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9.6.4.-천안문사태

2019. 6. 6. 08:46역사속의 오늘

톈안먼 사건


1989.6.4.일 중국 현대사에서 피의 일요일이라 불리는 톈안먼 사건이 베이징 톈안먼 광장에서 일어났다. 학생, 노동자, 시민들이 정부의 정치 개혁과 민주화를 요구하며 대규모 시위를 벌이자, 정부가 군사력을 동원해 시위대를 무력으로 과잉 진압하여 수많은 사상자를 냈다. 천안문 사태, 북경 대학살 사건, 6·4사건 등으로도 불린다.

중국 공산당의 핵심 인물이었던 덩샤오핑은 자본주의, 실용주의 노선을 따른 정책의 도입을 주장하며 마오쩌둥과 대립 구도에 놓였다. 그러나 마오쩌둥이 급진적 계급 투쟁과 사회주의 대중 운동인 문화대혁명을 일으키면서 덩샤오핑은 권력 일선에서 물러나야 했다. 문화대혁명이 종결되고 1976년 9월에 마오쩌둥이 사망하자, 공산당 최고 지도자가 된 화궈펑은 어수선한 정국을 안정시키기 위해 덩샤오핑을 공산당에 복귀시켰다. 그러나 화궈펑은 두 개의 진리(兩個凡是), 즉 '마오쩌둥의 지시는 무조건 옳고, 그의 지시는 무조건 집행해야 한다'라는 마오쩌둥의 사상을 국가 주요 정책으로 채택하고, 권력 집중, 개인 숭배의 기미까지 보였다. 그리하여 문화대혁명 당시 박해를 당한 공산당 원로들과 국민의 반발을 사는 결과를 초래했다. 그러자 덩샤오핑은 실사구시와 해방 사상을 내세워 화궈펑을 비판한 뒤 그를 밀어내고 당내 지지를 확보해 나갔다. 1982년,덩샤오핑은 자신과 뜻을 같이하는 개혁파 인물인 후야오방(胡耀邦), 자오쯔양(趙紫陽)을 각각 총서기, 총리직에 세웠다. 그리고 자신은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에 취임해 삼두 체제를 이뤄 정권을 장악했다. 실질적으로 당내 서열 1위로 부상한 덩샤오핑의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덩샤오핑은 4대 현대화, 즉 농업, 공업, 과학, 기술의 현대화를 목표로 삼고 이를 완성시키고자 '중국적 특색을 지닌 사회주의'를 표방하며 개혁 정책을 추진했다. 그것은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를 잡을 수 있다면 좋은 고양이다'라는 경제 정책이다. 즉 중국의 경제 발전에 도움이 된다면 이념과 상관없이 자본주의적 경제 요소, 즉 시장 경제와 상품 경제를 적극적으로 수용 가능함을 의미했다. 먼저 그는 인민공사 폐지와 개별 생산 도급제를 실시해 농업 생산력 증대를 이룩했다. 또한 농촌 개혁을 곧 도시 중심의 개혁으로 바꿔 외국 자본과 기술을 적극 도입하고, 수출입을 확대하여 자본주의 국가와 활발하게 경제 교류를 가졌다. 이와 같은 덩샤오핑의 개혁개방 정책으로 중국 경제는 11퍼센트의 높은 경제성장률을 보였다. 특히 연해 지역의 경제 발전이 두드러져 연해 지역 주민의 생활 수준이 크게 향상되었다.

하지만 개혁개방 정책은 정치, 경제적 부작용을 가져왔다. 시장 경제 도입에 따른 급속한 경제 발전은 도시와 농촌 간 소득 격차를 발생시켰다. 특히 도시 내에서는 근로자들 사이에서 소득에 따른 빈부차가 심화되었다. 평등을 우선시하는 사회주의에서 소득 격차는 주민들에게 체제에 대한 불만을 갖게 했다. 또한 기존의 사회주의 체제에서 볼 수 없는 실업 문제와 가격 개혁으로 인한 인플레이션이 발생해 사재기 등 경제 운용상의 문제점이 드러났다. 이 같은 부작용은 주민들, 특히 도시 민중의 안정된 생활을 위협하기 시작했다.

