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카즈베기 산(해발 5.033) 자락의 성 삼위일체 교회를 찾아서

2016. 12. 9. 11:40지맥산행/아름다운 가볼곳(해외)

 

 

 

 

 

 

 

 

 

 

 

 

 

 

 

 

 

 

 

 

  카즈베기 산 중턱에 위치한 (쯔민다 사메바) 교회를 다녀오기 위해서 이번 여행중에 처음으로 (여행사 당일 투어)를 택했다.

  현지인들은 쯔민다 사메바 교회가 있는 지역이름이 게르게티 지역이기에 (게르게티 성당) 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결과적으로,  카즈베기 마을에서 하루나 이틀을 묶으면서 트래킹을 할것이라면 개별적 여행방문을 권하겠으나,  여행일정이 다소 촉박하거나 굳이 당일 투어를 계획하고 있다면 여행사 투어상품을 이용할것을 권하고 싶다.

  시간적 자유로움 없이 서둘러 카즈베기를 다녀오겠다는 생각은 다소 무리가 따르고 얼마든지 변수가 등장할 수 있기때문이다.

  다음에 다시 카즈베기를 간다하더라도 나는 여행사 투어를 할 생각이다.  힘들게 찾아가서 이삼일을 머무는 것은 (스바네티 여행)쯤이라면 기꺼이 그렇게 하겠지만.........

  호텔을 나와 여행사로 갔다.

  투어버스는 10시 정각에 메테히 다리 위에서 출발한다.

  투어버스는 미니버스로 국내에서는 보지못했던 최신형 벤츠사 모델이었다.  유명 연예인이나 아이돌들이 전국투어에서 타는 그런 멋진 미니버스였다.  속으로 '이런거 하나 가지고 세계여행 했으면' 싶다.

  12명을 태운 버스가 출발했다.  약 9시간의 여정이다.

 

  버스가 트빌리시를 벗어나 외곽지역을 달리기 시작하면서 또다시 가슴이 알싸하게 저며오기 시작한다.

  도심에서 불과 몇 킬로미터 벗어났을 뿐인데 어쩌면 이렇게 다를 수 있단 말인가?

  천당과 지옥이라는 표현까지는 아니다 싶지만  달라도 너무 다르다.

  트빌리시나 시그나기 므츠헤타등 몇몇의 도심은 분명 2016년을 살아가고 있는데,  그 외 지역인 대략 전 국토의 80% 정도 이상은 1970년대 중반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모습으로 보인다.

  소비에트연방의 붕괴는 이들에게 자유를 주었지만, 그 댓가로 이들은 자본주의의 절대적 빈곤국으로 추락했다. 

  이를 어떻게 더 잘 설명할 수 있을까?  막연한 아픔들이 그저 스산한 바람결 처럼 아픔으로 스며들고 있을 뿐이다.

  (구)소련의 몰락으로 독립한 CIS(독립국가 연합)의 모든 나라들은 저마다 자유를 외쳐댔고, 그 자유의 실현이 곧 자본주의의 속성인 자유시장경제라고 믿었다. 너 나 할것 없이 자유시장경제를 급속하게 추진했다.  이는 곧 막대한 외국자본 유치에 총력전을 벌이는 결과를 초래했다.

  그러나 흔한 말로 (외국자본)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외국자본)이란 자본주의의 피를 빨아먹고 사는 늑대이자 하이에나가 아닌가.

  그들에게 선심이란 없다.  공짜란 없다.  오로지 돈놀이에만 혈안인 집단인 것이다.  너무도 뻔한 결과만 뒤따를 뿐이었다.

  미래에 대한 확실한 비젼이나 체계적인 개혁 개발의 마스터 플랜 없이 무조건 자본만 끌어오면 하루아침에 국가의 가치와 개인의 경제적 행복이 뒤따를 것이라는 환상의 결과는 참혹했다.

  거기에 (구)소련에 빌붙어 조국 조지아를 핍박하던 일부 사람들이 기득권을 차고 상층부에 들어앉아 나라를 조각내기 시작했다.

