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8. 23. 13:24ㆍ역사속의 오늘
47년 전 오늘, 실미도 684 특수부대가 청와대로 질주했다
오늘부터 47년 전인 1971년 8월 23일
'684 부대원'들, 무인도 탈출해 청와대로 향하던 중 서울 시내서 총격전 벌여
오늘부터 47년 전인 1971년 8월 23일
'684 부대원'들, 무인도 탈출해 청와대로 향하던 중 서울 시내서 총격전 벌여
[한겨레]
횟수로 벌써 4년째. 갈매기 울음소리만이 정적을 깨는 인천의 한 무인도에서 특수부대원들의 혹독한 훈련이 이어졌다. 이들의 훈련 목적은 단 한 가지, ‘북한 김일성 거처 습격’이었다. 대북 침투 공작을 위한 이 특수부대는 1968년 4월에 창설되었다는 점에서 ‘684부대’로 이름 붙여졌다.
23 일 실미도 탈출 군 특수범들 난동
- 공포에 질린 백주의 서울
오늘로부터 47년 전인 1971년 8월23일, 24명의 ‘684부대원’들은 수류탄과 칼빈 소총 등으로 무장한 뒤 시내버스를 탈취, 평양 주석궁이 아니라 서울 청와대로 향한다. 이들의 탈출로 전 군·경에 비상계엄령이 발동됐다. 한강 다리는 통제되고, 공항까지 폐쇄됐다. 겁에 질린 시민들로 서울시내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인천을 거쳐 서울 시내로 진입한 특수부대원들은 서울 영등포 일대에서 긴급 출동한 군·경과 총격전을 벌였다. 교전 끝에 14명은 자폭하고 4명이 피살, 6명은 부상을 입었다. 아울러 민간인 6명과 경찰관 2명도 추가로 희생됐다. 이후 부상을 입은 특수부대원 6명 가운데 2명은 치료 중 사망하고 남은 4명은 모두 사형에 처해졌다.
이른바 ‘실미도 탈출 사건’으로 불리는 이 일로 인해 많은 희생자가 발생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세기 동안 사건의 진상은 비밀에 부쳐져 왔다. 당시 박정희 정부는 사건을 은폐하기 위해 수사와 재판, 형 집행 과정에서 위법 행위를 저질렀고, 사형 집행 이후에도 주검 미인도 등의 불법 행위를 저질렀다. 과연 684 부대원들은 누구이며, 684 부대를 둘러싸고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걸까?
“박정희 모가지 따러 왔수다” 실미도 684 특수부대의 탄생
684 특수부대가 창설되기 3개월 전인 1968년 1월21일, 북한 무장공비 31명이 청와대를 습격하기 위해 서울로 침투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총 31명 중 투항한 김신조 단 한 사람만 살아남고, 도주한 2명을 제외한 나머지 28명은 모두 사살됐다. 이튿날 생중계로 진행한 ‘무장간첩 사살 및 북한의 만행’을 알리는 기자회견에서 김신조에게 침투 목적을 묻자 김신조는 “박정희 모가지 따러 왔수다”라고 밝혀 온 국민을 놀라게 했다.
이른바 ‘김신조 사건’을 계기로 박정희 정부는 북한에 보복할 목적으로 684 특수부대를 창설한다. 무장공비 수와 같은 31명의 민간인을 모집해 ‘김일성 거처 습격’ 등의 임무를 부여했다. 당시 김형욱 중앙정보부장(현 국가정보원)은 1984년 육성 회고록인 ‘혁명과 우상’에서 “684 부대는 박정희의 재가를 받아 내가 만들었다”고 밝혔다.
아울러 2005년 국방부의 ‘실미도 진상 조사 TF’를 통해서 684 부대는 중앙정보부가 창설했고, 공군이 관리했다는 사실이 공식적으로 확인됐다. (국가정보원의 ‘특수공작지시’ 1968.3.7.중해아450호, ‘특수공작 기본계획서’ 1968.3.28.) 이런 사실은 당시 684 부대의 창설부터 관리까지 정부가 주도했음을 뒷받침하는 것이었다.
“6개월만 참으면 호강시켜 준다”
중앙정보부는 684 특수부대원 모집 당시 북파 공작 임무의 위험성과 공작원 신분 등에 대해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았다. 게다가 모집 조건으로 제시했던 양질의 급식과 장교 후보생 수준의 보수는 초기 3개월만 지켜졌다. 이후 부대원들은 보수를 전혀 지급받지 못한 것은 물론, 형편없는 급식에 서신 왕래와 휴가, 외출, 외박 등 기본권이 모조리 박탈당했다.