한편 주민들은 개방 정책 및 텔레비전의 보급을 통해 서방 세계에 대한 편견을 버렸으며, 반정부 시위 등으로 정부에 저항하는 서방 세계의 정치적 움직임에 관심을 가졌다. 더불어 자국에 정치 변화가 필요하다는 인식과 함께 정치 민주화에 대한 열망을 품었다.

당시 덩샤오핑은 중국 공산당만이 유일한 정치 세력이며, 공산당을 통한 개혁 추진만이 유일한 방법이라 여겼는데, 이런 생각은 당과 당 간부들에게 강력한 권력이 집중되는 결과를 낳았다. 그러자 중국의 진정한 현대화를 이루려면 마오쩌둥 식의 사회주의 독재 정치에서 벗어난 정치 민주화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의견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덩샤오핑은 아래로부터의 민주화 운동은 중국 사회를 혼란에 빠뜨릴 뿐이라며, 정치 개혁에 소극적인 자세를 취했다. 반면 후야오방은 언론의 자유화, 법치주의 보호, 사상 해방, 당내 민주화 등 민주주의 노선의 정치 개혁에 힘을 쏟았다. 하지만 그의 행동은 지나치게 자유주의 노선을 걷는다는 이유로 당내 보수파의 의심과 불만을 초래했다.

1986년과 1987년 사이, 몇몇 도시에서 대학생들의 민주화 요구 시위가 일어나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이때 시위대 진압에 소극적 태도를 보인 후야오방을 향한 시위 진압 책임설이 대두되었다. 결국 후야오방은 당내 보수파 세력과 갈등을 빚다가 총서기직에서 사퇴하였다. 이에 총서기에 자오쯔양, 총리에 리펑(李鵬)이 취임하여 새 지도부가 구성되었다. 일련의 상황을 통해 학생, 지식인 사이에 민주화, 자유화를 제약하려는 공산당을 비판적으로 보는 시각이 늘어났다. 또한 정치 권력의 집중화로 관리들의 관료형 부정부패가 심화되자, 경제적 문제로 현실에 불만을 가진 노동자와 주민들의 불만도 고조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마침 정치 민주화에 우호적인 인물이자 학생들에게 존경의 대상이었던 후야오방이 1989년 4월 15일 심근경색으로 갑자기 사망했다. 그의 사망 소식이 전해지자 베이징에서는 천체물리학자 팡리즈(方勵之) 등의 지식인과 학생들이 후야오방의 총서기직 사퇴에 대한 진실을 밝힐 것과 그의 명예회복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이기 시작했다.

베이징 대학생들은 보수파를 비난하는 내용의 대자보를 붙이기 시작했고, 4월 17일에는 베이징과 상하이에서 보수파에 대한 재평가 및 부패 관료 타도를 외치며 가두 시위했다. 4월 21일에는 시위에 참여한 대학의 수가 10여 개로 늘어났으며, 저항 시인인 베이다오(北道) 등 47명의 학자들이 학생 운동을 지지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4월 22일, 후야오방의 장례식 이후 베이징 내 21개 대학의 대표자들은 효과적인 민주화 운동의 확산을 위해 지도 조직을 정비했다. 또한 자신들의 요구 사항을 적은 종이를 들고 인민대회당 앞에서 무릎을 꿇고 정부의 반응을 기다렸다. 하지만 총리 리펑과 관료들은 미온적 태도를 보일 뿐이었다. 그러자 10만 명의 학생들은 톈안먼 광장으로 집결하여 후야오방을 추모하며 그의 이상주의가 현실로 실현되길 바랐다. 톈안먼 광장 인민영웅기념비 앞에서 거행된 대학생들의 후야오방 추모 행사에서는 빈부 격차와 언론 자유에 대한 불만 등이 함께 표출되었다. 이로써 수십만 명의 학생과 노동자, 시민이 참가해 정치 개혁과 민주화를 요구하는 대규모 시위로 발전하게 되었다.