  이들은 외국자본을 끌어들이는데 앞장서며 그들에게 커미션을 받아 챙겼고,   외국자본이 눈독을 들이는 모든 국유재산을 팔아 넘겼고, 외국자본의  이권사업에 앞장서서 길을 열어주었다.  그 댓가로 엄청난 부를 챙겨서 올리가르히(과두제 재벌) 이라는 신흥 지배 계급으로 등장했다.

  그 결과가 바로 지금 내 눈앞에 펼쳐져 있는 현재의 모습인 것이다.

  독립과 자유를 위해 수많은 생명을 받쳐야만 했다.

  그리고 혁명으로 또다시 정권은 바뀌었지만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정권의 이름만 바뀌었을 뿐,  부정과 부패는 여전했다.

  이런 결과를 위해 그 많은 생명들이 혁명의 깃발아래 피를 흘리진 않았을 것이다.

  그들이 가슴에 품었던 혁명의 본질은 결단코 이런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30여분쯤 달렸을까.

  터키의 카스지역에서 발원한 므츠바리강이 코카서스 산맥에서 시작된 아라그비 강과 합류하는 두물머리가 나타난다.

  그 합류지역인 두물머리에 들어선 고즈넉한 전원도시 모습의 므츠헤타가 눈에 들어온다.   므츠헤타는 수도가 트빌리시로 옮겨가기 전까지 조지아의 수도였다.  평온하고 아름답고 옛 유적이 많은 도시로 유명하다.

  그리고 아라그비 강의 건너편 언덕, 지금 차가 달리고 있는 도로의 바로 오른쪽 언덕 위로 커다랗고 멋진 위용의 교회가 모습을 드러냈다.

  즈바리 수도원이다.

  조지아라는 한 나라의 기원과 깊은 연관이 있다고도 할 수 있는, 그만큼 역사와 유래가 깊은 사실상 조지아 최고의 수도원이 바로 즈바리 수도원이다.  아마 우리나라의미로 치자면,  어디까지나 내 개인적 소견으로 (조지아 국보 1호)가 아닐까 싶다.

  즈바리 수도원의 (즈바리)는 '포도나무'란 뜻이다.

 

  4세기 초,  아르메니아 영역이었던 카파도키아 지역(현 터키)에 (니노)라는 처녀가 살고 있었는데,  어느날 꿈에 성모 마리아가 현몽했다.

  성모 마리아는 니노에게 북쪽지방으로가서 복음을 전할것을 권하면서 포도나무로 만든 십자가를 니노에게 주었다고 한다. 바로 성물로 대접받고 있는 (니노의 십자가)가 탄생한 것이다.

  다른 이야기로는, 성모 마리아의 계시를 받는 니노는 먼길을 걸어서 바로 이곳 므츠헤타 산언덕에 도착했다.  이자리에는 원레 파간 사원이 있었다.  이 파간 사원을 거쳐로 삼은 니노는 카파도키아를 떠나면서 가지고 온 포도나무를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옭아매어 십자가를 만든 후, 사원의 안쪽 벽에 세워놓고 기도를 시작했다고 한다.  역시 (니노 십자가)의 탄생이었다.

  아무튼,  이곳  파간 사원에 (성 니노)가 복음을 전파하고자 찾아오면서 조지아의 기독교 역사는 시작되었다.

  포도나무는 중심이 있는 반듯반듯한 나무가 아니다.  굽고 휘고 뒤틀린 나무이다.  이런 굽고 뒤틀린 나뭇가지로 십자가를 만들기는 결코 쉬운일이 아닐것이다.  하지만 니노는 굳이 포도나무로 십자가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 유래로 부터 조지아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포도산지이자 와인 생산국이다.

