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10. 18. 14:29ㆍ역사속의 오늘
>>>대전자령 전투<<<
0. 일시: 1933. 6. 30.
0. 장소: 중국 연변자치주 왕칭현 태평령
1930년 홍진(洪震)·지청천·신숙(申肅) 등은 한족자치연합회를 모체로 한국독립당을 조직하고 소속 독립군으로 ‘한국독립군’을 편성하여 일본군에 대한 항전을 전개하였다. 1931년 한국독립군 총사령관 지청천은 중국군과 연합 작전을 전개하기로 결정하고 중국호로군 사령관(中國護路軍司令官)과 협의하여 한중연합군을 편성하였다. 이후 중국 의용군이 분화함에 따라 길림구국군과 연합하여 중한연군토일군(中韓聯軍討日軍)을 조직하기도 했다. 1932년 독립군과 중국 의용군은 연합하여 쌍성보(雙城堡)·사도하자(四道河子)·동경성(東京城) 등지에서 전개된 전투에서 대승을 거뒀다.동경성전투 이후 한국독립군과 길림구국군 시세영(柴世榮) 부대는 1933년 6월 25일경 동서검자에 이르렀다. 여기서 연합군은 대전자에 주둔 중인 일본 19사단 소속 간도파견군이 연지시엔[延吉縣]으로 철수한다는 첩보를 입수한다. 연합군은 3일간 100㎞를 행군하여 28일경 대전자 북방 노모저하(老毋猪河)에 도착하였다.연합군은 부대를 3분하여 각 요지에 배치하였는데, 공격의 주동은 한국독립군이 담당하게 되었다. 연합군은 이곳에서 추위와 굶주림을 무릅쓰며 30일까지 매복하였다. 30일 아침 6시경 일본군은 많은 장비를 가지고 대전자령을 향해 출발했다. 오후 1시경 일본군 전초부대가 대전자령 깊숙이 들어왔다.일본군 후미가 산중턱에 이르렀을 무렵, 연합군은 일제히 사격을 퍼부었다. 불의의 기습을 받은 일본군은 대부분 총탄에 쓰러졌으며, 4시간의 격전 끝에 연합군은 일본군의 군복 3,000벌, 군수품 200여 마차, 대포 3문, 박격포 10문, 소총 1,500정, 담요 300장 등 막대한 전리품을 노획하였다. 그런데 전리품을 독립군과 중국군이 분배하는 과정에서 불화가 생겨, 연합은 곧 깨지고 말았다. 대전자령 전투(大甸子嶺戰鬪)에서 대승을 거둔 한국 독립군은 대전자 시가(市街)로 들어가 군수품을 분배하고 무장을 강화하면서 부대를 재편하였다. 오랫동안 일제의 압박 아래 고난받던 교포들로부터 환영을 받으면서 군세가 더욱 강화되어 바야흐로 나자구(羅子溝) 일대는 반만항일군(反滿抗日軍)의 근거지가 되었다. 이 무렵, 백두산 근처의 안도현 일대에서 활동하고 있던 길림구국군(吉林救國軍) 총사령관대리 오의성(吳義成)은 대전자령 전투(大甸子嶺戰鬪)에서 한,중 연합군이 승리했다는 소식을 듣고 자신이 지휘하던 부대를 이끌고 대전자로 이동하여 왔다. 이에 따라 종래 1~4로로 분리되어 있던 중국 의용군은 합대하게 되었다. 지청천 장군이 총지휘하는 한국 독립군도 오의성이 지휘하는 중국 의용군과 합대하게 되었다.
이렇게 군세를 강화한 한,중 연합군은 작전회의를 거쳐 동녕현성(東寧縣城)을 공격하기로 하였다. 동녕현성은 일제의 중요한 정치적 거점으로써 이곳에는 일본군 일개 부대 500여명과 만주국군 연대 병력 약 2천여명이 주둔하고 있었다. 그리고 장갑차 등의 현대적 무기도 갖추고 있었다.
오의성(吳義成)이 지휘하는 길림구국군(吉林救國軍)에는 시세영(柴世榮), 사충항(史忠恒), 금산(金山) 등의 부대가 예속되어 있었는데, 한국 독립군은 이들과 연합작전(聯合作戰)을 통해 동녕현성을 공격하였다. 이 작전에는 중국 공산당의 왕청 및 훈춘 유격대도 이 작전에 참가하였다. 작전은 9월 6일 오전 2시경부터 시작되었는데, 연합군의 주공 병력은 동문, 서문, 남문을 공격하고 중공 유격대는 서문 밖에 위치한 서산포대(西山砲隊)를 습격하기로 하였다.
