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6. 29. 20:12ㆍ팔공산 자락
봉무정과 독좌암
0 위치: 대구 동구 팔공로327-7(봉무동)불로파출소 맞은편
집 주변에 있는 봉무정과 독좌암을 돌아보면서 역사의 아이러니컬한 순간을 느껴보게 되는데~~
# 獨座巖
(2019.7.1.)
# 鳳舞亭- 봉무정은 달성 지역의 토호인 최상룡(崔象龍, 1786~1849)이 문회(文會)를 위해서 건립한 정자이다. 만년에 학문을 강론하면서 마을 공동체를 유지하려는 뜻이 담긴 공공 건축물이다. 최상룡은 대암(臺巖) 최동집(崔東㠍, 1586~1664)의 후손으로, 퇴계학맥을 이은 입재(立齋) 정종로(鄭宗魯, 1738∼1816)에게 수학하였다. 1822년(순조 22)에 진사 급제한 뒤, 봉무동에 독암서당(獨巖書堂)을 건립하여 후학을 양성하였다. 주변은 봉무토성이 있던 곳으로, 산기슭에는 고려 태조 왕건이 혼자 앉아 쉬었다는 ‘독좌암(獨座巖)’이라는 바위가 있다. 당시에 달성군 공산면의 강동(江東), 독좌(獨坐), 위남(渭南), 단산(丹山) 등 4개 동은 행정구역 변동으로 봉무동(鳳舞洞)으로 통합되었다. 최상룡은봉무동 동규(洞規)를 제정하여 풍속 교화를 통해 마을의 여러 문제를 해결하고자 원래 자리하였던 초가를 헐고서 자를 세웠다. 상량문 묵서에는 현재의 건물이 1875년(고종 12)에 건립되었다고 하였다. 1988년∼2001년에 3차례 수리되었다.『봉촌선생문집』에 관련 기록이 남아 있으며, 최상룡이 지은「봉무정십경(鳳舞亭十景)」에는 독암괴림(獨巖槐林), 수야농가(藪野農歌), 금호범주(琴湖泛舟), 공산편운(公山片雲), 검리조연(黔里朝烟), 단산낙조(丹山落照), 동화귀승(桐華歸僧), 화담조간(花潭釣竿), 해창적로(解倉糴路), 노정명안(鷺亭鳴鴈) 등을 꼽았다. 건축물 규모는
앞면 7칸, 옆면 2칸의 홑처마 맞배지붕 건물로, 앞면 13.2m, 옆면 4.8m, 높이 5m이다.가운데 3칸은 우물마루가 깔린 대청이고, 왼쪽과 오른쪽의 각각 1칸은 온돌방인데, 천장에는 위를 가려 막은 고미반자를 설치하였다. 최상룡이 쓴「봉무정기(鳳舞亭記)」에는 온돌방을 ‘협(夾)’이라고 불렀고, 동쪽 방은 덕교재(德敎齋), 서쪽 방은 예용재(禮用齋)라고 하였다. 온돌방의 앞면에는 대청보다 높은 툇마루를 두었고, 툇마루 아래에는 아궁이를 설치하였으며, 대청의 뒷면에는 판문을 두었다. 공포를 쓰지 않은 민도리집으로, 5개의 도리로 지붕의 가구를 구성하였다. 다만 왼쪽과 오른쪽의 마지막 칸에는 밖으로 기울어진 부섭지붕을 달았는데, 건물 본채의 구조와는 분리되어서 뒤에 덧붙인 것으로 보인다. 대청에는「봉무정기」와 상량문을 비롯하여「봉서대기(鳳棲臺記)」등의 여러 기문이 걸려 있으며, 종장여에는 ‘숭정오주을해(崇禎五周乙亥)’, 곧 1987년 2월 16일에 상량하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2020.3.7.)
#獨座巖-독좌암은 동구 봉무동 산 27-1에 위치하고 있으며, 불로동에서 동화사 방향을 따라 약 1㎞정도 달리면 좌측의 구 봉무동 사무소 맞은 편에 큰 돌 하나가 자리잡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후백제의 침입으로 신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신라의 원병 요청으로 온 고려 태조 왕건과 견훤이 팔공산에서 전투를 하다가 왕건이 패하여 도피를 하게 되었다. 그 때 왕건이 포위되어 도피가 불가능하자 왕건의 부하인 신숭겸이 왕건의 갑옷을 받아 입고 대신 포로가 되고 왕건을 도피 시겨 왕건이 도망치면서 이끌고 간 몇몇 부하가 이곳에서 왕을 잃어서 실왕동이라 불리게 되었고, 왕건이 이 바위에 홀로 와서 앉았다 하여 이 바위를 독좌암(獨座岩)이라 일컫는다.
# 봉무토성(鳳舞土城)- 대구광역시 동구 봉무동에 있는 삼국시대의 봉무토성으로 1988년 5월 30일 대구광역시의 기념물 제4호로 지정되었으며, 성이 있는 곳의 서남쪽은 금호강에 접한 높은 절벽이며, 동북쪽의 일부만 제외하고는 전면에 가파른 경사가 형성되어 있다.
토성의 둘레는 약 350m 정도인데, 성벽의 높이와 너비가 소규모여서 군사적인 목적보다는 도피용 산성으로 판단된다. 토성의 남동쪽으로 약1km 떨어진 낮은 구릉에는 봉무동 무덤들과 불로동 무덤들이 있고, 금호강을 사이에 두고 검단동 토성과도 연결되고 있다. 이를 통해 볼 때 이곳에는 팔공산과 금호강을 배경으로 하는 대규모의 집단이 형성되어 있었고, 이들 세력이 봉무토성을 축조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성내에서 발견된 토기 조각들로 볼 때 3∼4세기경인 삼국시대의 토성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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