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8. 3. 19:46ㆍ팔공산 자락
如 犀 角 獨 步 行
>>>동화사와 6암자 종주<<<
0. 일시: 2024. 8. 3. 09:11 ~ 12:08 (2시간 57분) * 나홀로
0. 코스: 탑골주차장-일주문-동화사-통일대불-약수암-비로암-부도암-염불암-양진암-내원암-원점
0. 거리: 8.8km
(*구간별 거리: 일주문-(0.9/0.9)통일대불-(0.8/1.7)약수암-(0.9/2.6)비로암-(0.7/3.3)부도암-(1.7/5.0)염불암-(1.5/6.5)3거리(경유)-(0.5/7.0)양진암-(0.3/7.3)내원암-(1.5/8.8)일주문)
오늘은 8월03일이라 속칭 팔공산날이라고한다.(믿거나말거나) 더운 날씨지만 팔공산엔 전국으로 유명한 동화사가 자리잡고 있다. 그 주변에 있는 6암자를 만나러 일정을 잡아본다. 동화사주변은 수시로 다녔지만 2암자의 이름은 생소하다보니 내 기억에 없는 암자인것 같은 느낌이다. 애마에 내려 일주문에 들어서니가 햇볕이 엄청 따갑게 와닫는다. 계란을 땅바닥에 깨뜨리면 프라이가 될 정도다. 일주문을 들어가면서 순례길에 접어든다. 바깥날씨는 더웠지만 속세의 날씨는 그런대로 견딜만한 온도인것 같다. 원래 구)주차장에서 마애여래좌상을 먼저 보고 출발할려고 했지만 3천원 주차비가 있어 탑골 일주문로 주변에 주차를 하고 매표소 일주문으로 진입한다. 걷다보니 산속 구석구석에 차들이 주차되어 있고 사람들은 흐르는 시냇물에 발을 담가 3355모여서 담소를 하는 꾼들이 눈에 많이 들어온다. 전부다 더위에 지쳐 오름을 포기한듯하다.ㅎㅎㅎ 그래도 거주지 주변에 있는 6암자길을 한번 걸어봄이 삶의 원동력이 되지 않을까생각해본다. 지금까지 통도사19,해인사16,운문사4 암자길을 걸었다. 어느날 훌쩍 떠나는 길이 또 누군가가 따르는 족적이 되지 않을까하여 하나하나를 재미나게 진행해본다.이게 사람이 살고 있는 조그마한 삶의 한 부분이 아닐까 움직임은 樂의 배가되는것 같다.
# 들머리 일주문- 삶에 구도의 길을 떠나듯 무거운 가방을 짊어진 나그네의 힘찬 발걸음속에 속세의 문을 두드리며 잠시나마 유유자적한 순간을 찾아보고자한다.(유유자적:속세를 떠나 아무 속박없이 조용하고 편안하게 사는 삶)
1. 동화사-동화사(桐華寺)는 팔공산을 대표하는 사찰로 대구광역시 동구 도학동에 있으며,대한불교 조계종 경북 5대 본산 중의 하나이자 대한불교 조계종 제9교구 본사이다. 대표적인 말사로는 운문사, 파계사, 부인사, 북지장사, 남지장사, 유가사 등이 있다.1992년에 만들어진 세계 최대 석조 약사여래불인 동화사 통일약사여래대불이 또한 유명하다. 높이가 33m에 이른다. 동화사의 랜드마크다.동화사는 심지대사의 지팡이가 자란 것으로 겨울에도 꽃을 피웠다고 하는 오동나무가 동화사라는 이름의 유래가 된다. 동화사(桐華寺)의 동(桐)은 오동나무 "동"자이고, 화(華)는 "빛나다, 화려하다, 꽃"이라는 뜻이 있으므로 오동나무 꽃이 아름다운 절이다라는 뜻이다.창건은 신라시대 493년(소지왕 15년)에 극달화상(極達和尙)이 유가사(瑜伽寺)란 이름으로 창건하였으며 원래는 오동나무와는 상관이 없었다.이후 통일신라시대 832년(흥덕왕(興德王) 7년) 심지조사(心地祖師)가 중창을 하면서 동화사(桐華寺)라는 이름으로 바꾸었다.동화사의 유래에는 2가지 설이 있다.심지대사가 던진 지팡이가 자란 오동나무에서 유래했다.동화사를 상징하는 오동나무는 심지대사가 던진 지팡이가 자란 것이라고 한다. 이후 유가사란 이름을 동화사로 바꾸었다.원래 심어져 있던 오동나무에서 유래했다.심지조사(心地祖師)가 중창할 당시, 원래 유가사에 오동나무가 있었다고 한다. 겨울인데도 오동나무가 꽃을 피운 것을 보고 상서로운 징조로 여긴 심지조사(心地祖師)가 동화사(桐華寺)라고 이름을 고쳤다고 한다.