  이 순간에도 세계 각지에서 (니노의 십자가)를 찾는 기독교인들과 여행객들의 행렬이 끊이지를 않는다.  니노의 십자가는 기적을 행하는 것으로도 유명하기 때문이다.  이 기적의 이야기로 유명해져 버린 니노의 십자가는 그 후  아르메니아와 다시 조지아로, 그리고 러시아 등지를 떠돌다가 마침내 조지아 트빌리시의 시오니 성당에 안치되었다.    니노의 십자가가 처음 세워졌던 파간 사원 자리에는 바로 지금의 즈바리 성당이 들어섰으며, 그 처음의 자리에는 작은 미니어쳐가 놓여있다.

  하지만 내가 시오니 성당을 찾았을 때는 행사로 인해 민간인 접견이 불허된 상태라 볼 수가 없었다.

 

 

  즈바리 성당의 모습이 차창밖으로 올려다 보인다.

  아쉽다.

  너무도 안타깝다.

  14일 이라면 결코 짧지만은 않은 여정일 터인데  어느새 훌쩍 지나가고  지금 내게 허락되는 시간이 너무도 부족했다.

  므츠헤타도 즈바리 성당도 이렇게 처음 트빌리시에 이 길을 통해 들어오던 날 처럼 차 창을 통해 내다볼 수밖에 없었기에 말이다.

  이번 여행에서 들려 볼 수 없는 안타까운 코스에 그것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중세시대의 생활 면면을 가깝게 느껴 볼 수 있는 탑들로 가득찬 스바네티 지역의 메스티아와 우쉬굴리,  아름다운 동굴 수도원 데이빗 가레자,  고대인들이 실제 생활했던  웁리수치게 동굴유적지와 고리, 광천수로 유명한 보르조미 등을 포기해야만 했다.

  다음에 다시 코카서스 지역을 여행하게 된다면 최소한 20일(3주) 이상은 잡아야만 하겠다.  1주일 동안 조지아의 못돌아본 지역을 돌아보고, 2주는 아르메니아 에레반에 머물면서 폼나게 쉬어야 하겠다.

 

 

 

 

 

 

 

 

 

 

 

 

 

 

 

 

 

 

 

 

 

 

 

  험준한 산악지형이 나타나면서  19세기에 러시아군인들이 만든 산악도로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얼핏 충주호 사진이라고 해도 믿을만큼 닮은 풍경의 산중호수도 보인다.  이것도 댐 건설로 만들어진 것이다.

  유목민들이나 겨우 오고가던 이 험준안 산악재대에 어느날 도로가 뚫리면서 재정러시아의 군대가 들이닥쳤다.  코카서스 3국은 이내 재정러시아의 식민지로 전락했다.  그리고 이 길 위로 석유와 밀과 와인과 옥수수와 채소와 가축들이 징발되어 실려 올라갔다.

  오랜세월이 지나  고르바쵸프의 페레스트로이카도 이 길을 따라 전해 내려왔고, 그 덕분으로 자유와 독립을 얻기도 했다.

  지나친 러시아의 내정간섭에 항의하다가 2008년에 전쟁이 벌어졌고  조지아는 참패했다.  러시아의 괴씸죄 징벌을 받아 현재 이 도로는 러시아와의 국경에서 완전 차단되어있다.  교역에 있어서 절대적 부분을 차지하던 러시아와의 단절로 지금 조지아는 상상조차 하기힘든 재정적 위기에 직면하게 되있다.

  실로 역사적 애환의 군사도로인 것이다. 

  해발 3000m의 깍아지른 고개를 넘어가는 험준안 산악도로이다.(백두산 꼭대기를 차를 타고 올라가는 것 보다도 높다)

  그렇게 산악지형의 특징적인 풍광들이 시작되는 즈음에 만나게 되는 성채 같은 교회 하나,  아니다 성채는 하나이나 교회는 둘이다.  발 아래로 드넓은 호수를 양탄자처럼 깔고 서 있는.

  바로 아나누리 교회이다.

 

 

  아나누리는 13세기경 이 일대를 다스리던 아라그비 왕조가 아라그비 강변위에 세운 성채였다.  작고 견고한 이 성채는 높은 성벽과 망루, 그리고 두 개의 교회가 들어서 있으며 비교적 현재까지도 잘 보존되어 있는 유적이라 하겠다.

