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6. 9. 08:16ㆍ역사속의 오늘
1920.6.7.-봉오동 전투 승리
1920.6.4. ~7. 홍범도,최진동 이 이끄는 독립군 연합부대가 중국 지린성 허룽현 봉오동 일대에서 일본군 제19사단 월강추격대대와 전투에서 승리를 거뒀다.일본군 157명이 사망하고 300여명이 부상을 당했지만 독립군의 피해는 사망4 중상2명 뿐이었다. 봉오동 전투는 만주지역에서 독립군과 일본군 사이에 벌어진 최초의 대규모 전투였다. 봉오동 전투의 승리로 독립군의 사기가 크게 높아졌고 이후 청산리전투 등 독립전쟁이 활발히 전개되는 계기가 됐다. 봉오동 전투 사흘 전인 6.4일 독립군 30여명은 함북 종성군 강양동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 국경 초소를 급습했다. 이에 일본군 1개 중대가 뒤쫓았으나 매복해 있던 독립군의 사격에 60여명이 사살됐다. 이 일로 일본은 대규모 독립군 소탕작전에 나섰고 독립군은 봉오동 계곡지대를 따라 병력을 배치했다. 7일 오전 6시쯤 일본군이 접근하자 독립군은 사격을 하고 뒤로 빠지는 전법을 구사했다. 유인 당한 일본의 주력부대가 포위망 한가운데로 들어서자 700여명의 독립군의 총구가 불을 뿜었다. 발단은 독립군 부대가 6월 6일 함경북도 종성군 강양동의 일본군 헌병초소를 습격한 것이었다. 일본군이 1개 중대를 출동시켜 반격전을 편 데 이어 보병과 기관총대 1개 대대를 동원하자 안산과 고려령에서 기습해 유인한 뒤 타격을 가했다. 이 전투는 그 해 10월에 있은 청산리 대첩에 다소 가려진 면이 있지만 일본 정규군을 상대로 한 최초의 대승으로 독립군의 사기를 크게 올렸다는 점에서 주목할 가치가 있다. 오죽 기뻤으면 임시정부 기관지인 〈독립신문〉이 공보 호외를 발행했을까. 이에 자극받은 일본군은 중국 마적을 매수해 일본 영사관과 일본인들을 습격하도록 해 이른바 ‘훈춘 사건’ 을 일으킨 뒤 이를 빌미로 중국 당국과의 교섭도 없이 군대를 만주에 진주시켜 독립군 토벌에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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