1613년), 무성서원(1615년),돈암서원 (1634년)
0.지역별: 경북4(소수,도산,병산,옥산),대구1(도동),경남1(남계), 전남1(필암),전북1(무성),충남1(돈암)
1. 옥산서원(이언적)
0. 일시: 2020. 2. 22.
0. 위치: 경북 경주시 안강읍 옥산리 7
사적 제154호인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 옥산리에 있는 옥산서원은 이언적(李彦迪)의 덕행과 학문을 추모하기 위해 1572년(선조 5) 경주부윤 이제민(李齊閔)이 지방 유림의 뜻에 따라 창건하였으며, 1574년 사액 서원이 되었다. 1871년 대원군이 서원을 철폐할 때 훼철되지 않고 존속된 47개 서원 중의 하나이다. 2019년 7월 6일 오늘날까지 한국에서 교육과 사회적 관습 형태로 지속되어온 성리학과 관련된 문화적 전통의 증거이며 성리학 개념이 여건에 맞게 바뀌는 역사적 과정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탁월한 보편적 가치가 인정되어 다른 서원 8곳과 함께 한국의 14번째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으로 등재되었다. 옥산서원은 이보다 앞서 2010년 한국의 역사마을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경주 양동마을에도 포함되어 있다. 주변엔 안강 도덕산이 뒤에서 받처주고 있는 아름다운곳에 자리를 잡고 있다.옥산서원은16~17세기에 건립된 다른 8개 서원과 함께 오늘날까지 한국에서 교육과 사회적 관습 형태로 지속되어온 성리학과 관련된 문화적 전통의 증거이며 성리학 개념이 여건에 맞게 바뀌는 역사적 과정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 인정받아 '한국의 서원(Seowon, Korean Neo-Confucian Academies)'이라는 이름으로 한국의 14번째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이날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9개 서원이다.
# 서원옆으로 흐르는 시냇물이 도덕산에서 발원하여 내려오는가 보다.
* 이언적(1491~1553,경상북도 경주 출신. 본관은 여강(驪江: 여주(驪州)). 초명은 이적(李迪)이었으나 중종의 명으로 언(彦)자를 더하였다. 자는 복고(復古), 호는 회재(晦齋)·자계옹(紫溪翁). 회재라는 호는 회암(晦菴: 주희의 호)의 학문을 따른다는 견해를 보여준 것이다. 할아버지는 참군 이수회(李壽會)이고, 아버지는 생원 이번(李蕃)이며, 어머니는 경주손씨(慶州孫氏)로 계천군(鷄川君) 손소(孫昭)의 딸이다.조선시대 성리학의 정립에 선구적인 인물로서 성리학의 방향과 성격을 밝히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고, 주희(朱熹)의 주리론적 입장을 정통으로 확립하여 이황(李滉)에게 전해주었다. 1514년(중종 9) 문과에 급제하여 이조정랑·사헌부장령·밀양부사를 거쳐 1530년 사간이 되었다. 이때 김안로(金安老)의 등용을 반대하다가 관직에서 쫓겨나 경주의 자옥산에 들어가서 성리학 연구에 전념하였다. 1537년 김안로 일당이 몰락하자 종부시첨정으로 불려나와 홍문관교리·응교·직제학이 되었고, 전주부윤에 나가 선정을 베풀어 송덕비가 세워졌다. 이때 조정에 「일강십목소(一綱十目疏)」를 올려 정치의 도리를 논하였다.이조·예조·형조의 판서를 거쳐 1545년(명종 즉위년) 좌찬성이 되었다. 이때 윤원형(尹元衡) 등이 을사사화를 일으키자 선비들을 심문하는 추관(推官)에 임명되었으나 스스로 관직에서 물러났다. 1547년(명종 2) 윤원형 일당이 조작한 양재역벽서사건(良才驛壁書事件)에 무고하게 연루되어 강계로 유배되었고, 그 곳에서 많은 저술을 남긴 후 세상을 떠났다.이언적은 사화가 거듭되는 사림의 시련기에 살았던 선비로서, 을사사화 때는 좌찬성·판의금부사의 중요한 직책으로 사림과 권력층 간신 사이에서 억울한 사림의 희생을 막으려고 노력하다가 결국 사화의 희생물이 되고 말았다. 후에 이이(李珥)는 이언적이 을사사화에 곧은 말로 항거하며 절개를 지키지 못했다고 비판하였으나, 오히려 이언적은 불의와 타협하지 않으면서도 온건한 해결책을 추구하였던 인물이다
2. 도동서원(김굉필)
0. 일시: 2020. 3. 1. 13:10~
0. 위치: 대구광역시 달성군 구지면 도동리 35
도동서원은 조선 5현(五賢)으로 문묘에 종사된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을 향사한 서원으로 1568년(원조원년) 지방유림에서 현풍 비슬산 동쪽 기슭에 세워 쌍계서원(雙溪書院)이라 불렀는데 창건 5년 뒤인 1573년(선조6)에 같은 이름으로 사액되었으며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 그 후 1604년(선조37)에 지방의 사림들이 지금의 자리에 사우를 중건하여 보로동 서원(甫老洞書院)이라 불렀다. 이황은 김굉필을 두고 ‘동방도학지종(東方道學之宗)’이라고 칭송했다. 1607년(선조40) 도동서원(道東書院)이라 사액하였으며, 마을 이름도 도동리라 고쳐 불렀다. 도동서원은 대원군의 서원철폐 때에도 전국 서원 중 철폐 되지 않은 전국 47개 중요서원의 하나로 사림과 후손들의 두터운 보호 하에 지금에 이르고 있다.