 

 

 

 

 

 

 

 

 

 

 

 

 

 

 

 

 

 

 

 

 

 

 

 

 

  아나누리는 전형적인 조지아의 시골풍경을 그대로 여실히 잘 보여주고 있다.

  마을도 성당도 주변 경치도 매우 아름답다.

  조지아라는 국가가 가지고 있는 경제적인 문제만 아니라면 참으로 소박하고 행복해 보이는 정겨운 시골마을이 아닐 수 없어보였다.

  그리고.....

  여기 아나누리 교회를 둘러보면서 아주 인상적인 그림(벽화) 하나를 보았다.

  수많은 벽화중에 그다지 눈에 뜨일 정도로 빼어난 작품은 절대 아니었지만,  적어도 나에게는 그 내용으로 인하여 상당히 충격적인 그림으로 받아들여졌다.

 

  코카서스 3국 중에서 조지아와 아르메니아를 여행하면서 듣고 느낀 바에 의하면........  여기 사는 사람들에게는 자국의 영웅이나 위인들을 떠나서,  세계사적으로 커다란 감명을 받았고 존경하는 인물이 딱 두명이 있었다.  조지아와 아르메니아 민족이 그들 두 명의 낯선 이방국의 영웅들을 칭송하고 찬양하며 무한한 존경을 표하는 것을 여러번 보았다.

  한 명은 (마르코 폴로) 이다.

  이탈리아를 떠나 터키를 지나 마르코 폴로는 여기 조지아를 거쳐 아르메니아를 지나고 이란을 거쳐서 몽고에 들어갔다.  파미르 고원을 돌아 사막을 지나 실크로드를 따라 여행을 하였으며,  그 여행기로 (동방견문록)을 남겼다.

  트빌리시에서 예레반으로 가는 길에서나,  예레반에서 트빌리시로 돌아오는 길 모두에서 여러 사람들이 '이 길이 먼 옛날 마르코 폴로가 걸어서 여행하던 바로 그 길'이라고 하는 소리를 많이 들었다.

  그리고 다른 한 사람은 바로..........

 

 

 

 

 

 

 

 

 

  나는 묻고 싶다. 

  아나누리 교회 벽에 붙어있는 이 그림을 보면 누가 떠오르냐고.

  이 그림에서 붉은 옷을 걸친 사람은 누구일까?

  얼굴 뒤로 광배까지 있는 것으로 보아,  또 이 그림이 성스러운 교회당의 벽화로 걸려있다는 점으로 미루어  그림속의 주인공은 당연히 메시아(구세주)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구교와 신교를 통털어 구세주는 한 명이다.  오직 에수 뿐이다.

  그런데 그림속의 구세주는 우리가 익히 알고있는 구세주의 모습이 절대 아니다.

  그럼 그는 누구일까?

  이 그림은 초기 기독교회의 토속적 신앙관에 입각해 그린 성화(聖畵)중 하나이다.  어디까지나 내 소견이지만 말이다.

  초기 기독교시대에 있어서  그들이 기대했던 구세주의 모습을 상징으로 그린 그림으로 보인다.

  초기의 기독교도들은 (구세주)라는 절대적 신성한 존재가........ (예수)의 일생처럼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나 가업을 잇다가  깨달음을 얻고 부름을 받아 '죄사함과 영원한 삶'의 복음을 전파하다 순교하는 설교자 나루랭이 이기를 바라지는 절대 않았다는 반증이다.  그것은 다른 많은 문헌과 기록들로 보아도 사실이었다.

  초기 기독교인들이 바라던 진정한 (구세주)는 무한한 절대권력과 능력을 가지고 바람처럼 나타나서 한 순간에 이 세상의 모든 악을 근원적으로 일망타진 시켜고 온 세상의 가난하고 버림받은 자들을 영원히 구원해줄 그런 강력한 구세주를 갈망했던 것이다.  그것이 진실이었다.

