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9. 29. 11:30ㆍ대한민국 山/서울경기
如 犀 角 獨 步 行
>>>가평 유명산+용문산 종주<<<
0. 일시: 2019.9.28.(토) 09:13 ~ 15:57(6시간 44분) *136대 산 127번째/ 颱風 동행
0. 코스: 선어치재-소구니산-유명산-배너미고개-장군봉-용문산-용문사-주차장
0. 거리: 17.8km정도
날씨는 엄청 좋으면서도 넘 덥다. 버스를 타니 한참만에 만나는 山友들이 넘 반갑다. 아는분 2,모르는분 3, 이렇게 산행은 시작되었다. 100대 명산이라고 늘 인터넷에 도배를 하는 유명산과 용문산이지만 유명산은 아무것도 기억할 만한것도 없는 전형적인 육산이다.용문산은 2008년도에 올랐으니 10여년의 세월이 지난듯하고 그 당시엔 부대가 이동하고 주변이 어수선하던 기억이 나는데 지금은 부대가 재정비되어 깔끔하다. 그래도 경기의 4대산이고보니 올라볼만한 가치는 있는것 같다. 특히 유명산 주변엔 억세와 구절초가 산을 덥고 있다. 오늘 내가 밟았던 길은 나중에 또 진행할 예정인 한강기맥의 산줄기이기도 한것 같다. 용문산에서 하산길은 한참 데크공사로 인해 내려오는길은 무척이나 어려움이 많이 따랐고 마지막에 시원한 알탕으로 산행을 마무리한다. 줄거움을 선사 받은 산우들에게 감사함을 전한다.
# 용문산(1,157m)정상-과거엔 정상주변이 어수선했던 기억이 나지만 지금은 깔끔하게 재정비되어 있다. 아마도 이길은 한강기맥길이지 싶고 언젠가 또 지날일이 있지 싶은데 기약이 없다.ㅎㅎ
#1 초입지 농다치(선어치)고개-구절양장..차량이 여러번 산길을 돌고 돌아서 여기에 도달한다.
#2 소구니산-출발후1.6km지점의 소구니산, 30여분 동안 지속 오르막을 치고 오른다.
#3 3거리-유명산으로 올랐다가 이곳으로 내려와서 대부산 방향으로 내려선다.
#4 유명산(862m)- 대한민국에서 젤 유명한 유명산.ㅎㅎ 육산이라 아무것도 볼게 없다.
#4-1 함께한 단사모 산꾼들 3인방
#5 활공장- 많은 활공맨들이 열심히 날으려고 날개짓을 하고 있다. 또 따른곳에서는 신혼부부가 웨딩촬영을 위해 이 높은곳까지 와서 사진찍기에 여념이 없다. ♬결혼 참 힘드네요
#6 활공장옆 억새숲
#7 날아 오르는 패러글라이딩을 먼데서 잡아 본다.
#8 배너미고개-유명산 ATV오토 로드 켐핑장엔 ATV를 즐기고자 붐비고 있다.
#9 저멀리 용문산 부대를 배경삼아 한장 남겨본다.-출발후 12km지점
#10 용문산 장군봉(1,065m)- 용문산 정상에서1.6km떨어진곳에 위치하고 있으며 바로 하산하면 상원사로 내려와 용문사으로 연결되는 코스라고 한다.
#11 가을로 접어드니 나뭇잎이 노란색으로 색깔을 바꾸기 시작한다.
#12 용문산(1,157m) 가섭봉 정상-용문산은 화악산,명지산,국망봉에 이어 경기도에서 4번째로 높은 봉우리로 경관이 화려하고 사나사와 아시아에서 젤 오래된 은행나무가 오랜세월동안 자리를 잡고 산꾼을 기다리고 있다.
#13 용문산 마당바위- 옛날 선인들이 음주를 즐기면서 詩을 읊었지 않을까 추상해본다.