# 도동서원 정문 안내문
# 세계문화유산 안내석
# 서원입구에 자리잡고 있는 400여년의 은행나무
# 도동서원 현판
# 환주문(喚主門)- 그 도(道)의 주인을 만나러 갈려면 환주문(喚主門)을 지나가야 한다. “주인을 부르는 문” 밖에서 문안에 있는 주인을 부르는 문일 수도 있고, 내가 주인이라 내 마음속의 주인을 부르는 소리 일수도 있다. 갓을 쓴 유생이라면 고개를 숙여야 들어설 수 있는 낮고 좁은 작은 문은 사모지붕 위에 절병통이 얹혀 있어 소박하고도 귀여운 매력을 물씬 풍긴다. 문턱이 없는 대신 돌에 꽃 봉우리을 조각하여 놓은 정지석은 아래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을 잡아두기에 충분하다.
# 수월루-수월루는 도동 서원의 정문으로 1855년에 건립되었으나 1888년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1973년에 복원하였다. 정문이면서 누문식으로 되어 있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중층 누각 건물로 서원 내에서는 유일한 팔작 지붕이다. 수월루의 이름은 누각에 앉아 낙동강을 바라보면 강물에 뜬 달이 아름답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 한훤당 김굉필의 500주기 기념비-김굉필의 유적비 주) 참고
# 다림재위에서 본 도동서원과 낙동강-낙동강 잔차길중 제일 넘기가 힘들다는 다림재
# 한훤당 김굉필의 시-노방송 시비 앞
주)김굉필(金宏弼, 1454년 ~ 1504년 10월 7일)은 조선 전기의 문인, 교육자, 성리학자, 화가로 호(號)는 한훤당(寒暄堂)·사옹(蓑翁), 또는 한훤(寒暄), 말곡(末谷)이며 자(字)는 대유(大猷),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점필재 김종직의 제자로 김일손, 김전, 남곤, 정여창 등과 동문이었다. 《소학》에 심취하여 스스로 '소학동자'라 칭하였고, 《소학》의 가르침대로 생활하였다. 1472년(성종 3년) 19세 때 경상도 합천군 야로 말곡 남교동(현 경남 합천군 가야면 대전리 남교마을)에 사는 순천 박씨(朴氏) 가문으로 장가들었다. 처가 주변 개천 건너 지동(地東)이라 부르는 작은 바위 아래에 조그마한 서재를 짓고 한훤당(寒暄堂)이라는 당호를 붙였다. 이후 김굉필은 한훤당을 자신의 호로 삼았다. 김종직의 문하에서 수학하다가 1480년(성종 11) 식년과 생원시와 초시에 합격하고, 다시 성균관에 들어가 유생으로 수학하였다. 1494년(성종 25년) 훈구파 출신 경상도관찰사 이극균(李克均)에 의해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출사하여 합천(陜川) 일민(逸民)으로 주부(主簿), 사헌부감찰, 형조좌랑 등을 지냈다. 1498년 무오사화가 일어나자 연좌되어 평안도 희천에 유배되었는데, 그곳에서 지방관으로 부임한 조원강의 아들 조광조(趙光祖)를 만나 학문을 전수하였다. 순천군으로 이배되어 1504년 갑자사화1 로 시장에서 사형되었다. 중종 반정 후 복권되어 승정원도승지에 추증되고, 1517년 증 우의정, 1575년 증 영의정에 거듭 추증되었다. 그는 1484년 10월 스승 김종직이 이조참판이 된 뒤에도 훈구파에 대해 간하지 않자, 이를 계기로 풍자시를 지었다가 김종직과 결별하게 되었다. 그 자신도 조광조·이장곤·주계정 이심원·김안국·이연경 등의 제자들을 배출했으며, 김종직 사후 사림의 영수로 추대되었다. 김굉필의 문인들과 이들의 학통은 후대에 가서 조광조, 백인걸의 학통과 함께 기호 사림파를 거쳐 서인학파를 이루게 되었다. 《소학》을 행동의 근간으로 삼아 《소학》을 알지 못하고는 사서육경을 알 수 없다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본관은 서흥(瑞興)이며, 한성부 정릉동에서 태어났다. 