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3. 26. 17:40ㆍ산따라 길따라
如 犀 角 獨 步 行
>>>단종과 엄흥도 흔적 찾아보기<<<
0. 일시: 2026. 3. 26.(木)전일 * 100년지기
0. 위치: 대구광역시 군위군 산성면 화본리 620-2(입구)
영화 "왕과 사는 남자" 영화가 개봉되어 1,700백만의 관람기록을 올리고 있는 중이라고한다. 원래 영화에서는 단종의 아픈 기억이 주를 이루어야하지만 영화에서는 돌아가신 왕의 "시신을 수습한 충의공 엄흥도의 일대기"가 주류를 이루는것 같다. 6대 왕인 단종(1441-1457)은 삼촌인 세조(수양대군)에게 왕위를 찬탈하고 사육신 사건이후 노산군으로 강등되어 강원도 영월 청령포로 유배되어 4개월을 살다가 사약을 받고 죽임을 당하였는데, 당시 영월 호장으로 있던 엄흥도가 棺까지 준비하여 장례를 마치고 여러곳에서 은둔생활하다 생을 마감하였다. 그후 현종때 송시열의 건의로 그 자손이 등용되었고, 영조때 忠毅를 기리는 정문을 세웠다고한다. 후일에 공조판서에 추증되었었다고 전해진다. 국학연구론 제3집에 발표된 논문 '충의공 엄흥도'의 삶과 묘소 진위에 대한 고찰'에 따르면 이곳 군위 산성면의 묘소가 실제일 가능성이 가장 높다고 한다.

○ 군위군 엄흥도 묘소 안내판
- 여기서 계단 154개를 딛고 오르면 묘소가 나타나지만 경사가 심한곳에 안장되어 있고 여기를 지나 뒷쪽으로 돌아 가면 화본역사가 나오는 역사탐방로 산길로 이어진다고한다.





○. 영도교( 永渡橋/ Yeongdogyo/영이별다리)
- 1457년 단종이 영월 유배갈때 정순왕후가 이곳에서 마지막 배웅한 다리라고 전해진다.