  위의 그림이 그런 기독교인들의 간절한 바램을 벽화로 담아낸 초기 기독교인들의 순수한 마음이자 신앙의 표현이라고 나는 본다.

 

  예수의 시대에 앞서서 (구세주)로 형상화 될 정도의 막강한 무용을 자랑하면서 바람처럼 이 지역을 지나간 영웅이 누구인가?

  그림속의 모습은 전쟁터를 향해 내달리는 영웅의 모습이다.

  앞에도 뒤에도 군마가 달리고 있다.  붉은 옷차림의 영웅은 푸른 망토를 걸치고 오른손에 칼을 휘두르며 적진을 향해 달려나가고 있다.

  얼굴 뒤의 광배만 지운다면 이 그림은 성화(聖畵)가 아니라,  박물관에 걸려있을 어떤 영웅의 인물화 였을 것이다.

  나는 이 그림과 아주아주 비슷한 그림을 유럽의 여러 박물관에 전시된 그림들의 사진전집을 통해 많이 보아왔다.

  그가 누구일까?

  그는 바로 마케도니아 태생의 인류사적으로 영원한 영웅 (알렉산더)이다.

  이 그림의 작자는 알레산더 대왕의 영웅적 서사시에 힘입어 인류를 악에서 구원해 줄 강력한 (구세주)를 염원했던 것이다.

  당시의 사람들은 숱한 전설과 영웅담속에 전해 내려오는 영웅 알렉산더 같은 그런 위대한 구세주를 갈망했던 것이 사실이다.

  조지아나 아르메니아를 다니면서 숱한 전설과 무한한 존경을 여전히 알렉산더에게 바치고 있는 사람들을 보았다.

  마케도니아에서 시작해 그리스를 통일하고 터키 영토를 거쳐 조지아와 아르메니아의 드넓은 평원을 부는 바람처럼 스쳐지나가서는 마침내 세계최대강국 페르시아를 삽시간에 무너트린 진정한 영웅.  그 불멸의 성공담을 뒤로하고 또 바람처럼 세상을 떠난 영원한 영웅.......

 

   나는 위의 그림에서 예수가 아닌 알렉산더를 보았다.

 

 

 

 

 

  미니버스는 이제 본격적으로 험난한 산악도로를 달려오르기 시작했다.

  코카서스 산맥에는 만년설에 뒤덮힌 해발 5.000m 이상급의 산이 다섯이 있는데,  그 중 넷이 이지역에 분포되어 있다.  그리고 그 중에 하나인 카즈베기(해발 5.033m)를 향해 가고 있는 것이다.

  그리이스 시대 사람들은 여기 카즈베기를 세상의 끝이라고 여겼다.  그런 점으로 보자면 그 당시에 누군가가 이 멀고 먼 여기까지를 아테네 사람 중에 다녀갔다는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올림프스 산의 제우스가 자신의 비장한 능력중 하나로 생각하고 꽁꽁 숨겨 놓았던 불(火)을 프로메테우스가 몰래 훔쳐다가 인간에게 주었다.  인류사적인 최초의 혁명이었다고 할까?  음식을 익혀 먹게 되었고 난방을 하게 되었으며,  횃불을 밝혀 밤을 이용하게 되었고,  도자기를 굽게 되었다.  인류에게 있어 최초의 진정한 구원이었다.

  하지만 분노한 제우스는 프로메테우스에게 가혹한 징벌을 내렸다.  세상의 끝에 우뚝 서있는 만년설의 카즈베기 산 정상의 바위벼랑에 쇠살슬로 꽁꽁 묶인채, 낮이면 제우스가 보낸 독수리에게 심장을 뜯겨 먹히고,  밤이면 다시 말짱하게 심장이 자라나는......  그 같은 고통이 영원히 반복되는 형벌을 지금 찾아가는 카즈베기 산에서 받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면 지금도 프로메테우스가 징벌을 받고 있어서 망원경 들고 찾아가면 볼 수 있느냐?