# 통일대불- 동화사의 남쪽 산자락에 1만여 평의 대도량을 조성하고, 좌대 높이 13m를 포함하여 30m 높이의 석불이다. 2.000t에 달하는 불상과 3.000t무게의 좌대석은 전북 익산의 황등석을 썼으며, 108명의 석공들이 약 7개월 동안 만들었다. 각계 전문가들의 고증ㆍ조언을 거쳐 조성되어 예술적으로도 높은 평가를 받는다. 이 도량에 오르는 계단은 108개로 하여 백팔번뇌를 상징하였고, 석불 맞은쪽에는 약사대불을 지킬 통일대불전이 조성되었다. (6월달에 왔으니 2달만에 또 방문이다.)/ 출발후 0.9km 16분 경과
# 약수암오름길의 돌계단-이곳을 넘으면 사찰음식체험관과 템플스테이지가 나오면서 약수암으로 연결된다.
# 사찰음식 체험관과 주변 템플스테이지
2. 약수암(藥水庵)-약수암은 동화사의 산내암자로서 폐허가 되다시피한 약수암을 성문스님이 동화사 주지로 재임하시면서 가람을 새롭게 조성하고 관세음보살님을 모시고 점안하게 됐다. 간장병에 효험이 있다는 구세약수(求世藥水)가 있다고 전한다. 원통보전, 정심당, 청허당, 보장각, 요사채 등으로 이루어져있다.
/ 출발후1.7km 29분 경과
# 구세약수로 유명하다는 약수를 한병 담아본다.
3. 비로암-비로암은 통일신라 민애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세워진 암자로 대구광역시 팔공산 자락에 위치한 큰 사찰인 동화사(桐華寺)에 딸린 부속암자 중 하나인 비로암으로 동화사 경내 옆에 위치하고 있다. 동화사 중심영역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작은 암자로 주불전인 대적광전과 작은 요사채 건물로 되어 있으며 마당에는 통일신라시대에 조성된 삼층석탑(보물)이 있다.삼층석탑에서는 납석으로 만든 사리그릇(보물)과 불상을 새긴 금동판이 발견되었다. 사리그릇 표면에는 통일신라말 왕위쟁탈 과정에서 죽은 민애왕을 위해 조성했다는 기록이 글자로 남아 있다. 또한 대적광전에는 삼층석탑과 같이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석조비로자나여래좌상(보물 )이 남아 있다. 민애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비로암이 세워졌음을 추정할 수 있다.(*민애왕(재위:838-839/신라44대왕이자 38대 원성왕의 손자 대야찬 충공의 아들이며 43대 희강왕의 처남으로 이름은 김명이다. 시중벼술을 하다 흥덕왕 사후 왕위계승 분쟁에 휩쓸렸는데 838년 시중 이홍과 함께 희강왕을 협박 자결케하고 스스로 왕이 되었고, 재위 2년 김우징이 장보고의 힘을 빌어 민애왕을 죽이고 우징이 45대 신무왕(재위 3월:병사)으로 즉위하였다.이 일로 신라의 분열과 왕권의 추락으로 신라의 멸망의 주요 원인이 되었다고한다.) / 출발후 2.6km 51분 경과(10분 포함)