                                     

4월 26일, 정부는 시위대를 반혁명 폭동으로 규정하고, 덩샤오핑은 총리 리펑에게 강력한 조치를 취해 시위대를 진압할 것을 지시했다. 5월 13일, 2천여 명의 학생들은 시위대를 대표해 단식 연좌 농성을 선언하고 톈안먼 광장에서 무기한 단식 투쟁에 돌입했다. 그런데 마침 5월 15일 중국을 방문한 소련 고르바초프의 환영식이 톈안먼 광장에서 열릴 예정이었다. 시위대는 고르바초프가 도착하기 전에 중국 정부가 자신들과 대화를 시도할 것이라 기대했다. 그러나 단식 농성을 지지하는 시민, 학생들의 수가 100만 명에 달해 시위대가 급격히 증가하자, 정부는 환영식 장소를 공항으로 변경했다. 그리고 당내 보수파들은 학생과 시민들의 대규모 시위를 사회주의 체제의 존속에 있어 위험 요소로 인식하고, 당시 최고 실권자인 덩샤오핑에게 시위대를 무력 진압할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개혁개방파 중 한 명인 총서기 자오쯔양이 이를 반대함으로써 보수파와 갈등했다.

5월 19일, 자오쯔양은 톈안먼 광장을 방문하여 민주 개혁을 외치며 단식 농성 중인 학생들에게 눈물로 호소했다. 이제야 온 것에 대해 사과하고 시위대가 무엇을 주장하는지 잘 알고 있으며, 비판을 겸허히 받아들이겠으니 이제 집으로 돌아가라고 설득했다. 하지만 보수파의 의견에 동조한 최고 실력자 덩샤오핑은 엄청나게 늘어난 시위대를 진압하기 위해 5월 19일 밤에 계엄령을 선포했다. 정치적 힘겨루기에서 패한 자오쯔양은 민주화 운동에 동조했다는 이유로 실각당했으며, 17년 동안 가택 연금당했다.

정권을 장악한 리펑과 덩샤오핑의 후계자로 알려진 양상쿤(楊尙昆) 등의 강경보수파는 결국 무력 진압을 실행에 옮겼다. 6월 4일, 시위 군중으로 가득 찬 톈안먼 광장에 인민해방군이 진주하여 학생, 시민 등을 상대로 무차별 발포해 대규모 유혈 사태가 벌어졌다. 이렇게 봇물 터지듯 나오던 시위대를 강제 해산시킴으로써 민주화 시위를 종식시켰다. 그 결과 1990년 중국 정부의 공식 발표에 의하면 희생자 수는 민간인 사망 875명, 부상 약 14,550명, 군인 사망 56명, 부상 7,525명에 이르렀다. 이것은 덩샤오핑이 4대 현대화 과정에서 정치 현대화를 등한시하여 생긴 비극적인 결과였다.

당시 중소 정상 회담을 취재하기 위해 중국에 입국한 외신 기자들은 즉각 중국 정부가 초래한 이 유혈 사태를 전 세계에 알렸다. 국제 사회에서 중국 정부의 무차별적인 인권 탄압을 비판하는 여론이 빗발쳤고, 중국의 이미지는 크게 손상되었다. 미국과 서방 세계는 중국 정부의 비인도적 행위에 강력하게 항의하는 등 당 지도부를 거세게 비난했고, 중국에 경제 제재 조치를 단행했으며, 외교 관계 또한 악화되었다.

                                      

그러나 중국 정부는 톈안먼 사건이 질서를 회복하기 위한 불가피한 조치였다며 변명으로 일관했다. 그리고 당내에서 대대적인 권력 개편을 단행하여 자오쯔양 지지 세력을 숙청하고, 자오쯔양에 대한 언론의 언급 금지를 지시했다. 또한 상하이 시 당서기 출신인 장쩌민(江澤民)을 총서기로 선출하여 리펑, 장쩌민 체제 출발을 알렸다. 강경 보수파의 승리로 끝을 맺었으나, 중국 경제 규모가 커진 상태에서 보수 공산주의로 회귀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따라서 개혁개방 정책은 계속 추진되었다. 이후 서방 세계와의 외교 관계가 악화됨에 따라 개혁개방 정책은 다소 위축되는 양상을 보였다. 이로써 정치적 영향력이 크게 약화된 덩샤오핑은 1994년에 정계에서 물러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