  아니다.  인간에게는 보은(報恩)이라는 심성이 있지 않은가?

  신과 인간 사이에 태어난 헤라클레스가 이 이야기를 듣고는 카즈베기 산에 올라 활을 쏘아 제우스의 독수리를 쏘아 죽임으로서 프로메테우스를 그 영원한 형벌에서 해방시켜 주었다.  그래서 지금은 다시 하늘나라 어디에선가 잘 살고 있을 것이기에 만나볼 수가 없다.

 

 

 

 

 

 

 

 

 

 

 

 

 

      --- 소련이 석유를 빼앗아 가기 위해 이 험악한 산악지형의 도로를 따라 설치한 송유관.

 

 

 

 

 

 

 

 

 

 

 

 

 

 

 

 

 

 

 

 

 

 

 

 

 

  아나누리를 뒤로하고 본격적으로 조지아 군사도로(georgian military road)에 접어들자 길은 점점 경사가 급해져만 간다.  계곡 속으로 점점 파고들면서 끊임없이 주변의 여러 협곡들이 스치듯 지나간다.  마침내는 고개를 쳐들면 바로 머리 위의 깍아지릇듯한 천길 낭떠러지 위로 아슬아슬하게 지그재그로 구렁이 담넘어가듯이 벼랑길을 오른다.  변변한 가드레일도 없는 그야말로 천길 낭떠러지가 코 앞에 내려다보이는 죽음의 도로를  겨우겨우 올라가는데, 오가는 교통량이 장난이 아니라.  거기에다 한 수 더 떠서 대형트럭이며, 추레라를 한 대 더 달고 오는 컨테이너 트럭까지.......  한순간 한순간이 정말 아찔하다.  세상에 태어나서 이렇게 험한 도로는 처음 경험해 본다.

  그렇게 가파른 벼랑길을 겨우 올라왔는가 싶었더니.....  쨘 하고 펼쳐지는 대 평원 같은 고원지대.

  나무 한구루 없이 온통 드넓은 풀밭지대이다.  이곳의 지명이 (구다우리)라고 들었다.

  조지아 최고의 스키 리조트 지역이다.  소련연방을 통털어 아주 각광받던 겨울 휴양지였다 한다.  지금은 많이 쇠락한 모습이다.

  주변을 둘러보니 스키 슬로프 하나 길이가 최소한 4~5km씩은 될것 같다.  정말 와~~~~~~~~~

  '동계 스포츠는 이런데 사는 사람들이나 즐기는 거여.  눈도 제대로 안 오는 나라에서 동계올림픽은 무슨........?'

  눈이 엄청 내리는 지역이라는데 이 험악한 길을 겨울에 어떻게 다니지 하고 궁금해 하니, 기사 왈 '눈이 사람키 두배는 쌓이기에 굴을 파듯이 길만 내고 다닌단다.  하여 뒤로만 안미끄러지면 옆으로는 낭떠러지 걱정 안해도 된다'한다.  풍경이란것이 아예 없고 그냥 천장이 뻥 뚫린 터널을 마냥 달린다 생각하면 된단다.  그래도 미끄러지면 농촌 트랙터가 구제해 준다고 한다.  그러다가도 차량 한대가 미끄러져 막히면 하루고 이틀이고 도로가 완전 통제되는 것이기에......  우루루 죄 다 몰려들어 어찌어지하면서 살아간대나 어쩐대나.......

  사방으로 허연 쓰레기들이 나뒹굴고 있다고 생각되면 그것은 방목되고 있는 양떼이다.

  이 고갯마루 정상이 해발 3.000m 이니까,  구다우리 스키 리조트가 해발 2.700m 이상쯤 되겠다.  우리나라 백두산 정상 높이다.

  고개를 넘어 내리막 길에 들어섰다.

  오르는 길이나 내려가는 길이나 무척이나 인상적이고 아름답다.

