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12. 10. 18:37ㆍ한시와 명언 보기
義姉 李娘 애도시
甘羅其齡 꽃다운 어린 나이 의로운 누날레라
代弟而死 아우를 살리기 위해 자기는 죽었구나
聶嫈內志 젖먹이를 껴안고 생명을 살려 뜻 이루니
爲親之嗣 어버이 뒤를 잇는 핏줄을 세웠구나.
주)오누이의 애틋한 이야기가 전해오는 의자이낭묘(義姉李娘墓)
가창면 냉천리 산 14-4번지에 의자(義姉) 이낭(李娘)의 묘가 있다. 가창에서 청도로 가는 국도확장공사 이전에는 산5-4번지에 있었으나 국도를 확장하면서 2002년 5월 30일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이곳에는 12살의 어린 누나가 자기는 죽으면서도 젖먹이 남동생을 화재로부터 구해 낸 슬프고 아름다운 이야기의 주인공이 묻힌 곳이다.
때는 조선 순조 때 냉천 마을에 이씨 성을 가진 사람이 12살난 딸과 젖먹이를 두고 살았다. 그는 가난했지만 부부간의 금실은 남들이 부러워할 만큼 좋았다. 어느 날 병중이라 출타중이었다. 그의 부인 역시 죽을 쑤어 남편에게로 가자 집에는 어린 남매만 남았다. 그때 꺼지지 않았던 아궁이의 불씨가 부엌에 쌓아 둔 보리짚단에 붙어 삽시간에 초가집 전체로 번지지기 시작했다.
당황한 누이는 남동생을 살리기 위해 배아래 깔고 그 위에 엎어져 불길이 닿지 못하게 했다.
그 후 찾아온 부부가 아이들의 생사가 궁금했다. 큰 소리로 불렀으나 대답이 없자 방안을 뒤졌다.
한 구석에 딸아이의 타다만 시체가 나오고 그 밑에 젖먹이 아이가 기절한 체 누워 있었다. 밖으로 옮겨 주무르자 깨어났다. 누나의 갸륵한 희생이 남동생을 살린 것이다.
의자 이낭의 묘비
대구 판관 조종순(趙鐘淳)이 의로운 누나를 기리기 위해 비를 세우니 지금의 의자이낭지묘(義姉李娘之墓)이다. 이 판관이 그녀를 애도하는 시를 지어 빗돌에 새기니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꽃다운 어린 나이 의로운 누날레라 감라기령(甘羅其齡)
아우를 살리기 위해 자기는 죽었구나. 대제이사(代弟而死)
젖먹이를 껴안고 생명을 살려 뜻 이루니 섭앵내지(聶嫈內志)
어버이 뒤를 잇는 핏줄을 세웠구나. 위친지사(爲親之嗣)
위의 내용은 주로 <대구의 향기, 대구직할시, 1982> 조상의 얼과 슬기 편, 전설 조와 <달성마을지, 달성문화원, 1998> 가창면 편 냉천 1 리(구마을, 새마을) 조를 참고하고 빗돌의 시문 번역은 구본욱 박사의 도움을 받았으나 필자가 첨삭 정리했다.
비 뒷면에 갑자년 3월 3일 가창면 중수(重竪)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는 것으로 보아 처음 있던 비가 마모되자 1824년 갑자년 다시 세운 것으로 보인다. 조종순(趙鍾淳)은 본관이 양주(楊州)로 아버지는 진주진관 병마절제도위(兵馬節制都尉) 조진순(趙鎭順)이며 1777년(정조 1) 서울에서 태어났다.
25세 때인 1801년(순조 1) 진사시에 합격하여 1824년(순조 24) 12월 대구 판관에서 옥천 군수로 이배(移拜)된 것으로 되어있으니 의자 이낭의 묘가 설치된 것은 이즈음으로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