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청 필봉산&왕산

2019. 2. 9. 20:46대한민국 山/경상도

>>> 山淸 王山&筆峰山 <<<

0. 일시: 2019.2.9.(토) 09:03 ~ 13:57(4시간 54분) * 아름아름 산꾼

0. 코스: 왕림사-약수터-망경대-왕산-필봉산-여우재-현수교-산청한방테마공원

0. 거리: 10.5km정도

    갈 곳을 찾다가 아는 분이 필봉산을 간다고 하기에 따라 나선다. 지 지난주 산청 정취암을 다녀왔다. 오늘 간 필봉산은 정취암에서도 별로 멀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지리산 정상과 지리산 밤머리재 근처에 있는 산이다. 걱정했지만 생각보다 날씨는 춥지 않다. 들머리엔 춥고 바람도 심하게 불더니만 정상에 오르니 햇볕도 나고 해서인지 날씨가 온화하다. 필봉산은 멀리서 보면 꼭 붓을 거꾸로 세워 놓은 형상이라서 이름이 그렇게 불러졌는가보다. 하산후 산청 생초면 어느 식당에서 어탕국수 한 그릇으로 허기를 달래고 귀가하니 시계가 6시 근처에서 산꾼을 기다리고 있다.



* 오늘의 최고봉인 필봉산(858m)이지만 왕산(923m)이 높이가 더 높다.

#1 들머리인 구형왕릉 주차장



#2 류의태 약수터 진입로 이정표- 이 이정표를 시작으로 오늘 산행이 시작된다.

#3 왕산사 절터

#3 류의태 약수터(장군수약수터)-가뭄이 심한 겨울이지만 많은 물이 흘러나오고 겨울인데도 불구하고 나오는 물은 미지근하여 마시기가 엄청 좋다.

주)산청군청은 柳義泰를 실존 인물로 만들기 위하여 유이태 전설이 전해오는 <장군수약수터><류의태약수터>로 이름을 바꾸었고, 약수터 안내판에는 산청군지에 채록되어 있는 유이태 전설을 류의태 전설로 바꾸었다. 

따라서 등산객들이 올리는 <류의태약수터>는 사실이 아니다. <류의태약수터>는 실존 인물  유이태의 전설이 전해지는 <장군수약수터>이다.


**劉以泰(1652~1715)는**

40여년 동안 향의(鄕醫)로 백성들을 치료했고  조선을 대표하는 유의(儒醫)로  가문과 왕실 기록에는 劉以泰, 저서에는 劉爾泰로 기록되어 있으며, 조선 후기 유학자(儒學者) 의관(醫官)이다.

본관 : 거창(居昌).   : 백원(伯源)   : 신연당(新淵堂인서(麟西원학산인(猿鶴山人관직 : 어의(御醫), 숭록대부 안산군수

따라서 산청군에서 아무런 근거도 없는 이야기를 사실 같이 만들어 놓아 여러사람을 기만했다고밖에 볼수가 없다. 실존인물 유의태는 허준 사후 37년후에 태어난 사람인데~~~

올바른 사실을 제대로 알고 대실망이다.


#4 오름길의 돌무더기들

#5 왕산과 구형왕릉 오름 3거리


#6 望京臺-이름모를 비석과 돌에 새겨진 망경대 암각화(개성을 바라본다는 뜻)

주) 민안부 선생은 고려말 민문(閔門)10세손으로 고려 공양왕 때 예의판서禮儀判書를 지내시다가, 1392년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하자 不事二君의 정신으로 두문동 杜門洞으로 들어간 고려 충신 72현의 한 분이시다. 그 후 조선에서 여러 차례 벼슬을 주어 부르자 현재 특리마을 바로 옆 대포大浦로 내려오셔서 은둔 생활을 하셨다고 한다. 이 분이 산청 민문의 중시조로 현재 산청의 금서, 생초, 오부 등에 집성촌의 형태로 많은 후손들이 살고 있다.

望京臺는 농은 선생이 산음현 대포리에 은둔해 계시면서 매월 삭망(초하루와 보름)에 이곳에 올라 고려조를 그리워하며 개성을 향해 충절을 다지시던 곳이라고 한다.


#7 망바위 -뒤로 왕산과 필봉산이 보이고~~

#8 소왕산- 예전엔 이곳이 왕산이라고 하다가 소왕산으로 이름이 바뀌었다고 한다.

#9 왕산 가는길에 아름다운 소나무 한 그루(8절송)

#10 오늘 최고 높은 봉우리인 왕산(923m)

#11 필봉산-오르니 조망이 좋다. 백두대간 끝 언저리인 지리산, 웅석봉,밤머리재가 보인다.

