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12. 13. 17:23ㆍ역사속의 오늘
난징대학살(南京大虐殺)
0. 일시: 1937.12.13.~ 6주간
0. 피해: 살해 30만 명 추정
0. 개요: 중일 전쟁 시 중국의 수도 난징에서 일본 군대가 중국인을 무차별 학살한 사건. 마쓰이 이와네 대장 휘하의 5만 여 일본군이 1937년 12월 중국인 포로와 일반시민을 대상으로 강간·학살·약탈을 자행했고 기관총에 의한 무차별 사격, 생매장, 휘발유를 뿌려 불태워 죽이는 등의 방법으로 학살했다. 극동국제재판 판결에 따르면, 비전투원 1만 2,000명, 패잔병 2만 명, 포로 3만 명이 시내에서 살해되었고, 근교에 피난가 있던 시민 5만 7,000명 등 총 12만 9,000명이 살해되었다. 이것은 기록에 남은 최소한의 숫자이며 실제로는 30만 명이 넘을 것으로 추정되었다.
0. 배경: 1937년 7월 루거우차오(蘆溝橋)사건으로 중국과 일본 사이에 무력 충돌이 발생하자 일본군이 중국 대륙으로 진출하면서 중일 전쟁이 발발했다. 일본군은 중국의 북쪽인 베이징과 텐진 등을 함락시키고 남서쪽으로 진격했다. 중국 전역을 장악하리라 자신했던 일본군은 상하이 전투에서 중국 정예군과 대치하면서 소모전을 벌인 끝에 간신히 상하이를 점령하고, 곧바로 수도인 난징으로 진격했다. 중국은 수도인 난징을 포기하고 충칭을 임시 수도로 정했으나, 중국군 사령관 탕셩즈(唐生智)가 난징 사수를 주장하면서 난징에 남았다. 정부가 빠져나간 난징은 곧 일본군에 의해 포위되었으며, 난징을 방어하고 있는 탕셩즈의 중국군이 이를 방어했다. 12월 10일 일본군은 전격적으로 난징을 공격, 지도부의 붕괴로 지리멸렬한 중국군의 방어망을 뚫고 난징을 점령했다.
0. 경과
이날부터 난징에 남아있던 중국군과 시민들에 대한 일본군의 학살이 시작되었다. 일본 중지나방면 군사령관 마쓰이 이와네(松井石根) 대장 휘하의 5만 여 일본군은 중국군 포로와 일반 시민을 대상으로 강간·학살·약탈을 자행했다. 항복한 중국군을 대상으로 총검술 훈련을 하거나 살상 훈련의 대상으로 삼았고, 여자와 어린이들을 포함한 시민들에게 석유를 뿌리고 기관총을 난사하였으며, 나이를 가리지 않고 여자를 겁탈한 후 살상하기도 했다. 총알을 아낀다면서 생매장을 하기도 했으며, 수녀와 비구니, 임신부를 가리지 않고 겁탈 살해하는 만행을 자행했다. 약탈과 살인, 강간이 자행되고 있다는 사실은 일본 정부에도 보고 되었지만 일본 정부는 이 사건을 은익하려고 시도했다. 따라서 일본 국내에서는 이 사실이 일반에게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난징에 거주하던 외국인 생존자에 의해 곧바로 세계에 보도되었을 뿐 아니라 르포르타주나 보고서에 의해 점차 더 널리 전해졌다.
0. 결과:1937년 12월 13일부터 시작된 대학살은 6주간에 걸쳐 진행되었으며, 1938년 봄에 이르러서야 마무리되었다. 일본은 이후 중국인을 동원 난징자치위원회를 구성하여 통제하기 시작했다. 1939년에는 중국인을 상대로 생체실험을 실시했고, 1940년에는 친일 성향의 괴뢰정부를 세우기도 했다. 1945년 패전한 일본은 난징에서 모든 기록을 파괴하고 철수했으나, 1946년에 열린 난징전범재판에서 각종 증거들이 발굴되기 시작했다. 극동국제재판 판결에 따르면, 난징대학살에 의해 비전투원 1만 2,000명, 패잔병 2만 명, 포로 3만 명이 시내에서 살해되었고, 근교에 피난가 있던 시민 5만 7,000명 등 총 12만 9,000명이 살해되었다고 보고되었으나, 이는 기록에 남은 최소한의 숫자이며 실제로는 30만 명이 넘을 것으로 추산되었다.
0. 중국의 조치와 일본의 반응: 중국은 학살이 시작된 12월 13일을 추모일로 정하고, 관련 자료를 발굴하여 기념관을 건축하며 국가 차원의 기념일로 기념하고 있다. 2015년에는 일본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난징 대학살 관련 기록 16건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했다. 일본은 난징 대학살을 '난징 사건'으로 부르면서, 전쟁중에 발생한 불가피한 민간인 피해라고 주장하며, 일본 정부의 공식 명령에 의한 일이 아니어서 국가 차원의 책임은 없다고 주장했다.
주)루거우차오 사건( 蘆溝橋事件)
요약 1937년 7월 7일 밤 중국 베이핑[北平:지금의 베이징] 남서부 교외의 루거우차오 부근에서 일어난 중국군과 일본군의 충돌사건으로 7·7사변이라고도 하며, 중일전쟁의 발단이
되었다.
1931년 일본은 중국 북동부지역인 만주(지금의 둥베이 지구[東北地區])를 점령하여 꼭두각시 정권인 만주국을 세우고 이 지역의 산업화를 위해 막대한 비용을 투입했다. 그러나 이러한 침략으로 중국에서는 점차 반일운동이 확산되었다. 반일운동이 거세게 전개되자 1937년 중국공산당과 국민당은 내전종식에 합의하고 심화되는 일본의 침략에 공동으로 대응하는 통일전선을 구축했다. 당시 루거우차오 부근에는 중국의 쑹저위안[宋哲元] 29군이 주둔하고 있었는데, 야간 훈련중이던 일본군 중대에서 몇 발의 실탄 사격소리가 들리고 일본군 병사 1명이 행방불명이 되는 일이 발생했다. 일본군은 이를 구실로 즉각 전투태세에 들어가 이튿날 8일 새벽 중국군 진지를 공격해 루거우차오를 점령했다. 최초의 몇 발의 사격이 일본측의 모략에 의한 것인지 아니면 중국의 항일세력에 의한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11일 새벽 일단 현지에서 정전협정이 성립되었다. 그러나 당초 사태를 확대시키지 않겠다는 방침을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제1차 고노에[近衛] 내각은 이 사건을 '중국측의 계획적 무력 항일'이라 단정하면서 파병 성명을 발표했다. 일본은 국내 3개 사단을 동원하기로 결정했고, 전선은 점차 확대되어 마침내 28일에는 화베이[華北] 주둔 일본군이 베이징[北京]과 톈진[天津]에 대한 총공격을 개시함으로써 전면전이 시작되었다. 이를 계기로 중국측에서는 제2차 국공합작이 이루어졌고 항일 기운이 고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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