# 비로암3층석탑
# 민애왕의 사리 그릇-전 대구 동화사 비로암 삼층석탑 납석사리호(傳 大邱 桐華寺 毘盧庵 三層石塔 蠟石舍利壺)는 동화사 비로암 삼층석탑(보물 제247호) 내에서 발견된 통일신라시대의 사리 항아리이다.사리를 탑에 보관하기 위해 사용된 이 항아리는 높이 8.3cm, 아가리 지름 8.0cm, 밑지름 8.5cm이다. 현재는 크고 작은 4개의 조각으로 깨졌고, 뚜껑도 없어졌으며 몸통도 완전하지 않은 상태이다. 이와 같은 손상은 도굴 당시에 입은 피해로 보인다.아가리가 넓고 어깨가 부풀어 있으며, 아랫부분이 좁은 항아리 모양으로 작고 아담하다. 이러한 형식은 법광사 삼층석탑, 취서사 삼층석탑에서 출토된 사리 항아리와 같은 것으로 9세기 중엽 신라에서 유행하던 양식이다. 항아리 표면 전체에 흑칠을 한 점이 특이하다. 어깨부분에는 꽃 구름무늬와 촘촘한 빗금 꽃무늬를 두 칸에 나누어 새겨 둘렀다.몸통에는 가로, 세로로 칸을 내어 7자 38행의 글자를 음각하였다. 글 중에는 이 항아리가 신라 민애왕(재위 838∼839)을 위하여 건립된 석탑과 연관이 있으며,민애왕의 행적들이 꼼꼼하게 적혀있다. 또한 탑을 만든 시기가 경문왕 3년(863)임을 알 수 있게 하는 내용이 있다. 이것은 현재 서울 동국대학교박물관에 보관중이다. (서울 중구 필동로1길 30(장충동1가)
# 비로암 비로자나불-신라 44대왕인 민애왕(재위 838∼839)의 명복을 빌기 위해서 만든 대구 동화사 비로암 삼층석탑(보물 제247호)과 동시에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되는 높이 1.29m의 불상이다.둥근 얼굴은 풍만하고 눈·코·입이 작아지고 있으며, 미소가 사라지고 단아한 모습이다. 8세기 불상에 비해 어깨는 뚜렷하게 좁아졌으며, 가슴은 평평하고, 하체의 처리도 역시 둔화되었다. 이러한 위축되고 둔화된 표현은 9세기 중엽에 나타나는 전형적인 불상양식이다. 손모양은 비로자나불이 일반적으로 취하고 있는 모습으로 왼손 검지를 오른손으로 감싼 형태이다. 옷은 양 어깨를 감싸고 있는데, 규칙적으로 얇은 평행의 옷주름선이 있고, 아랫도리에 있는 U자형 무늬가 특이하다. 부처의 몸 전체에서 나오는 빛을 형상화한 광배는 배(舟) 모양으로, 가장자리를 불꽃이 타오르는 모양으로 표현하였다. 광배의 꼭대기 부분에는 삼존불, 양쪽에는 8구의 작은 부처가 배치되어 있다. 대좌(臺座)와 광배(光背)를 갖추고 있으며 손상이 거의 없는 9세기에 유행하던 비로자나불상의 대표적인 예이다.
주)비로자나불은 사람의 육안으로 볼 수 없는 광명의 부처를 의미한다. 비로자나불은 때와 장소 및 사람 등에 따라 여러 가지 모습으로 나타낸다. 이는 비로자나불이 잠시도 쉬지 않고 진리를 설파하여 일체중생을 제도하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나라에서는 비로자나불을 봉안한 전각을 대적광전 또는 대광명전이라 한다. 비로자나불상은 보통 왼손 집게손가락을 오른손으로 감싸 쥐는 지권인을 취하고 있다. 그런데 고려 말부터는 지권인이 변형되어 왼손을 오른손으로 감싼 형태가 나타난다. 비로자나불에 의해서 정화된 세계는 바로 우리들이 살고 있는 현실 세계를 의미한다.