#12 필봉산 옆 다른 바위 위에서- 사진을 찍은 이 순간에 바람이 엄청 불어서 지탱하기가 넘 힘이 많이 든다.

#13 하산길 암벽능선이랑~




#14 안부- 여기서 좌틀하여 산청 한방테마센터로 내려간다.


#15 동의본가 한방테마센터

#16 무릉계곡의 얼음조각

#17 해부굴-허준이 류의태를 해부했다고 했는데....실제로는 류의태는 가공의 인물로서 어느 역사에도 나타나질 않는 드라마상의 허준의 스승이다....그러니 예전 드라마는 허구란 애기다.

#18 테마공원내에 심어진 아름다운 조경수랑 호랑이 얼굴



#19 한시대를 풍미하면서 울나라의 한방을 집대성한 허준

* 허준(1539~1615)            

자는 청원(淸源), 호는 구암(龜巖), 본관은 양천(陽川)이다. 30여 년 동안 왕실병원인 내의원의 어의로 활약하는 한편, 『동의보감(東醫寶鑑)』을 비롯한 8종의 의학서적을 집필하여 조선을 대표하는 의학자로 우뚝 섰다.

생애        

허준은 뼈대 있는 무관의 가문 출신으로 아버지 허론(許碖)과 양반 가문 출신인 어머니 영광 김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어머니의 신분이 정실(正室)이 아니었기에, 그의 신분은 중인으로 규정되었고, 이러한 신분은 문·무관보다 천하다고 여겨진 의관의 길을 택하는 데 작용하였다. 그럼에도 훌륭한 가문의 배경 덕에 허준은 어려서부터 경전·역사·의학에 관한 소양을 충실히 쌓을 수 있었다.

허준이 언제, 어떻게 의학을 공부했으며, 또 의관으로 나아갔는지를 일러주는 자료는 아직 보고되지 않았다. 관직으로 볼 때, 허준의 장년 이후의 삶은 세 시기로 나뉜다.

첫째, 내의원 관직을 얻은 1571년부터 임진왜란이 발발한 1592년까지이다. 이 21년 동안 허준은 내의(內醫)로서 크게 이름을 얻기는 했지만, 최고의 지위에 도달하지는 못했다. 1590년(선조 23) 허준은 왕세자의 천연두를 치료한 공으로 당상관 정3품의 품계를 받았다. 이 품계는 『경국대전(經國大典)』이 규정한 서자 출신인 허준이 받을 수 있는 최고 관직인 정3품의 한계를 깰 정도의 큰 상이었다.

둘째,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이후 선조가 승하하던 1608년(선조 41) 때까지이다. 허준이 선조의 의주 피난길에 동행하여 생사를 같이함으로써 그는 선조의 절대적인 신임을 얻었다. 1596년(선조 29) 왕세자의 난치병을 고친 공으로 중인 신분에서 벗어나 양반 중 하나인 동반(東班)에 적을 올렸다. 1604년(선조 37)에는 임진왜란 공신 책봉이 있었는데, 허준은 호성공신(扈聖功臣) 3등에 책정되는 한편, 그는 본관인 양천(陽川)의 읍호(邑號)를 받아 양평군(陽平君)이 되었다. 이와 함께 품계도 승진하여 종1품 숭록대부(崇祿大夫)에 올랐다. 1606년(선조 39) 선조의 중환을 호전시킨 공으로, 선조는 그에게 조선 최고의 품계인 정1품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를 주고자 했으나, 사간원·사헌부의 맹렬한 반대에 부딪쳐 이는 실현되지 않았다.

셋째, 1608년(선조 41)부터 그가 죽던 해인 1615년(광해 7)까지이다. 이 7년은 시련기로 선조 승하의 책임을 지고 벼슬에서 쫓겨나고 먼 곳으로 귀향을 가는 등 불운이 있었고, 귀양에서 돌아온 이후에도 권세가 없는 평범한 내의로 지내다 고요하게 삶을 마쳤다. 1608년(선조 41) 선조가 병으로 죽자, 그것이 수의(首醫)인 그의 잘못이라는 탄핵을 받아 허준은 삭탈관직 되는 한편, 의주 유배형이 처해졌다. 그의 유배는 1년 8개월이 지난 1609년(광해 1)에 풀렸으며, 6년 후인 1615년(광해 7) 세상을 떴다. 사후 조정에서는 그의 공을 인정하여 정1품 보국숭록대부를 추증했다.

의관 허준의 출세는 조선의 역사에서 거의 유례를 찾기 힘들 정도로 파격의 연속이었다. 이는 그의 의술 솜씨와 우직한 충성이 빚어낸 성취였다. 이와 함께 이를 질시한 양반계급의 불만도 작지 않았다. ‘양반에게 굽실거리지 않으며, 임금의 은총을 믿고 교만스럽다.’는 세평(世評)도 존재했다.