영도교는 청계천의 다리로 청계광장 기준으로 청계천의 17번째 다리이며,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58길(숭인동)과 중구 마장로9길(황학동) 사이에 있다.조선 태종 때부터 존재했던 유서깊은 다리로 원래 이름은 '왕심평대교(旺尋坪大橋)'였다. 양녕대군이 폐세자된 후 경기도 광주로 귀양갈 때 이 다리를 건넜다고 한다.이 다리가 영도교란 이름을 얻은 데에는 단종의 슬픈 이야기가 묻어 있다. 단종이 삼촌 수양대군(세조)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노산군으로 강봉되어 강원도 영월의 청령포로 유배를 떠날 때 단종의 왕비 정순왕후가 여기까지 나와 배웅했는데 이후 두 번 다시 만나지 못했다고 하여 사람들이 이 다리를 ‘영이별다리’, ‘영영건넌다리’라고 불렀다. 그리고 나중에 이름을 한문화하여 ‘영도교(永渡橋)’가 된 것이다.조선 시대에 흥인지문에서 왕십리 방향으로 가려면 이 다리를 꼭 건너야만 했기 때문에 교통량이 굉장히 많았다. 그래서 성종은 주변 절의 스님들을 동원하여 이 다리를 돌로 고쳐짓고 큰 규모로 만들게 했다. 그리고 직접 ‘영도교’란 글자를 써서 두었다.조선 시대부터 역사가 전해오는 청계천의 다리들이 대부분 그렇듯, 영도교 역시 별칭이 많았다. 성종 때 다리를 개축한 스님들이 근처의 영미사(永尾寺)와 영도사(永導寺)에서 동원되었다하여 ‘영미교(永尾橋)’, ‘영미다리’, 그리고 ‘영도교(永導橋)’로 불렀다고도 한다.고종 때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영도교를 궁궐 공사에 쓰려고 가져갔다.(...) 대신 그 자리에는 나무로 만든 다리가 놓였다. 그런데 아무래도 돌다리보다는 덜 튼튼해서인지 장마 때마다 무너져버려 나중에는 사람들이 징검다리를 놓아 건너다니면서 한때는 ‘띄엄다리’로도 불렸다. 일제강점기인 1933년에 나무다리를 헐고 콘크리트로 새로 지었으나 1960년대 청계천 복개공사 때 사라졌다. 지금 다리는 서울특별시에서 2000년대에 청계천 복원공사를 하면서 새로 지은 것으로 2005년 9월 30일에 준공했다.길이 30.1m, 폭 26.2m 규모이다. 가운데에 차도가 있고 양 가장자리에 인도가 있다. 차도는 2차선으로 북쪽 방향 일방통행만 가능하다. 차도와 인도 사이엔 잔디를 깔았으며 인도 가운데에는 원기둥 모양 조형물이 있다. 인도 가장자리 가운데는 곡선형으로 살짝 튀어나온 모습이다.(펀글)
○. 영월 청령포 단종 흔적 보기
- 방문일자: 2019.12.15.
영월 청령포(寧越 淸冷浦)는 조선 단종의 유배지이다. 단종은 세조 찬위 후 세조 측근들의 탄핵으로 이곳에 유배되었다가 암살되었다. 2008년 12월 26일 대한민국의 명승 제50호로 지정되었다. 영월 청령포는 어린 나이에 세조에게 왕위를 빼앗긴 단종의 유배지로 서쪽은 육육봉의 험준한 암벽이 솟아 있고 삼면이 강으로 둘러싸여 섬과 같이 형성된 곳으로 한양을 바라보며 시름에 잠겼다고 전하는 노산대, 망향탑 돌무더기 등 슬픈 역사가 남아 있는 유서 깊은 곳이다. 천연기념물인 ‘관음송’을 비롯하여 단종의 어가 주변에 조성된 크고 오래된 소나무림이 270° 돌아흐르는 서강과 어우러져 자연 경관이 뛰어난 명승지이다. 원래는 영월군에서 관리하였으나 2009년 명승지로 지정되면서 문화재청으로 이관되어서 문화재청 장릉관리소에서 겸임 관리를 하고있다. 청령포는 주변에 강이 흐르고 있어서 청령포 유람선을 타고 갈 수 있으며 단종이 머물렀던 어소(御所)와 금표비, 와송(臥松)과 망향탑 등이 있다. 단종의 어소는 단종이 생전이 머물렀던 곳으로 이 곳에서 글을 읽거나 휴식을 취하였으며 밤에 몰래 찾아온 엄흥도와 대화를 나누었던 공간이기도 하다. 엄흥도는 매일 밤이 되면 청령포 강을 건너서 어소에 자주 들리면서 단종이 암살되어서 영면할 때까지 그의 말동무가 되어서 외로움을 달래주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단종이 영면하게 되었을 때는 최후까지 그의 시신을 영월읍으로 이동하여 안장하였고 이것이 후의 장릉으로 불리게 된다. 유일하게 청령포를 오갔던 사람이자 단종의 말동무 역할을 하였으며 단종의 어소에 무단으로 출입하면 삼족을 멸한다는 어명에도 불구하고 단종을 생각하며 매일 밤이면 감시중인 군사들의 눈을 피해서 청령포 강을 건너서 어소에 있는 단종에게로 찾아와서 말동무가 되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단종은 유배 초기에는 밤이 되면 사람이 없는 외로운 분위기 때문에 슬픔에 잠기게 되었던 편이었으나 엄흥도가 매일 밤 몰래 어소로 들리면서 그나마 위안을 찾은 것으로 알려저 있으며 단묘재본부시유지(端廟在本府時遺址)단종이 살으셨던 어소를 표시한 시유지비(時遺址碑)의 내용으로 1457년 6월 22일 조선왕조 6대 임금인 단종대왕께서 왕위를 찬탈 당하고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降封)유배되어 계신곳으로 단종대왕의 거처인 어소(御所)가 있었으나 소실되고 명조 39년 1763년에 이비를 세워 위치를 전하고 있다.시유지비의 후면에 이곳 지명을 청령포(淸玲浦)로 음각되어 있다.

# 절개를 지키고 있는 한 그루의 소나무-신기하게도 어각쪽으로 완전히 누워 있는 형태로 왕을 모시고 있는 듯하게 자라고 있다.(위: 어가 안쪽, 아래:어가 바깥 뿌리 부근)




# 관음송-관음송은 영월의 청령포 안에서 자라고 있으며 나이는 600년 정도로 추정된다. 높이 30m, 가슴높이 둘레 5.19m의 크기로 1.6m되는 높이에서 줄기가 두 갈래로 갈라져 하나는 위로 하나는 서쪽으로 약간 기울어져 자라고 있다. 청령포는 세조 2년(1456)에 왕위를 빼앗긴 단종이 유배되었던 곳으로 단종은 유배생활을 하면서 둘로 갈라진 이 나무의 줄기에 걸터앉아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관음송(觀音松)이라는 이름은 단종의 비참한 모습을 지켜보았다고 해서 ‘볼 관(觀)’자를, 단종의 슬픈 말소리를 들었다하여 ‘소리 음(音)’자를 따서 붙인 것이라고 한다. 나라에 큰 일이 있을 때마다 나무의 껍질이 검은색으로 변하여 나라의 변고를 알려 주었다하여 마을 사람들은 이 나무를 귀하게 여기고 있다. 이 나무는 단종과 관련된 전설을 가지고 있는 등 역사적·학술적 자료로서의 보존가치가 인정되어 천연기념물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망향대-망향탑은 청령포 뒷산 육육봉과 노산대 사이 서강이 내려다보이는 층암절벽 위에 위치해 있다. 단종대왕이 유배생활을 할 때 자신의 앞날을 예측할 수 없는 근심속에서도 한양에 두고 온 왕비 정순왕후 송씨를 생각하며 여기저기 흘어져 있는 막돌을 주워 쌓아 올렸다는 탑으로, 단종이 남긴 유일한 유적이다. 정순왕후(1440-1521.6.4)는 16살에 왕대비가 되어 조선역사상 가장 어린나이에 왕대비가 됨.정순왕후는 단종이 죽고 친정으로 가서 살고 있었는데 금성대군의 단종 복위운동 실패로 친정아버지인 송현수도 처형되어 노비로 강등되었고 이후 한양에서 쫒겨나 동대문 인근 암자에서 자신의 시녀들과 같이 살았으며,중종 16년(1521년) 82세로 생을 마감하였다고 함.