한국 독립군은 사충항(史忠恒)의 부대와 더불어 서문을 공격하였다. 동녕현성의 서문을 지키던 적군은 박격포(迫擊砲)와 기관총(機關銃)을 난사하며 완강한 저항을 시작하였다. 약속된 증원부대와 탄약 지원이 제때에 이어지지 않았고 서문 쪽의 서산포대가 끊임없이 연합군을 공격하여 사충항의 부대와 한국 독립군은 고전(苦戰)을 면치 못했다. 그러나 지청천 장군의 독전(督戰)과 한국 독립군 별동대의 용전분투(勇戰奮鬪)로 연합군은 치열한 격전 끝에 서문을 돌파하는데 성공하였다. 동문과 남문 공략을 맡은 시세영(柴世榮), 금산(金山) 등의 부대는 비교적 순조롭게 성문을 돌파하고 동녕현성 시가지에 진입하였다. 연합군이 성의 세 방면을 돌파하자 일본군과 만주국군은 성내의 한구석을 차지하고 계속 저항하였다.
전투는 이튿날 아침가지 지속되었는데, 일본군은 대포와 장갑차를 앞세우고 대대적인 반격을 시도하였다. 일만양군(日滿兩軍)의 중화기(重火器) 공세에 한,중 연합군은 전세가 불리하게 되어 적군의 증원부대가 올 것을 우려하고 성에서 철수하였다. 일본군과 만주국군이 많은 병력을 투입하여 연합군을 추격해와 연합군은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특히 서문 방향을 공격하던 한,중 연합군은 적군의 집중 포화로 큰 타격을 받았는데, 전투 도중에 군의감 강진해(姜振海) 등 장교 수십명이 전사하였고 한국 독립군 총사령관 지청천 장군과 길림구국군 여단장 사충항도 부상을 입었다.한국 독립군이 중국 의용군과 협동작전(協同作戰)을 펼쳐 진행한 반만항일전(反滿抗日戰)의 마지막 전투인 동녕현성 혈전(東寧縣城血戰)은 안타깝게도 한,중 연합군의 패배로 끝났다. 그러나 일만양군(日滿兩軍)도 5백여명이 전사하고 2백여명이 부상당했으며, 장갑차 1대가 파손되는 피해를 입었다.한,중 연합군은 동녕현성에서 일시 후퇴하여 곧 적군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한 연합군 고급 장령 작전회의를 가졌다. 지청천 장군은 상황을 검토한 후에 정보와 작전 전략에 따라 동녕과 목릉 두 방면을 집중적으로 방어할 것을 제기하였다."지금 적정(敵情)을 살펴보니 현실적으로 목릉 족에서 적의 공격 가능성이 예상되므로 우리 한국군이 목릉 쪽을 방어하고 중국군은 동녕 쪽을 방어하는 것이 군사적으로 합당하다고 판단되오."그러나 오의성 휘하 길림구국군(吉林救國軍) 참모장 주보중(周保中)은 다른 의견을 내놓았다."적군은 분명 동녕, 목릉, 영안, 백초구 방면에서 공격해올 것이오. 그러나 각 부대를 4로로 나누어 배치해야 하오. 이는 한국군도 마찬가지요."
지청천 장군은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주보중의 말을 받았다.
"우리 연합군은 동녕현성의 전투 패배로 엄청난 사상자가 나왔소. 그런데 전 부대를 4로로 나눈다는 것은 오히려 군세를 분열시킬 수가 있소이다. 게다가 중국군에 비해 병력과 무기가 상대적으로 약한 한국군마저 4로로 나누는 것은 올바른 방도가 아니오."
하지만 오의성을 비롯한 중국군 지휘관들은 모두 주보중의 의견에 동조하고 있었다.
"적이 대병력인지라 아군을 사방에서 포위하고 협공할 가능성이 매우 큽니다. 지 장군게서는 본인과 함께 후방에 남아 총작전을 지휘하는 것이 좋겠소."