이런 상황에서 고된 훈련을 견디지 못한 이탈자가 살해당하는 일까지 일어났다. 첫 번째 사망은 훈련 시작 3개월여 뒤인 1968년 7월 발생했다. 이부웅씨와 신현준씨는 당시 부대 지도부 지시에 의해 몽둥이를 동원한 동료들의 구타로 살해됐다.
2005년 국방부의 ‘군 과거사 진상 규명위’ 발표에 의하면 7명의 부대원들이 훈련 중 사망한 것으로 밝혀졌다. 이들은 합법적인 절차 없이 명령을 받은 동료에 의해 살해됐고, 부대 지도부는 ‘도주 사망’으로 상부에 보고했다. 중앙정보부와 공군 상급부대는 진상조사를 하지 않고 은폐함으로써 사실상 불법 살해 행위를 묵인·방조했다. 이후 부대 지도부 지시에 의해 동료들에 의한 살해는 계속됐다. 하지만 살해된 가족에게는 사망 사실 고지와 주검 인도를 하지 않고 임의로 화장 처리했다.
“6개월만 참으면 호강시켜 준다”는 말에 자원한 22살~35살의 청년들은 혹독한 지옥훈련을 받으면서도 당초 약속했던 처우는커녕 되레 비인간적인 대우를 견뎌야 했다.
‘잊힌 존재’가 되다
부대원들의 처우와는 별개로 생사를 오가는 혹독한 훈련은 계속됐다. 무인도 격리 수용은 어느덧 해를 넘겨 3년을 지나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 “3개월 안에 북한 124부대를 능가하는 부대를 만든다”는 목표도 희미해져갔다. 1971년부터 남북 화해 분위기가 조성됐기 때문이었다. 남북 대화가 열리게 되면서 대북 보복 전략도 계획 단계에서 중단됐다.
문제는 무인도에 격리 수용된 특수부대원들이었다. 당시 박정희 정부는 이들에 대한 대책을 세우지 않은 채 방치했다. 이에 불만이 폭발한 부대원들은 1971년 8월 23일, 마침내 무인도를 탈출한 것이다.
‘실미도 탈출 사건’ 당시 박정희 정부는 사건의 진실 규명보다는 은폐를 통한 책임 회피에 급급했다. 언론에는 무장공비, 공군 관리 특수범의 난동으로 왜곡 발표했다. 이 왜곡 발표는 청와대에서 국무총리 중정부장, 국방부장관, 합참의장, 대통령 비서실장, 공군참모총장 등이 모여 대책을 논의하고, 국방부장관과 중앙정보부장이 발표문을 작성하는 등 조직적으로 이뤄졌다. 이마저도 해당 사건에 대한 후속 보도를 하지 못하게 언론을 통제했고, 사건의 진실은 그대로 묻혔다.
아울러 탈출 사건 직후 공군은 국회 조사단의 조사에 대비하는 치밀함도 보였다. 공군은 생존 부대원들의 진술을 막기 위해 월남 파병 등으로 회유하고, 684 부대 관련 서류를 모두 불태웠다. 실제 ‘실미도 탈출 사건’ 직후인 1971년 9월15일 열린 국회 본회의에서는 날카로운 지적이 나오기도 했다.
당시 신민당 강근호 의원은 “특수부대에 종사하고 있는 청년들에게는 호적마저도 정리해 버렸다는 얘기가 있다”고 발언한 바 있다. 이에 대해 군 정보 관계자가 “북파 임무를 수행하는 특수부대원들의 경우 주민등록으로 조회해도 안 나오게끔 처리되었다”고 설명하면서 강 의원이 제기한 의혹을 뒷받침했다. 북한에서 체포될 경우를 대비해 특수부대원들의 주민등록 기록 자체를 지워 버렸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박정희 정부는 684 부대의 실체가 드러날 것을 염려해 군 수사 당국을 통해 군사재판을 비공개로 신속하게 처리했다. 이로 인해 ‘684 부대’에 대한 제대로 된 수사와 재판도 이뤄지지 않았다. 생존 부대원들이 훈련 기간 중 발생한 부대원 살해 등을 자백했지만 정부는 사건을 축소, 은폐해버렸다. 이후 정부는 생존 부대원들에게 상고 포기를 종용했고, 4명 전원에게는 사형이 집행됐다.
유가족들은 이들의 사형집행 사실을 통보받지도, 주검도 돌려받지도 못했다. 결국 사건이 발생한 지 35년이 지난 2006년 10월이 되어서야 공군 참모총장 명의의 공식 사망 통보를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국방부의 ‘실미도 진상 조사 TF’ 면담에서 사건 당시 중앙정보부 차장과 공군 참모총장 등 관련 지휘관을 포함, 사건 관련자 85명 모두는 사건과의 관련성을 전면 부인했다. 이들이 모두 관련 없다면 ‘실미도 684 특수부대원’ 전원은 왜 죽음을 맞아야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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