# 금표비-금표비(禁標碑)는 단종이 유배되어 머물던 이곳을 일반 백성들의 출입과 행동을 제한하기 위하여 영조 2년(1726, 단종 死後 269년 뒤)에 세운 비석이다.내용은 "「東西三百尺 南北四百九十尺 此後泥生亦在當禁」 崇禎 九十九年丙午十日 " 동서로는 삼백척 남북으로 사백구십척 내에서는 이 후는 더럽히거나 살거나 또한 머무러는 것을 금한다. 영조2년(숭정은 명나라 연호) 병오 10일에" 라고 이렇게 해석해 본다면 단종 유배시에 세운 금표비라고 한것을 "단종 유배지임을 알리는 금표비를 영조2년에 세월을것으로 추정된다.



## 정순왕후 송씨##
정순왕후 송씨(定順王后 宋氏, 1440년 ~ 1521년 7월 7일(음력 6월 4일)) 전라북도 정읍군 태인면 (현 칠보면)출생. 조선 6대 임금 단종(端宗, 1441년 8월 9일 (음력 7월 23일) ~ 1457년 11월 7일 (음력 10월 21일), 재위 1452년~1455년)의 정비. 시호 의덕단량제경정순왕후(懿德端良齊敬定順王后). 판돈녕부사 등을 역임하였고 영돈녕부사로 추증된 여량부원군(礪良府院君) 송현수(宋玹壽)의 딸, 본관 여산(礪山). 세종의 왕자 영응대군의 부인 대방군부인 송씨는 그녀의 고모이자 시숙모이다. 어린시절 성품이 공손하고 검소하다는 칭찬을 받았고 고모가 영응대군의 부인이라는 점 등의 이유로 세자비에 간택이 되었다.
1452년 문종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면서 단종이 12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다. 1년후 1453년 계유정난이 일어나 수양대군이 권력을 잡게 되고 다음해인 1454년 2월 19일 (음력 1월 22일) 열 다섯의 나이로 한살 연하였던 단종과 정식으로 혼인 왕비로 책봉되었다. (어린 나이여서 정식 결혼을 하지 못했었다고 한다)
1455년(세조 1년) 단종은 수양대군의 측근 세력인 한명회·권람 등에게 선위를 강요받아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으로 물러났다. 정순왕후 송씨는 왕대비가 되어 의덕(懿德)의 존호를 받았다. 1456년 음력 6월 성삼문·박팽년·하위지·이개·유응부·유성원 등 사육신이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발각되어 처형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1457년 상왕 단종은 그 사건에 연관되었다는 이유로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되어 영월로 유배되었고, 의덕왕대비는 군부인이 되어 궁에서 쫓겨났다. 이때 단종과 부인 정순왕후 송씨는 영영 이별을 하게 된다.
공식적인 기록 조선왕조실록에는 1457년 음력 10월 21일 단종이 자살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당시 17세)
정순왕후 송씨는 남편 단종이 노산군으로 강등되면서 군부인(君夫人)으로 격하되었다가 단종이 죽은 후 관비가 되었다. 조카를 폐위시켜 죽이고 조카의 부인을 노비로 만든 세조의 잔인함 면을 엿볼 수 있다. 이때 신숙주가 그를 자신의 종으로 달라고 했다가 은둔중이던 학자들에게 비웃음을 받기도 했다. 이후 세조는 그를 노비이지만 아무도 범하지 못하도록 정업원(淨業院)으로 보내져 여생을 보내게 된 것이다. 세조의 증손이자 단종의 종손뻘인 중종(中宗) 18년인 1521년 7월 7일(음력 6월 4일), 82세의 나이로 한 많은 생을 마감했다.
그녀의 별세 때에는 대군부인의 격에 따라 치러진 장례로 경기도 양주군(楊州) 군장리(群場里, 현재의 행정구역으로는 남양주시 진건읍 사릉리)에 매장됐다. 단종과 그녀의 복위로 종묘에 배향되면서 능호를 사릉(思陵)이라 했는데 이는 억울하게 살해된 남편을 사모(思慕)한다는 뜻에서 지은 것이다. 사후 중종의 재위 초기 사림파인 조광조 등에 의해 복위가 주장됐으나 중종은 이를 거부했다. 그 뒤 현종 때부터 송시열과 김수항 등은 단종과 그녀의 복위를 거듭 건의했지만 거부되다가 1698년 12월 7일(숙종 24년 음력 11월 6일) 단종과 함께 복위되어 시호를 받고 종묘 영령전에 신위가 모셔졌다. 그녀의 묘소 뒤편에 심은 나무들이 단종의 능인 장릉쪽을 향해 고개숙여 자란다는 전설이 한 때 전해졌다. (펀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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