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12. 10. 13:41ㆍ한시와 명언 보기
백호(白湖) 임제(林 悌)
(1549 명종 4 ~ 1587 선조 20).
<閨 怨 규원 규방 ㆍ아가씨의 원망>
十 五 越 溪 女 열다섯 살 아리따운 아가씨
羞 人 無 語 別 남부끄러워 말없이 헤어졌다.
歸 來 掩 重 門 돌아와 겹겹이 문을 닫아걸고는
泣 向 李 花 月 배꽃에 걸린 달을 바라보며 흐느낀다.
주) 越 溪 女 : 중국 월나라 지방의 여자, 월나라는 미인이 많아 민녀를 통칭
<貝 江 歌 패강가 - 第六首>
貝 江 兒 女 踏 春 陽 대동강가의 아가씨들 봄나들이 하는데
江 上 垂 楊 正 斷 腸 강 언덕 위 늘어진 수양버들에 애간장 끊는다.
無 限 煙 絲 如 可 織 한없는 버들가지의 연기 같은 실로 베를 짤 수 있다면
爲 君 裁 作 舞 衣 裳 낭군을 위해 춤출 때 입는 옷을 지으련만
< 自 挽 (輓歌 - 辭世歌) >-절명시
江 漢 風 流 四 十 春 강호에서 보낸 풍류 사십 년
淸 名 贏 得 動 時 人 깨끗한 이름 가득 얻어 그 당시 사람들을 감동시켰다.
如 今 鶴 駕 超 塵 網 이제 학이 끄는 구레를 타고 속세의 티끌을 벗어나면
海 上 蟠 桃 子 又 新 바다위 신선이 사는 곳의 선도 복숭아가 새롭겠다.
주) 蟠 桃 : 신선계에 있다는 3천년마다 한 번씩 열린다는 선도 복숭아로 장수의 선약을 지칭
39세로 생을 마감한 임제는 운명하기 전에 자식들에게 "천하의 여러 나라가 제왕을 일컫지 않는 나라가 없었는데, 오직 조선만이 끝내 제왕을 일컫지 못하였으니, 이같이 못난 나라에서 태어나서 죽는 것이 무엇이 아깝겠느냐! 너희들은 조금도 슬퍼할 것이 없느니라. 내가 죽거든 곡을 하지말라"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임제는 젊었을 때 속리산에 들어가 공부한 적이 있는데, 중용(中庸)을 800번이나 읽었다고 한다. 그리고 나서 다음 시를 지었다:
道 不 遠 人 人 遠 道 도가 사람을 멀리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도를 멀리하고
山 非 離 俗 俗 離 山 산이 세속을 떠난 것이 아니라 세속이 산을 떠났다.
또한 유명한 것이 임제가 서도병마사로 임명되어 임지로 가던 중에 송도(개성)에 들러 황진이를 찾았다. 이쉽게도 황진이가 얼마전에 죽었다 하므로 그녀의 무덤을 찾아가 술상을 차려놓고 황 진이를 생각하면서 시조를 읊었으니 다음과 같다:
청초 우거진 골에 자난다 누었난다.
홍안은 어듸 두고 백골만 무쳤난다.
잔자바 권한이 업스니 그를 슬허 하노라.
임백호가 평안도사(平安都事)로 부임하러 가는 길에 황진이 무덤을 찾아 이 시조를 읊었다가 탄핵을 당했다고 한다. 아마도 당시 조정에는 몰풍류 (沒風流)한 맹꽁이들만 득실거렸던 모양이다.
그처럼 도를 통달했던 임백호도 자신의 웅지를 펴기에는 너무 좁은 나라에 태어났음을 한스럽게 여겼던 것일까? 39세의 한창 나이에 이승을 하직하고말았다.
개성 삼절의 하나인 <황진이>의 화담 서경덕에 대한 연정시(戀情詩)인 相思夢(상사몽)에 대한 화담의 대구시(對句詩) 중:
<琴 銘 금 명ㆍ거문고에 새긴 글>
滌 之 邪, 天 與 徒 兮. 사악함을 씻어냄으로써 자연과 융화되는 사람이 된다.