#14 용문산 용문사 대웅전
#15 용문사 은행나무-천연기념물 제30호. 높이 42m, 가슴높이의 줄기둘레 14m로 수령은 1,100년으로 추정된다. 가지는 동서로 28.1m, 남북으로 28.4m 정도 퍼져 있다.나무의 나이를 추정하는 근거는 용문사의 창건연대와 관련하여 산출하고 있다. 용문사는 649년(신라 진덕여왕 3)에 원효대사가 세웠다고 한다. 따라서 은행나무는 절을 세운 다음 중국을 왕래하던 스님이 가져다가 심은 것으로 보고 있다. 신라의 마지막 임금인 경순왕의 아들 마의태자(麻衣太子)가 나라를 잃은 설움을 안고 금강산으로 가다가 심었다는 설과, 의상대사가 짚고 다니던 지팡이를 꽂고 갔는데 그것이 자랐다는 설도 전해지고 있다.이 나무는 은행나무 중에서는 물론이고 우리나라에서 자라는 나무 중에서도 가장 큰 나무로서 조선 세종 때 당상직첩(堂上職牒) 벼슬이 내려졌다 하며, 마을에서는 굉장히 신령시하여 여러 가지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옛날 이 나무를 베고자 톱을 대었을 때 톱자리에서 피가 나오고 맑던 하늘이 흐려지면서 천둥이 쳤기 때문에 중지하였다는 이야기와 정미의병이 일어났을 때 일본군이 절을 불살라버렸으나 나무만은 타지 않았다는 이야기와 나라에 큰 이변이 생길 때마다 큰 소리를 낸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고종이 승하했을 때 커다란 가지 한 개가 부러졌고, 8·15광복, 6·25전쟁, 4·19, 5·16 때에도 이상한 소리가 났다고 한다.
#16 법구경의 한 말씀~
#17 용문산 용문사 일주문을 나서면서 산행을 마무리한다.
주)
1. 용문사 은행나무
천연기념물 제30호. 높이 42m, 가슴높이의 줄기둘레 14m로 수령은 1,100년으로 추정된다. 가지는 동서로 28.1m, 남북으로 28.4m 정도 퍼져 있다.나무의 나이를 추정하는 근거는 용문사의 창건연대와 관련하여 산출하고 있다. 용문사는 649년(신라 진덕여왕 3)에 원효대사가 세웠다고 한다. 따라서 은행나무는 절을 세운 다음 중국을 왕래하던 스님이 가져다가 심은 것으로 보고 있다.
신라의 마지막 임금인 경순왕의 아들 마의태자(麻衣太子)가 나라를 잃은 설움을 안고 금강산으로 가다가 심었다는 설과, 의상대사가 짚고 다니던 지팡이를 꽂고 갔는데 그것이 자랐다는 설도 전해지고 있다.이 나무는 은행나무 중에서는 물론이고 우리나라에서 자라는 나무 중에서도 가장 큰 나무로서 조선 세종 때 당상직첩(堂上職牒) 벼슬이 내려졌다 하며, 마을에서는 굉장히 신령시하여 여러 가지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옛날 이 나무를 베고자 톱을 대었을 때 톱자리에서 피가 나오고 맑던 하늘이 흐려지면서 천둥이 쳤기 때문에 중지하였다는 이야기와 정미의병이 일어났을 때 일본군이 절을 불살라버렸으나 나무만은 타지 않았다는 이야기와 나라에 큰 이변이 생길 때마다 큰 소리를 낸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고종이 승하했을 때 커다란 가지 한 개가 부러졌고, 8·15광복, 6·25전쟁, 4·19, 5·16 때에도 이상한 소리가 났다고 한다.
2. 양평 용문사 금동관음보살좌상
보물제 1790호인 양평 용문사 금동관음보살좌상은 상반신이 긴 편이며 오른손은 가슴 위로 왼손은 무릎 가까이에 둔 채 엄지와 중지를 맞댄 손모습을 취하였다. 상투형 머리는 높게 올려 세우고 중간을 묶어 고정시킨 후 그 끝을 부채살과 같은 형태로 말아 올렸으며 이마선 위나 어깨 위로 흘러내리는 굴곡진 머리카락 등도 촘촘히 선각하여 세밀하게 표현하였다. 방형의 얼굴은 수평의 작은 눈, 오똑한 코, 입술선이 또렷한 입, 귓바퀴와 외이도를 사실적으로 묘사한 귀 등 온화하고 인간적인 인상을 풍긴다.착의법은 오른팔 위로 편삼을 걸치고 그 위에 변형통견식의 대의를 입었는데, 오른쪽 어깨 위에 주름 잡힌 반달형 대의, 왼쪽 무릎 위 역삼각형의 옷자락, 어깨 뒤로 넘어가는 대의 끝자락 등이 특징이다. 또한 신체 전면에는 귀걸이, 목걸이, 영락장식 등으로 화려하게 장식하였다. 귀에는 둥근 화형 귀걸이를 착용하였고, 목걸이는 둥근 꽃무늬를 중심으로 구슬이 감싸듯 달려 있고, 중심 꽃무늬 좌우로 작은 화형문이 장식되어 그 아래로 크고 작은 구슬과 연봉, 장식술로 구성된 수식을 드리웠다. 또한 영락장식은 양 무릎 위에만 목걸이의 무늬와 같이 간결하게 표현되었다. 이와 같은 머리카락 표현, 변형통견식 착의법, 화려한 영락 장식 등은 서산 부석사 금동관음보살좌상(1330년), 일본 사가현[佐賀縣]에 있는 장득사(長得寺) 소장 금동보살좌상과 일본 보명사(普明寺) 소장 금동보살좌상, 충청남도 청양 운장암 금동보살좌상 등 고려 후기 보살상에 표현된 전형적인 특징들이다.