  007 영화에서나 본드카로 로드액션을 보여줌직한 그런 멋진 도로풍경이다.  정말로 정말로 영화의 한 장면을 연상시키기에 충분하다.

  길고 긴 협곡을 따라 내려서니 마침내 평원이 나오고.....  드디어 마을이 모습을 드러냈다.

  게르게티에 도착을 했다.

  트빌리시를 떠난지 3시간반만에 208km 떨어진 게르게티 마을에 당도했다.

  멀리 하늘자락 옆으로 태양을 등진 (쯔민다 사메바 교회)가 카즈베기 산을 배경으로 마침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게르게티 마을은 해발 2.000m의 고지대에 위치한 산골마을이다.  그런데 3.000 미터급 험준한 산맥사이 고개를 넘어오다보니 그저 만만한 평원에 놓인 소박한 작은 마을쯤으로 느껴진다.  우리나라 한라산 보다도 높은곳에 위치해 있음에도.....

  마을 뒷산 위에 올려져 있는 것처럼 보이는 (성 삼위일체 교회)를 흔하게는 여기 게르게티 지역에 있는 교회라 해서 (게르게티 성당)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하지만 본래 이름은 (쯔민다 사메바 교회)가 맞다.

  (쯔민다)는 '성스러운'의 의미이고 (사메바)는 기독교 교리인 '삼위일체'를 의미한다.  그래서 합치면 (성 삼위일체)가 되는 것이다.

  아울러 트빌리시의 랜드마크인 (사메바 성당)의 경우도 우리식으로 치자면 (삼위일체 교회)라 부르는 것이 맞겠다 하겠다.

 

  애초엔 여기 게르게티 마을에 하루나 이틀 머물면서 한 두번쯤 성삼위일체 교회까지 트래킹을 할 생각이었다.  트래킹은 내 걸음걸이라면 대략 1시간30분쯤 걸리는 것으로 알고있다.  트래킹이 아니라면 주변에 늘어서 있는 사륜구동 차량이나 말을 타고 오르는 방법이 있다.  물론 비용 지불이 뒤따르겠지만 말이다.

  '모진 고생 끝에 겨우 이제사 여기까지 왔는데 서둘러 트래킹을 해볼까' 하고 망설이는데 아뿔싸.......  함께 온 일행중에 트래킹을 생각하는 사람이 단 한사람도 없다.  이러면 문제가 되는 것이다.  내가 굳이 자유여행을 고집하는 이유가 이런데 있다.

  내가 굳이 혼자 트래킹을 고집한다면........  나머지 일행이 지프를 이용해 다녀오는 것과 많은 시간차가 생겨날 것이고,  결국은 트빌리시로 돌아가는 일정이 조금 아니 많이 복잡해 질수 있다는 문제였다.  나의 권리는 있으나.....  다수의 불편을 초래하게 되는 것이다.

  최소한 한 너댓명의 트래킹부류가 생긴다면 기다려 달라 요청 하겠는데........ 

  어쩌 겠는가...... 

  지갑을 열고 10라리를 꺼낼 수 밖에.......

  오늘 당일투어 경비가 65라리(3만3천원 정도)였는데, 달랑 교회까지 태워주고 10라리(5천원)이라니 '도둑넘들'.......

 

  화사한 봄날 들꽃이 만발했거나.......

  가랑비 촉촉하게 내리는 포근한 날씨나......

  서늘한 바람이 부는 가을날씨가 아니라면.........  카즈베기에 가시거든 성삼위일체 교회에 가시는 길에 차량 이용을 권해드립니다.

  중간 중간에 가로지르는부분이 있기는 하지만,  수많은 차량이 꼬리를 물고 오르내리는 길을 먼지 뒤집어 쓰고 오르실 필요는 굳이 없잖아요?

  마지못해 선택한 차량 이용이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곧바로 실감했답니다.

  다니다 보면 걸어다닐데는 엄청 많은데,  게르게티 언덕길은 아닌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트래킹이 아니라 바가지 고생길이다.

