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2. 11. 22:58ㆍ대한민국 山/서울경기
如 犀 角 獨 步 行
>>>청계산(서울) 나들이<<<
0. 일시: 2023. 2. 11.(토) 09:58 ~ 13:58 (4시간00분) *드림산악회/ 133/136대명산
0. 코스: 주차장-옥녀봉-매바위-매봉(청계산)-석기봉-3거리-이수봉-국사봉-하오고개
0. 거리: 13.5km [* 휴대폰 파손으로 사진이 전부 저 세상으로 갔음.]
대한민국 청계산 4개중 3번째 오른다. 그러고 보니 136대명산 중 133번째 등반이다. 청계산이란 이름을 가지고 있는 곳은 서울,포천,양평 그리고 상주에도 있는듯하다. 포천은 한북정맥때 양평은 한강기맥때 오른적이 있다. 몇 해전부터 등정하기로 마음 먹었지만 이런 저런 전차로 실행하지 못하고 미루지기를 반복하다 오늘에서야 서울 청계산에 오르게 되었다. 들머리인 서울 서초구 추모공원 터미널에서 시작하지만 산로는 얼어서 미끄럽기도하고 일부는 녹아서 질퍽질퍽한 봄산행 같기도하다. 우리가 올라가는 시간에 벌써 많은 산꾼들이 하산을 하고 있다. 수도권 주변이고 동네 뒷산이라 산꾼들이 엄청 붐빈다. 안양,과천 등지에서도 가족단위 산꾼들이 많이 보인다. 여러 봉우리를 지나면서 주변 산꾼들에게 한장의 흔적도 부탁하면서 산행을 마무리한다. 집에 오는길에 주차한 주차장에서 등산 장비를 챙겨 집으로 향하는데 갑자기 휴대폰이 없어저서 차를 세워 놓고 찾았지만 없어 주차장엘 다시 가서 찾아봐도 없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드렁크를 열고 신발이랑 스틱을 정리하면서 휴대폰은 차량 천장위에 놓아 둔게 패착이었다. 바삐 집으로 온다는 마음으로 미처 폰을 챙기지를 못해서 이런 불상사가 발생되었다. 난감하지만 집으로 돌아와서 카드 분실신고부터하고 아들에게 애기를 하니 구글에 들어가서 위치 검색해보니 동대구로 주변의 도로위에 있다는게 나타나서 내자랑 후레쉬를 들고 찾으러 나선다. 대로변엔 차량들이 손쌀같이 내달린다. 신호가 보행통행으로 변경을 기다렸다가 불을 켜고 찾아보니 휴대폰은 박살이 난 상태로 바닥에 뒹글고 있었다. 잠시의 실수가 커다란 문제를 발생되니 답답해진다. 다행히도 전화신호 등 기기는이상이 없는듯하지만 액정이 파손되어 식물상태로 폰의 기능을 할 수가 없다. 인터넷의 발전으로 위치추적까지 가능하니 좋은 세상인것만은 분명하다. 그렇지 않으면 완전히 포기했을건데.....인생의 커다란 공부를 한 셈으로 치고 깊게 하루를 생각해보게한다. 마음을 정리하고 낼엔 새로운 폰을 구입해야만 할것 같다. 휴 하루가 엄청 바쁘게 지난다.ㅎㅎㅎ(파손된 폰의 사진이 복구가 되지 않아서 겨우 남은 사진은 달랑 2장뿐)
# 한장에 담기- 친구들에게 톡으로 보낸 사진을 재 송신받은 사진으로 이것도 없으면 사진이 없을뿐했다.ㅎㅎㅎ
- 옥녀봉,정상(매봉),이수봉,돌문바위,매바위,국사봉 사진들
# 유일무일한 청계산 정상 사진 ㅎㅎㅎ
# 돌문바위-3바퀴돌면 복이 온다는데....과연~~
# 옥녀봉 정상(375m)
# 이수봉(545m)- 조선 연산군떄의 학자 주1)정여창선생(1450~1504)이 무오사화의 변고를 예고하고 이 산에서 은거하며 생명의 위기를 2번이나 넘겼다하여 후학인 정후선생이 이수봉이라고 지었다고 각인되어 있다.하지만 죽은지 4개월후인 10월에 갑자사화로 부관참시를 당했지만 중종때 원복되었다고 전한다.
