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사오적(친일파)

2017. 10. 31. 16:39역사속의 오늘

을사오적 (대한제국 친일파. 乙巳五賊)

1905(광무 9) 일제가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기 위해 강제로 체결한 을사조약에 찬성하여 승인한 5명의 대한제국 대신.

을사조약 체결 축하 기념촬영을 하는 일본군 장성 및 일본 공사관들. 출처 : 서문당

 

학부대신 이완용(李完用), 내부대신 이지용(李址鎔), 외부대신 박제순(朴齊純), 군부대신 이근택(李根澤), 농상공부대신 권중현(權重顯)을 가리킨다. 1905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제는 포츠머스 조약을 체결하면서 한국을 보호국화하기 위한 조치를 취했다. 같은 해 10월 일본의 총리대신 가쓰라[桂太郞], 주한공사 하야시[林權助], 외무대신 고무라[小村壽太郞]는 을사조약 체결을 모의하고, 119일 추밀원장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특파대사로 한국에 파견하여 고종에게 '한일협약안'을 제출하게 했다. 또 하야시는 조선주둔군사령관 하세가와[長谷川好道]와 협력하여 궁궐을 포위하고 고종을 감시하는 한편, 11월초 친일단체 일진회(一進會)로 하여금 보호국화 찬성의 선언을 발표하게 했다. 1114일 이토는 고종을 다시 알현하고 조약원문을 제시, 체결을 강요했고 다음날에는 대한제국의 각 대신들과 원로대신들을 숙소에 납치하여 조약체결을 강권했다. 1117일 이토와 하세가와는 일본군이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는 가운데 군신회의를 개최하게 하여, 회의는 오후 3~8시까지 열렸으나 조약거부로 결정이 났다. 이에 이토는 귀가하는 대신들을 위협하여 다시 강제로 회의를 열게 하여 대신 한 사람마다 조약체결 찬성 여부를 물었다. 주무대신으로 처음 지명된 박제순이 "만약 명령이 있다면 어쩔 수 없지 않은가"라고 하자, 이토는 "당신은 절대적으로 이 협약에 반대한다고는 볼 수 없다. 폐하의 명령만 내린다면 조인할 것으로 본다고 믿는다."고 못 박았다. 이후 회의는 이완용과 법부대신 이하영(李夏榮)이 대세를 장악하여 "조약의 체결을 거부하면 일본이 무력으로 한국을 침략할 것이므로 차라리 체면을 살리면서 들어주자"는 명분과 왕실의 안녕과 존엄은 유지할 수 있다는 조건을 들면서 조약 체결을 주장했다. 대신들 중 참정대신 한규설(韓圭卨), 탁지부대신 민영기(閔泳綺)만이 적극적으로 반대했으며, 나머지는 체결이 불가피함을 시인하는 쪽으로 기울었다.

그리하여 "박제순"과 일본특명전권공사 "하야시"간에 을사조약이 체결 되었다. 이에 을사조약 반대의 함성이 전국적으로 드높은 가운데, 이들 오적에 대한 응징 기도도 빈번했다. 기산도(奇山度구완희(具完喜) 등이 이근택을 암살하려 했고, 19073월 오기호(吳基鎬나인영(羅寅永) '을사오적 암살단'이 이들을 제거하려 했으나, 삼엄한 경비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1909년 서울 종현 성당에서 이재명(李在明)이 이완용을 암살하려 했으나, 부상만 입히고 말았다. 이들은 한일합병 후에 모두 친일의 대가로 '조선귀족령'에 따라 일제의 작위를 수여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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