4. 부도암( 浮屠庵 )-부도암은 동화사에서 팔공산 정상으로 오르는 길목에 자리잡고 있는데, 이 암자 동쪽으로 멀찌기 떨어진 산 기슭에 이 부도가 놓여 있다. 부도란 승려의 무덤을 상징하는 것으로 시신을 화장한 후 나오는 유골이나 사리를 모셔두는 곳이다.비교적 작은 규모인 이 부도는 현재 무너진 상태로 있는데, 3단을 이루는 기단(基壇)과 탑몸돌, 지붕돌을 갖추었고 각 부분이 8각의 평면을 기본으로 삼고 있다. 기단은 모두 하나의 돌로 이루어져 있어서, 원형을 이루는 맨 아래와 윗부분에는 연꽃을 새겨 두고, 8각을 이루는 가운데에는 모서리마다 배흘림 모양의 기둥을 본떠 새겨 놓았다. 탑몸돌 역시 여덟 모서리가 기단에서 보이던 얕은 배흘림의 기둥 모양을 하고 있다. 지붕돌은 윗면의 여덟 모서리선을 뚜렷이 표현해 놓았고, 각 선이 미끄러지는 끄트머리에 덩쿨무늬를 한 꽃조각을 돌출되게 조각하였다.8각을 이루는 모습의 부도는 통일신라시대에서부터 유행하던 것이나, 이 부도는 조선시대 임진왜란 이후에 세운 것으로 보인다. 비록 꼭대기의 머리장식도 사라지고 무너져 있긴 하나, 각 부분들은 대체로 본래의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다. / 출발후 3.3km 1시간 3분 경과
5. 염불암-팔공산 정상을 오르면 수시로 지나치는 염불암인데 오늘따라 오름길이 넘 빡세게 느껴진다.대한불교조계종 제9교구 본사인 동화사(桐華寺)의 부속암자로 동화사에서 서북산정으로 3㎞ 지점에 위치하며 928년(경순왕 2)에 영조선사(靈照禪師)가 창건하였으며, 고려 중기에 보조국사(普照國師)가 중창하여 1438년(세종 20)에 재중창하였다.그 뒤 1621년(광해군 13)에는 유찬(惟贊)이 중창하였고, 1718년(숙종 44)과 1803년(순조 3), 1841년(헌종 7)에 각각 중수하여 근대에 이르러서는 1936년에 운경(雲耕)이 1962년에 혜운(慧雲)이 중건하였다.현존하는 당우로는 극락전과 동당(東堂) · 서당(西堂) · 산령각(山靈閣) 등이 있다. 극락전에는 아미타불과 관세음보살 · 지장보살을 봉안하였는데, 그 후불탱화(後佛幀畵)는 부드럽고 섬세한 기법으로 그린 것으로 1841년의 중수 때 제작된 것으로 짐작된다.중요문화유산으로는 극락전 옆의 암석에 새겨진 마애여래좌상 및 보살좌상이 1988년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현, 유형문화유산)로 지정되었으며, 1988년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청석탑이 있다. 마애불상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한다.옛날 이 암자에 있던 한 승려가 이 바위에 불상을 새길 것을 발원하였다. 그러던 어느날 암자 주변에 안개가 끼기 시작하는데 7일 동안이나 걷힐 줄을 몰랐다. 7일 만에 안개의 걷힘과 함께 법당에서 나온 승려가 바위 곁에 가보니 발원하였던 불상이 바위 양쪽에 새겨져 있었다고 한다.이 불상은 문수보살이 조각하였다고 전해진다. 또 염불암이라는 이름은 이 불상이 새겨진 바위에서 염불소리가 들렸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청석탑은 극락전 앞마당에 있는데, 보조국사가 쌓았다고 하며, 아랫부분 3단이 화강암으로 되어 있고 위쪽 10단이 수마노석으로 된 높이 1.4m의 13층탑이다. 현재는 상층부 5층이 깨어져나가거나 갈라져 있다.이 탑에는 이 절 일대에 칡덩굴을 찾아볼 수 없는 이유와 관련된 전설이 얽혀 있다. 보조국사가 이 탑을 쌓기 위하여 나무로 말을 만들어 타고 서해의 보령과 대천에서 수마노석을 운반해서 돌아오던 도중에 산길을 오르던 목마의 다리가 칡덩굴에 걸려 부러지고 말았다.보조국사는 이에 크게 노하여 산신을 불러서 암자 부근에 있는 칡덩굴을 모두 없애라고 명령하였는데, 그 이후로 이 암자 아래의 양진암에서 상봉에 이르는 산등성이에는 칡이 자라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이 밖에도 서당 뒤편에는 오인석(五人石)이라 새겨진 책상 세 개 정도의 네모난 바위가 있는데, 이는 고려 태조 왕건이 견훤과의 싸움에서 패하여 도망갈 때 그의 신하 5명이 쉬었다는 설과 옛날 다섯 고승이 견성(見性)을 하였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설이 있다. 염불암은 동봉 남쪽 아래 해발 900여m에 위치하여 팔공산 내의 암자 가운데 가장 전망이 좋은 곳으로 알려져 있다. / 출발후 5.0km 1시간 48분 경과(휴식시간 21분 포함)