 

 

 

 

 

 

 

 

 

 

 

 

 

 

 

 

 

 

 

 

 

 

 

 

 

 

 

 

 

 

 

 

 

 

 

 

 

 

 

 

 

 

 

  성삼위일체 교회에서 머문 시간은 그렇게 길지가 않았다.

  자유여행이었다면 마냥 더 머물고 싶었다.  정말로 정말로 아름다웠다.  그냥 남들처럼 풀밭에 드러누워 파란 하늘을 올려다 보면서, 카즈베기 산 머리를 휘감고 있는 하얀 구름이 벗겨지기를 기다리고 있다가 만년설이 선명한 풍광을 꼭 보고 싶기도 했다.  아니 하루쯤 머물면서 새벽에 트래킹으로 올라와서는 햇살에 서서히 어둠이 벗겨지는 카즈베기 산의 모습을 꼭 보고 싶었다.

  하지만 겨울을 연상시키는 쌀쌀한 바람이 몰아쳐 함께 온 일행의 발걸믐을 재촉하고 있었다.

  그렇게 그렇게 카즈베기와 아쉬운 작별을 고했다.

 

  돌아오는 길. 

  힘들게 고개를 다시 넘어서 구다우리 리조트 마을을 지나칠 즈음에 버스는 멈추어 섰다.

  가는 길에 확인은 했으나 카즈베기를 향해 내친 걸음이었기에 그냥 지나쳤던 구다우리 (러시아.조지아 우정의 기념비)를 보고자 주차장에 들어섰다. 

  열 두개의 반원 아치를 돌과 콘크리트를 이용해 쌓아올린 거대한 기념탑이다.  아니 작은 기념 광장이다.  넓은 반원 아치의 안쪽 벽변은 온통 모자이크 벽화가 다양하게  그려져 있다.  얼핏 보기에 조지아의 역사를 묘사한 것으로 보여진다.   여기 이 (러시아.조지아 우정의 기념비)는 역사적으로 몇차례 전쟁을 치른바 있는 두 나라가 화해와 우정의 마음을 담아 함께 만들었다고 하는데,  2008년에 또 전쟁을 치뤘고,  그 여파로 러시아에 의한 국경 봉쇄와 무역로 차단으로 또다시 식민국가가 아닌 식민국가 대접을 받는 조지아의 입장을 생각하니 비탄의 한숨이 저절로 새어 나온다.

  우정과 평화의 상징어야 할 기념비가 우울한 형식적인 콘크리트 덩어리로 느껴진다.

  공생 공존이란 것이 인간사에서는 그렇게 요원한 일이란 말인가?

 

 

 

 

 

 

 

 

 

 

 

 

 

 

 

 

 

 

 

 

 

 

 

 

 

 

 

 

 

  카즈베기 투어는  상당한 시간과 체력이 요구되는 여행이다.

  그런데 정말로 압권이다.  잊지못할 하루가 되었던것 같다.

  호텔로 돌아오니 제법 늦은 시간이다.

  마트표 저녁으로 간단하게 해결하고 휴식에 돌입한다.

  이제 트빌리시에서의 시간이 하루밖에 여유가 없다.  일단의 생각은 내일 낮에는 시그나기를 다녀올 생각이다.

  내일 자정이 지난 새벽 시간에 이스탄불로 가는 비행기편이 에약 되었는지라  내일 아침 호텔 체크아웃과 짐 보관 문제와 내일 밤을 어떻게 어디서 보내다가 공항으로 이동할 것인지에 대한 궁리도 이밤안으로 결정을 해야만 했다.

  벌.써.조.지.아.여.행.을.마.쳐.야.만.하.는.시.점.이.라.니.너.무.아.쉽.다.

  알 럽 조지아.

  알 럽 트빌리시.

  내일은 중세 성곽의 도시 (시그나기)로 간다.     피안재.

 

 

 

 

 

 

 

 

 

 

 

 

출처 : 피안으로 가는 길
글쓴이 : 피안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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