<無 絃 琴 銘 무현금명ㆍ줄 없는 거문고에 새긴 글>
聽之聲上, 不若聽之於無聲 소리를 통하여 듣는 것은 소리 없음에서 듣는 것만 같지 못하며,
樂之刑上, 不若樂之於無刑. 형체를 통하여 즐기는 것은 형체 없음에서 즐기는 것만 같지 못하다.
樂之於無刑,乃得其, 乃得其, 乃得其,乃得其妙. 형체가 없음에서 즐기므로 그 오묘함을 체득하게 되며, 소리 없음에서 그것을 들음으로써 그 미묘함을 체득하게 된디.
주)임제는 본관은 나주. 자는 자순(子順), 호는 백호·풍강(楓江)·벽산(碧山)·소치(嘯癡)·겸재. 아버지는 오도절도사 훈련원 판관을 지낸 진(晉)이다. 큰아버지 풍암(楓岩)이 친아들처럼 사랑하며 돌보았다. 초년에는 늦도록 술과 창루(娼樓)를 탐하며 지내다가 20세가 되어서야 비로소 학문에 뜻을 두었다.
제주목사였던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풍랑이 거친 바다를 조각배로 건너가고, 올 때는 배가 가벼우면 파선된다고 배 가운데에 돌을 가득 싣고 왔다고 한다. 1577년(선조 9) 문과에 급제했다. 그러나 당시 당쟁의 와중에 휘말리기를 꺼려한 탓에 변변한 벼슬자리를 얻지 못하고 예조정랑 겸 사국지제교(史局知製敎)에 이른 것이 고작이었다. 스승인 성운(成運)이 죽자 세상과 인연을 끊고 벼슬을 멀리한 채 산야를 방랑하며 혹은 술에 젖고 음풍영월(吟風詠月)로 삶의 보람을 삼았다. 전국을 누비며 방랑했는데 남으로 탐라·광한루에서 북으로 의주 용만·부벽루에 이르렀다. 그의 방랑벽과 호방한 기질로 인해 당대인들은 모두 그를 법도(法度) 외의 인물로 보았다.
그러나 당시의 학자·문인인 이이·허균·양사언 등은 그의 기기(奇氣)와 문재를 알아주었다. 성운은 형이 을사사화로 비명에 죽자 그 길로 속리산에 은거한 인물로 임제는 정신적으로 그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죽을 때는 자식들에게 "사해제국(四海諸國)이 다 황제라 일컫는데 우리만이 그럴 수 없다.
이런 미천한 나라에 태어나 어찌 죽음을 애석해 하겠느냐"며 곡을 하지 말라고 유언했다. 기풍이 호방하고 재기가 넘치는 문인으로 평가받으면서 전국을 누비다보니 여러 일화들이 전한다. 특히 기생이나 여인과의 일화가 많은데, 당시 평양에서 제일가는 기생 일지매(一枝梅)가 전국을 다녀도 마음에 드는 이가 없던 차에 마침 밤에 어물상으로 변장하고 정원에 들어온 그의 화답시(和答詩)에 감동되어 인연을 맺은 일, 영남 어느 지방에서 화전놀이 나온 부인들에게 육담(肉談)적인 시를 지어주어 음식을 제공받고 종일 더불어 논 일, 박팽년 사당에 짚신을 신고 가 알현한 일 등은 유명하다. 황진이의 무덤을 지나며 읊은 "청초 우거진 골에……"로 시작되는 시조를 포함해 기생 한우(寒雨)와 화답하는 것 등 사랑과 풍류를 다룬 시조 4수를 남겼다. 문집으로는 〈백호집 白湖集〉이 있다. 700여 수가 넘는 한시 중 전국을 누비며 방랑의 서정을 담은 서정시가 제일 많다. 절과 승려에 관한 시, 기생과의 사랑을 읊은 시가 많은 것도 특색이다. 꿈의 세계를 통해 세조의 왕위찬탈이란 정치권력의 모순을 풍자한 〈원생몽유록 元生夢游錄〉, 인간의 심성을 의인화한 〈수성지 愁城誌〉, 그리고 식물세계를 통해 인간역사를 풍자한 〈화사 花史〉 등 한문소설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