# 부도암3거리-한참 공사가 진행중이라 장비소리가 시끌벅적...염불암을 경유하여 이곳으로 다시 돌아와서 양진암과 내원암으로 향한다./ 출발후 오름 3.5km 내림6.5km 2시간 12분 경과(휴식시간 21분 포함)
6. 양진암- 대구광역시 동구 팔공산(八公山)에 있는 조선후기 승려 무주대사가 창건한 암자로 대한불교조계종 제9교구 본사인 동화사(桐華寺)의 부속암자이다. 동화사에서 서북쪽으로 800m 지점에 위치하며, 1743년(영조 19)에 무주대사(無住大師)가 창건하였으며, 1898년에는 춘파화상(春坡和尙)이 중수하였다.1950년 초에 속리산 수정암(水晶庵)에 있던 비구니 성련(性蓮)이 이곳에 와서 선원(禪院)을 열었으며, 1980년 8월에 퇴락한 당우들을 중건하였다. 1998년에는 관음전을 짓고 42수(手)관음보살을 봉안하였으며, 요사인 육화당(六和堂)을 건립하였다. 2000년 2월에는 사미니 기초선원이 개원하여 오늘에 이른다.현존하는 당우는 인법당(因法堂)을 중심으로 동쪽에 정묵당(靜默堂), 서쪽에 미소실(微笑室)이 있다. 정묵당은 참선 후 몸과 마음을 조용히 쉬는 장소로, 미소실은 요사로 사용되고 있다. 비구니의 참선도량으로서 현재에도 비구니들이 하루 12시간의 입선고행(入禪苦行)을 하고 있다. / 출발후 7.0km 2시간22분 경과
7. 내원암-대구광역시 동구 팔공산(八公山)에 있는 조선후기 문신 유찬이 창건한 암자 대한불교조계종 제9교구 본사인 동화사(桐華寺)의 부속암자로 미륵보살의 상주처인 도솔천(兜率天) 내원궁(內院宮)을 상징하여 내원암이라 하였다.1626년(인조 4)에 유찬(惟贊)이 창건하였고, 1823년(순조 23)에 해월(海月)과 제월(齊月)이 중창하였으며, 1937년에 보월(普月)이 다시 중창하였다. 1958년에 가야산 국일암(國一庵)에 있던 비구니 장일(長一, 1916∼1997)이 이곳으로 옮겨와 비구니들의 참선도량을 개설하였고, 1966년에는 장일이 중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원형의 인법당(人法堂)을 중심으로 동쪽에는 요사채인 무주헌(無住軒)이 있고, 서쪽 뒤편에 약사여래를 모신 관음전이 있다. 이들 당우는 단청을 하지 않아 나무의 빛깔 그대로가 살아 있다.
/ 출발후 7.3km 2시간 30분 경과
# 장일스님의 멍텅구리비-멍텅구리 멍텅구리 모두가 멍텅구리 온곳을 모르는 인간이 가는곳은 어떻게 안단 말인가?~~~백년도 못사는 인생 천만년 죽지도 않을것처럼 끝없이 걱정을 하는구나~~~
# 날머리 일주문-한바꾸 순회후 다시 도착한 일주문엔 사람흔적을 찾을 수가 없다. 날이 넘 더워서 그런강?/출발후8.8km/2시간 59분33초(휴식시간 28분 포함)
# 동화사의 일주문- 구 주차장에서 진입하면 나오는 예전(처음)의 일주문인데 지금은 형태만 유지되고 있어보인다.
# 동화사 마애여래좌상-대구 동화사 마애여래좌상(大邱 桐華寺 磨崖如來坐像)은 대구광역시 동화사 입구에 있는 남북국 시대의 마애불 좌상이다. 화강암 벽에 부조로 조각된 불상으로 높이 1.06미터, 대좌 높이 39센티미터, 광배 높이 1.5미터이다. 신라 후기인 9세기의 작품으로 추정된다.윗면의 바위가 튀어나와서 자연스럽게 감실을 이루고 있다. 수인은 항마촉지인이며 광배와 대좌를 갖추고 있다. 머리는 나발이고 육계가 낮으며, 얼굴은 매우 풍만하다. 목은 짧고 삼도가 있으며 어깨가 넓고 살집이 풍부하여 당당한 모습이다. 결가부좌한 다리를 풀어서 오른발을 대좌에 댄 특이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1963년 1월 21일 대한민국의 보물 제243호 동화사입구 마애불좌상(桐華寺入口磨崖佛坐像)으로 지정되었다가, 2010년 8월 25일 현재의 명칭인 동화사마애여래좌상으로 변경되었다. 넘 오랫만에 마애여래좌상은 보니 소시적 생각이 절로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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