3. 양평 용문사 정지국사탑(비)
보물 제531호. 승탑의 높이는 2.15m이고, 탑비 몸돌의 높이는 1.10m이며, 너비와 두께는 각각 0.6m와 0.2m이다. 고려 말∼조선 초에 활동하였던 정지국사 지천(智泉)의 유골을 봉안한 승탑과 그의 행적과 업적 등을 기록한 탑비로, 1398년(태조 7)에 건립되었다. 용문사 은행나무의 오른쪽 산능선에 있으며, 탑비는 승탑에서 80m 정도 떨어진 아래쪽에 있다.승탑은 문인 조안(祖眼) 등이 주관하여 세웠는데, 현재까지 잘 보존되어 있다. 여러 장의 길고 큰 돌로 조립한 탑구(塔區)의 가운데에 서 있다. 바닥돌과 아래받침돌은 네모나지만, 윗받침돌과 몸돌은 단면이 8각이어서, 우리나라 승탑의 전형적인 양식인 8각원당형(圓堂形)을 계승하였다.바닥돌은 길고 큰 널돌을 넓게 결구(結構)하여 마련하였는데, 그 위에는 하나의 돌로 조성한 아래받침돌이 놓여 있다. 아래받침돌의 옆면에는 하나의 꽃잎[單葉]이 아래로 향한 복련(覆蓮)의 연꽃무늬가 각 모서리마다 1개씩, 각 변에는 5개씩 모두 24개가 새겨져 있다. 윗면의 가운데에는 네모난 2단의 낮고 높직한 굄과 함께 둥글고 낮은 1단의 굄이 마련되어 있다. 가운데받침돌은 마치 북을 엎어 놓은 것처럼 위아래의 너비가 좁고 가운데의 너비는 넓은 모습인데, 겉면에는 아무런 장식이 없이 부드러운 곡선을 보일 뿐이다. 윗받침돌은 밑면에 3단의 각진 받침이 있고, 옆면에는 하나의 꽃잎이 위로 솟아 있는 앙련(仰蓮)의 연꽃 무늬 16개가 장식되어 있다. 윗면에는 몸돌을 받치기 위해서 각진 1단의 굄을 새겼다.몸돌은 위아래부분에 덮개돌 모양과 굽 모양이 새겨져 있고, 각 면의 좌우에는 모서리 기둥이 조각되어 있다. 1면에만 문비(門扉) 모양이 새겨져 있는데, 퇴화된 양식이다. 지붕돌은 몸돌 바로 윗부분에 3단의 받침이 있고, 처마 밑에는 낮은 부연(副椽)이 조각되었으며, 각 모서리마다 각진 서까래를 두었다. 윗면인 낙수면에는 내림마루인 우동(隅棟)이 크게 두드러져 표현되었으며, 각 모서리의 전각(轉角)에는 퇴화된 귀꽃무늬가 장식되었다. 머리장식인 상륜부(相輪部)는 완전하지 않아서, 현재는 앙련을 새긴 돌 하나가 놓여 있을 뿐이다.탑비는 무덤 앞에 세우는 작은 비석인 갈석(碣石)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작은 규모이다. 윗부분은 모서리가 양쪽 모두 접힌 모습이고, 글자를 새긴 주위인 위아래와 좌우의 테두리에는 가는 선이 처져 있다. 비명은 당시에 활동하였던 권근(權近)이 지었는데, 몸돌의 앞면에 각 행마다 44자씩 모두 20행으로 새겨져 있다. 비액(碑額)은 소전(小篆)으로, 지름 4㎝ 정도의 크기이며, 비명은 지름 1.5㎝ 안팎의 해서체인 소해(小楷)로 쓰여 있다. 다만, 서형태미(書形態美)로는 소해이지만, 당시 유행하였던 당해(唐楷)의 범주에 속하는 서체이다. 몸돌의 옆면에는 아무런 기록이 없고, 뒷면의 비음(碑陰)에는 당시의 찬조자 명단이 6단 21행으로 적혀 있다. 이 탑비는 바위 위에 있는데, 아래부분의 왼쪽이 약간 파손된 것을 제외하면 비교적 양호한 상태이다. 깔끔한 필치와 정갈한 구성이 돋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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