지청천은 자신의 작전 계획을 강경하게 주장할 경우 한,중 연합작전(韓中聯合作戰)의 기반이 무너지게 될 것을 염려하여 일보 후퇴하였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사실은 주보중이 의도적으로 도모한 것이었다. 중국 공산당 만주성위(滿州省委) 위원이던 주보중은 공산당의 정치적 영향력을 증대하기 위해 길림구국군 내부에 들어와 공산당의 정책을 실현함으로써 사충항(史忠恒), 시세영(柴世榮), 부현명(傅顯明), 왕여기(王汝起) 등을 자신의 주위에 포진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중국 공산당의 입장이 민족주의적 입장에 서 있던 한국 독립군에게는 통용되지 않았던 것이다.
당시 지청천은 한국 독립군을 지휘하여 반만항일전(反滿抗日戰)을 펼치는 한편, 한국 독립군의 외위 조직을 만들기 위하여 각지의 민족주의자들을 규합하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이러한 외위 지원 단체가 조직될 때 비로소 한국독립군의 군세를 강화시키고 더욱 견결하게 항일독립전쟁(抗日獨立戰爭)을 진행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중공당원(中共黨員)인 주보중 입장에서는 이러한 민족주의 진영의 강화에 대하여 모종의 조치를 취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길림구국군 내 장령들을 공산주의 진영으로 끌어들이고 민족주의 진영에 대한 배척 움직임을 조장하게 되었던 것이다. 주보중이 일본군의 한,중 연합군 공격에 대비하여 한,중 연합군을 4로로 나눈 것도 바로 한국 독립군의 세력을 분화시키려는 의도가 있었다.
당시 한국 독립군은 비록 길림구국군과 연합작전을 펼치고 있었지만 항상 독립적인 부대 단위를 유지하면서 전투의 주공을 담당하여 중국 의용군 병사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있었다. 따라서 한국 독립군의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해서는 독립적 부대 단위를 해체시키고 각 중국 의용군 단위 부대 내에 배속시킬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한국독립군의 세력을 약화시키는 효과와 더불어 중국 공산당의 길림구국군 내부의 통제력 강화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4로로 분리된 한국 독립군이 자신의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자 주보중은 세 배의 병력으로 한국 독립군에 대한 무장 해제에 나섰다.한국 독립군에 대한 탄압에는 주보중 뿐만 아니라 시세영도 가담하고 있었다. 대전자령 전투에서 획득한 군수물자 분배에 대하여 일찍부터 불만을 품고 있던 시세영은 한국 독립군 수뇌부를 제압하고 독립군의 총기(銃器)와 탄환(彈丸)을 전원 압수하자는 주보중의 제안에 동의하였던 것이다.
"이게 무슨 짓이오?"
중국 의용군 병사들이 느닷없이 한국 독립군 막사로 몰려와 총으로 위협하며 무기를 압수하자 한국 독립군 총사령관인 지청천 장군은 크게 반발하며 시세영과 주보중에게 호통을 쳤다.
"당신들 미친 거 아니오? 적군의 공격에 대비하는 마당에 같은 아군끼리 뭐하는 것이오!"
주보중이 교활한 미소를 지으며 지청천을 노려보았다.
"내 일군(一軍)의 지휘관인 당신에게 험한 꼴을 당하게 하기는 싫으니 조용히 연행에 응하시오.""무슨 이유로 이러는 것인지 말하시오!"
"그대들은 항일전(抗日戰)의 전공을 독차지하고 일본군을 격파한 이후에 노획한 군수물자를 모두 한국 독립군이 접수하도록 했소. 그대들은 길림구국군과 연합하는 부대로서 마땅히 우리 구국군 사령부의 지휘를 받아야 하는데 독단적으로 행동하여 아군 전체의 단결을 방해하였소. 그러므로 그대들의 죄를 물어 책임을 묻고자 하니 군소리 말고 따르도록 하시오!"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노릇이었다. 주보중과 시세영은 지청천 장군 이하 한국 독립군 수뇌부 80여명을 구금한 뒤 다시 많은 병력을 동원하여 4개처에 분산배치되었던 독립군 부대를 포위하고 전원의 무장해제를 강요하였다. 결국 이러한 사태로 한국 독립군은 장교 등 330여명이 체포되어 대전자 시가에 구금되었고, 다수의 대원이 사산(四散)·도주하고 말았다. 이를 계기로 한국 독립군은 무기를 모두 박탈당하여 해체의 위기에 직면하였다.