문묘에 종사된 동방5현 중의 한 사람이다. 갑자사화는 무오사화로 사림파가 큰 타격을 입은 상태에서 연산군이 훈구파까지 제거한 사건이었다. 갑자사화: 계기는 연산군 생모인 윤씨의 복위문제였다. 성종은 성종비 윤씨가 질투가 심하고 왕비의 체모에 벗어난 행동을 많이 하자 1479년 폐비하고 사사했다. 임사홍의 밀고로 이 사실을 알게 된 연산군은 이와 관련된 성종의 후궁인 엄숙의·정숙의를 죽이고 그의 아들 안양군과 봉안군도 귀양을 보내 사사했다. 또한 윤씨를 왕비로 추존하고 성종묘에 배사했다. 이어 연산군은 자기를 견제하는 훈구파와 사림파를 제거하려 획책하였고 폐위 사건 당시 이에 찬성한 자들을 찾아 제거했다. 폭력적인 사화 이후 연산군은 권력을 독점하게 되었으나, 연산군의 방탕한 행위와 폭정의 피해가 심해지자 훈구와 사림의 반격으로 연산군은 폐위되었다.
3. 남계서원(정여창)
0. 일시: 2021. 11. 28.(일)
0. 위치: 경남 함양군 수동면 원평리 586-1(남계서원길 8-11)
함양 남계서원(咸陽 灆溪書院)은 문헌공 일두 정여창(文獻公)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경상남도 함양군 수동면 원평리에 건립한 서원이다. 2009년 5월 26일 사적 제499호에 지정되고, 2019년 7월 10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남계서원은 조선시대 두 번째로 세워진 사액서원으로 문헌공 정여창(文獻公 鄭汝昌)의 학덕을 기리고 그를 추모하기 위하여 고을 유생 개암 강익(姜翼)을 중심으로 30여 명의 선비들 공의로 1552년(명종 7) 남계(藍溪)에 건립하였다. 1566년(명종 21년)에 남계(藍溪)라는 사액을 받아 사액 서원으로 승격되었으나, 1597년(선조 30년) 정유재란으로 소실되었다.그 후 1603년에 나촌으로 옮겨 복원하였다가 1612년 옛터인 현재의 위치에 중건하였다. 그 뒤 숙종 때 강익(姜翼)과 정온(鄭蘊)을 추가 배향하였으며, 별사에 유호인(兪好仁)과 정홍서(鄭弘緖)를 배향하였다가 1868년에 별사를 훼철하였다.이 서원은 소수서원에 이어 두 번째로 창건되었으며, 고종 5년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 때 훼철되지 않고 존속한 47개 서원 중의 하나로 선현 배향과 지방 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왔다.
* 정여창(1450~1504) 조선 전기 문신이자 5현 중의 한 사람인 일두 정여창의 문집을 새긴 책판이다.정여창은 김굉필과 김종직의 문인으로 무오사화 때 종성으로 유배되었다. 그리고 갑자사화 때에는 부관참시(部灌斬屍:죽은 시체에 형을 가함)를 당하였다. 정여창은 당시 성리학의 대가로 경사(經史)에 통달했으며 역행실천을 통해 많은 독서를 했으나 사화 때문에 저술이 거의 전하지 못하고 있다. 다만 얼마되지 않은 유집만 전할 뿐이다.이 문집은 정구(鄭逑)와 정여창의 증손자 정수민이 함께 수집·검수한 것을 인조 13년(1635)에 처음 발행하였다. 이어 영조 19년(1743)에 도암 이재(李縡)가 초간본에 누락된 것을 보완, 편집하여 유집(遺集) 3권으로 발행하였다. 그 후 1919년에 남계서원에서 다시 정여창의 시문과 사우록, 그리고 정여창의 후손 정환주가 수집한 것을 모아 속집으로 부록을 포함 4권으로 발간하였다.따라서 이 문집은 유집 3권, 속집 4권으로 되어 있으며, 현재 책판은 남계서원 장판각에 보관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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