# 국사봉(540m)-고려가 멸망하고 조선이 세워지자 청계산에 은거하던 조윤이 멸망한 나라를 생각한곳이라하여 지어진 이름이라고 한다.
주1) 정여창(1450~1504)과 남계서원-첫 번째 사화인 무오사화(1498)가 발생하여 김종직 문하의 사림파에 대한 대대적인 살육전과 숙청이 시작되면서,김일손이 졸지에 함양 청계정사에서 압송될 때 함께 있다가 연이어 압송된 인물이 김일손의 정신적인 벗 일두 정여창(一蠹 鄭汝昌:1450~1504)이다. 정여창은 다행히 참형은 면했지만 고향 함양은 말할 것도 없고 한양에서도 머나먼 두만강변 함경도 종성으로 유배를 당하였다. 유배지에서 홀로 제자들을 가르치며 학문에 전념하다가 6년의 오랜 유배생활 끝에 병을 얻어 1504년 4월 객지에서 사망하고 만다. 친구와 제자들이 2개월 동안 운구하여 함양 승안산에 장례를 지냈으나, 4개월도 지나지 않은 그해 10월에 두 번째 사화인 갑자사화(1504)가 발생하자 부관참시의 형을 받아 묘가 파헤쳐지고 시신이 훼손당하는 능욕을 당하여 무오갑자 양 사화에 걸쳐 화를 입었던 것이다. 극악무도의 극치를 달리던 연산군 10년에 발생한 갑자사화는 훈구파와 사림파의 대결이라기 보다는 폐비윤씨 사건의 전모를 알아챈 연산군의 광기에 의한 신하들의 몰살에 가까운 숙청사건으로써 그 와중에도 세력을 키우려던 임사홍 등 간신배들의 농간으로 사림파뿐만 아니라 부관참시 당한 한명회를 비롯한 훈구파들까지 화를 입게 되었다.사림파들의 피해로서는 무오사화 때 간신히 사형은 면하고 유배를 당해 귀양살이를 하고 있던 김굉필 등은 모두 사형에 처해지고, 이미 사망한 정여창 남효온 등은 부관참시를 당했는데 이때 사형과 부관참시된 인원만 백여명에 이르렀다. 연산군의 광기를 보여주는 갑오사화의 처참한 현장인 정여창의 묘가 함양읍에서 멀지 않은 함양 수동면 승안산 자락에 그때의 참화는 잊은 듯 조선시대 사대부 분묘의 품격을 보여주고 있다.
정여창선생은 1504년 역적으로 몰려 부관참시 당하고 난 후 다행스럽게도 2년 뒤인 1506년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이 퇴위되자 사화의 희생자들은 신원되었으며, 50년이 지난 1552년 정여창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제자들이 남계서원을 세워 지금까지 정여창을 배향하고 있다. 1566년 조선시대 성리학의 정통성을 인정받아 국가에서 공인하고 지원하였던 사액서원(賜額書院:국가에서 공인한다는 뜻으로 서원의 편액을 내렸다는 뜻이며 편액의 관지에 賜額이라 되어 있다.)이 되었으며,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도 훼철되지 않은 주요 47개 서원에 포함되어 지금까지 남아 있는 서원으로서는 1543년에 세워진 풍기의 소수서원 다음으로 오래된 사액서원이다. 소수서원은 최초로 세운 서원인 탓에 건물 배치에 일정한 형식을 갖추지 못한 것과 달리 남계서원은 서원의 제향공간은 뒤쪽으로 강학공간은 서원 영역의 앞쪽으로 배치되는 조선시대 서원건축의 초기 체계를 갖춘 대표적인 서원으로서, 이후에 창건된 대부분 서원들이 이를 따르고 있다.남계서원이 풍기는 조선시대 장엄한 서원미의 정수를 맛보려면 아무 생각 없이 남계서원의 외삼문인 풍영루(風咏樓) 위풍에 빨려 달려가지 말고, 멀찌감치 도로에서 잠시 내려 그윽하게 조망부터 할 것을 권한다. 구릉을 이루는 지형의 가벼운 경사를 타고 배치된 전경이 한눈에 들어오면서 성리학이 지배했던 조선시대 서원과 선비들의 권위를 느낄 수 있다.그리하여 풍영루 앞으로 다가가면 치열하게 하늘의 뜻을 깨치며 세풍에 맞섰던 선비들의 기개와 아울러 음풍농월(吟風弄月:자연 속에서 시나 문장을 읊조리는 일로써 조선조 사대부 문화의 취향)을 즐기던 여유로운 선비들의 격조 높은 풍류를 맛볼 수 있을 것이다.(펀글) 참고로 남계서원은 유네스코 9서원중의 하나로 관리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