그러나 길림구국군의 장교회의에서 토론 결과 오해가 풀어져 한국 독립군의 장령 대부분이 석방되었다. 어려운 때를 당하면 사나이의 의기가 드러나게 마련이다. 당시 오의성은 한국 독립군의 지휘관들 대부분을 석방하였으나 지청천과 중대장 고운기(高雲技)는 석방하지 않고 체면상 한사람을 처형하겠다고 하였다. 이에 고운기는 스스로 나서서 "장래의 항일전(抗日戰) 활동을 생각할 때 총사령관님은 앞으로 하실 일이 많기 때문에 내가 목숨을 내놓겠다."라면서 자신의 목숨을 바쳐 지청천을 구하고자 하였다. 이에 지청천과 조경한이 시세영을 찾아가 고운기의 구명을 호소함으로써 그도 석방이 되었다. 한국 독립군의 군의관으로 활동하던 신흘(申屹)은 지청천의 피체 소식을 듣고 자결하려 하다가 주위의 만류로 생명을 건지게 되었다. 한국 독립군 지휘관들이 체포되었다가 석방되면서 주보중은 이 일이 자신의 의도대로 되지 않자 길림구국군 진영을 떠났다.
이러한 갈등과 불화의 과정을 거치면서 1930년대 초반 동만주 지역에서 활발한 반만항일전(反滿抗日戰)을 펼쳤던 한,중 연합군은 결국 세력이 약화되고 마침내는 분리되어 한,중 연합전선(韓中聯合戰線)은 해체되었다. 한국 독립군이 중국 의용군 측과 완전히 갈라서게 되자 10월에 이르러 일본군의 무장 항일투쟁 단체에 대한 대대적인 토벌을 시작하였다.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 산하 군사조직으로서 1931년 11월부터 1933년 9월에 이르기까지 중국의 각종 항일전(抗日戰) 노선 군사단체와 합작(合作), 때로는 대규모의 공선전투를 벌이고 때로는 매복 기습작전을 전개하면서 일본군에 큰 타격을 주고 항일독립전쟁(抗日獨立戰爭)의 깃발을 높이 휘날렸던 한국독립군(韓國獨立軍)은 중국 공산당원에 의한 공작과 중국 의용군과의 갈등으로 인해 무장 해제를 당하고 항전력이 고갈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상해의 임시정부에서 인원을 파견하여 지청천 장군과 한국 독립군 장령의 군사적 이동을 요청해왔다. 즉 중국 정부와 교섭이 되어 군관학교를 세우게 되었으니 관내로 이동하여 군사 인재의 양성에 힘써 달라는 내용이었다."일본 제국주의의 무력적(武力的) 침략은 만주에만 그치지 않고 장래에 중국 본토로 이어지고 결국에는 아시아 전체를 향해 그 야욕의 이빨을 드러낼 것입니다. 나는 임시정부에서 진언한 대로 관내에서 군사 인재를 양성하여 만주로 파견할 경우, 관내와 만주를 잇는 대대적 항일전(抗日戰)의 가능성이 싹트게 된다고 생각하오."
지청천은 한국독립당 중앙집행위원장인 홍진과 의논한 끝에 객관적 정세와 한국 독립군의 역량을 고려하여 대승적으로 행동할 것을 결정하였다. 그리하여 일단 관내로 들어가 상황을 검토한 후 중국 국민정부의 지원 약속대로 관내에서 장기 항전의 여건이 충족되면 그 길을 택하고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다시 만주로 돌아오기로 하였다. 그러나 한국 독립군 전체가 관내로 이동할 수는 없는 일이므로 최악, 안태진 등이 잔여부대를 이끌고 밀산, 호림 지역으로 이동하고 지청천을 비롯한 한국독립당 및 한국독립군 지도부와 군관학교에 입교할 청년 독립군 50여명은 관내로 이동하게 되었다.만주사변 이후 1930년대의 무장 항일투쟁(武裝抗日鬪爭)은 점차적으로 간고해짐에 따라 조선혁명군(朝鮮革命軍)을 지휘하던 양세봉(梁世奉), 고이허(高而虛) 등은 일제에 항거하여 치열한 전투를 벌이다가 대일항전(對日抗戰)의 대열 한가운데에서 장렬하게 순국하였다.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의 지청천(池靑天), 홍진(洪震), 김학규(金學奎) 등은 관내로 이동하여 장기적인 항전을 계획하고 산해관을 넘었다. 그러나 시운이 불리해지자 의지가 약하고 부귀를 탐하는 인사들은 조국 독립의 길은 어렵다고 판단하고 일제에 귀순하여 친일파로 변절하였다. 이탁(李拓), 권수정(權輸淨), 김이대(金以代), 박관해(朴觀解) 등이 그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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