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원봉

2019. 6. 16. 17:56역사속의 오늘

김원봉 (약산)

 독립운동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무위원이었으며, 해방 후에는 '조선인민공화국' 중앙인민위원 및 군사부장을 맡았다. 1919년 의열단을 조직했으며, 중국 황푸 군관학교를 졸업하고 1930년대 후반 조선민족혁명당을 이끌고 중국내 민족해방운동을 주도했다. 1946년 2월 조선공산당이 '민주주의민족전선'을 결성했을 때 5명의 의장 가운데 1인이었다. 1947년무렵부터 일제강점기 형사 출신 경찰에게 체포되어 고문과 수모를 받은 끝에 1948년 남북협상 때 월북, 그해 8월 북한 최고인민회의 제1기 대의원이 되었고 9월에는 국가검열상에 올랐다. 1958년 10월 북한의 최고인민회의 상무위원 부위원장직에서 해임된 후 숙청되었을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 일제강점기에 만주로 이주해 성장기를 보냈다. 1918년 금릉대학에 입학했고, 1919년 의열단을 조직하여 의백(단장)에 선임되었다. 중국 황푸[黃浦] 군관학교를 졸업했으며 1930년경 베이징에서 안광천(安光泉)과 함께 조선공산당재건동맹을 결성했고, 레닌주의 정치학교,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를 설립·운영했다.

1930년대 후반 조선민족혁명당을 지도하면서 우리나라 민족주의운동의 한 축을 이루었고, 김구(金九)의 한국국민당과 서로 대립하면서 중국 관내지역 민족해방운동을 주도했다. 또한 '조선의용대'라는 강력한 군사조직을 결성하기도 했다.1939년 5월에는 김구와 전국연합전선협회를 결성했고, 단일당 결성에 합의하여 7당통일회가 열렸으나 결국 실패했다. 1941년 6월 조선민족혁명당은 제6회 전당대표대회에서 임시정부 참가를 결의했고 '조선의용대'도 광복군 제1지대로 합편되었으며, 1942년 광복군 부사령에 취임하였다. 1944년 임시정부 제38차 회의에서 국무의원 및 군무부장에 올랐다.8·15해방 후 12월에 귀국, 여운형(呂運亨) 등을 중심으로 한 '조선인민공화국'이 결성되면서 중앙인민위원 및 군사부장을 맡았다. 1946년 2월 조선공산당이 좌익단결을 위해 '민주주의민족전선'을 결성했을 때 5명의 의장 가운데 1인이 되었으며, 중앙위원직도 맡았다. 1946년 10월 발생한 대구 10월 사건 등과 연루되었다는 혐의로 구금된 이래, 1947년까지 일제강점기 형사 출신의 경찰에게 체포와 고문, 수모를 겪었다. 이후 계속되는 좌익 단체에 대한 탄압과 테러에 실망과 좌절이 반복된 후 1948년 남북협상 때 월북, 그해 8월 북한 최고인민회의 제1기 대의원이 되었고 9월에는 국가검열상에 올랐다.

1952년 5월 북한 노동상을 맡았으며 1956년 조선노동당 제3차 대회에서 당중앙위원회 중앙위원이 되었다. 1957년 8월 최고인민회의 제2기 대의원이 되었고, 9월에는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에 올랐다. 또한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의 중앙위원 및 중앙위원회 상무위원직을 맡았다. 그러나 1958년 10월 북한의 최고인민회의 상무위원 부위원장직에서 해임되었으며, 그후 숙청되었을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