활동사항

허준은 어의로 재직하면서 내의원의 의학서적 집필을 도맡았다. 그가 저술한 책으로는 8종이 있으며, 크게 네 부류로 대별된다.

첫째, 종합 임상의서의 집필로, 『동의보감』(1613)이 이에 해당한다.

둘째, 일상생활에 요긴한 한글 번역이 딸린 의서로,『언해태산집요(諺解胎産集要)』·『언해구급방(諺解救急方)』·『언해두창집요(諺解痘瘡集要)』(이상 1601) 등이 그것이다. 책은 각각 아이의 해산에 대한 의학적 지식, 구급 상황에 대한 발 빠른 대처, 소아전염병인 천연두에 대한 의학적 대응을 실었다. 최근에 연대 미상인『언해납약증치방(諺解臘藥症治方)』이 허준의 저작으로 추정된다는 기록이 발견되었다. 이 책은 가정상비약인 납약을 올바로 쓰는 지침을 담고 있다.

셋째, 전염병 전문의서로, 『신찬벽온방(新纂辟溫方)』·『벽역신방(辟疫神方)』(이상 1613)의 편찬이 그것이다. 『신찬벽온방』은 열성 질환인 온역(瘟疫: 오늘날의 급성전염병)에 대한 대책으로 내놓은 것이다. 『벽역신방』은 1613년 국내에서 첫 유행했던 성홍열에 대한 책이다.

넷째, 학습용 의학교재인데, 허준 최초의 저작인 『찬도방론맥결집성(纂圖方論脈訣集成)』(1581)이 그것이다. 이 책은 당시 전의감(典醫監)의 과거시험 교재로 쓰이고 있던 동일한 책의 오류를 바로잡은 것이다.

허준의 책 중 가장 주목할 책은『동의보감』이다. 이 책은 왕명으로 1596년(선조 29)에 시작되어 14년 후인 1610년(광해군 2)에 완성을 보아 1613년(광해 5)에 출간되었다. 애초에는 허준을 책임자로 하여 유의(儒醫) 정작(鄭碏), 다른 어의인 양예수(梁禮壽), 김응탁(金應鐸), 이명원(李命源), 정예남(鄭禮男) 등 5인의 공동 작업으로 시작했으나 정유재란으로 중단된 상태에 있다가, 이후 어느 시점에서 허준이 단독으로 책임을 맡아 책을 완성시켰다.

1608년(선조 41) 유배 이후 허준은 연구에 전념할 시간을 얻게 되었고, 유배지에서 단시간에 책의 절반 이상을 집필해냈다. 허준은 양생(養生) 사상을 중심으로 하여 중국 의학이론과 처방의 난맥상을 바로잡고, 향약 사용의 이점을 최대화하며, 최소한의 약의 분량으로 최대한의 의학적 효과를 얻으려는 데 힘썼다. 임진왜란으로 피폐해진 조선 사회 회복의 일환으로 획기적인 의학의 제공이라는 측면도 무시할 수 없다.

세계질병사의 관점에서 볼 때, 『벽역신방』도 크게 주목을 끈다. 허준은 성홍열에 대한 예리한 관찰과 합리적인 추론을 통해 이 미지(未知)의 병이 홍역을 비롯한 유사한 질환과 구별되는 병임을 밝혔다.

상훈과 추모

허준은 한국의학사, 동아시아 의학사, 세계의학사에 크게 기여했으며, 조선 의학사의 독보적인 존재로 동의(東醫), 즉 한국의학의 전통을 세웠다. 특히, 『동의보감』은 당대 최고의 고급 의학으로서 조선 의학의 통일을 가능케 했고, 언해본 의서는 의학 대중화의 촉진제가 되었다.

『동의보감』은 출간이후 중국과 일본에서 동아시아 전통의학의 핵심을 잘 잡아내어 적절한 표준을 세운 것으로 평가받았다. 이 책은 중국에서 대략 30여 차례 출간되었고, 일본에서도 두 차례 출간되었다. 허준의 면밀한 성홍열 관찰 보고는 동아시아 지역에서 최초이고, 세계적으로도 최초의 그룹에 속하는 것이다. 이로써 허준은 세계질병사 연구의 선구자 중 일인으로 평가받을 만하다.

20세기 후반 이후 한국에서 허준은 소설과 드라마로 재조명되어 커다란 인기를 끌었다. 2009년에는 『동의보감』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어 세계인과 같이 나누게 되었다.

2005년 3월에는 허준박물관이 개관되어 허준과 『동의보감』을 알리는 교육과 전시행사가 있었다. 또한 서울 강서구를 중심으로 매년 ‘허준 축제’를 개최하고 있는데, 2014년 10월 제15회 행사를 진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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