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사시대 저수지 나들이

2022. 3. 12. 20:26산따라 길따라

>>>선사시대 저수지 나들이<<<

□ 저수지 명: 공검지,수산제,의림지,벽골제

1. 공검지

  0. 일시: 2019. 5. 6.

  0. 위치: 경북 상주시 공검면 양정리 199-7

 상주 공검지는 경상북도 상주시 공검면 양정리에 있는 저수지로 남한에서 규모가 가장 큰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서력 기원을 전후한 시기에 벼농사의 중요성과 함께 정치적·사회적 발전에 의한 노동력의 징발에 의해 거대한 저수지가 축조되었는바, 제천 의림지(義林池), 밀양 수산제(守山堤), 김제 벽골제(碧骨堤) 등과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졌다고 믿어지고 있다. 문헌 기록으로는 고려 때인 1195년(명종 25) 상주사록(尙州司錄)으로 있던 최정분(崔正份)이 예로부터 있어 오던 제방을 그대로 수축했다고 하며, 제방의 길이는 860보(步)이고, 너비가 800보라고 한다. 저수지의 둘레는 22리나 되며, 이 저수지에 의해서 혜택을 받는 몽리(蒙利)면적은 260결(結)에 이르렀다. 조선 초에 홍귀달(洪貴達)이 쓴 「공검지기(恭儉池記)」에 의하면 축조연대는 언제인지 모르고 공검(恭儉)이라는 이름은 쌓은 사람의 이름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평상시 못의 둘레가 1만 6,647척(尺)이며 이때 물의 깊이는 4, 5장(丈)이나 되었다.이 제방은 고대의 제방들에서 흔히 볼 수 있듯이, 토사(土砂)를 판축(板築:판자와 판자 사이에 흙을 넣고 다짐)하여 단면이 사다리꼴이 되도록 쌓아 올린 것이다.

판축의 방법은 토성(土城)을 쌓는 방법에서 비롯되었으나 안팎의 물매를 더하여 물의 압력에 견디도록 아랫부분의 너비가 부채꼴로 넓게 되어 있다. 잔자갈과 흙을 다질 때 뻘흙을 사용하고 각각의 재료 사이에 있는 공극(空隙)을 거의 없앰으로써, 물분자가 공극으로 흡수될 틈을 막는 원리를 이용하였다. 현재 규모는 주변이 모두 논으로 개답되고, 만수 시 약 1,000평 정도의 작은 규모만 남아 있다. 이는 문화유산으로 그 흔적을 보존하고자 한 것으로, 수리시설의 기능은 하지 못한 채 남아 있다.

 

# 공검지 습지보호구역 안내판

# 공검지(공갈못)표지판-꼭 일제시대때 황국 신문화를 구실로 신사참배하는 제단같이 되어 있어 첫눈에 봐도 눈에 거슬린다. 이런 일제 잔존물을 빨리 없애고 새로운 안내판을 세웠으면하는 바램이다. 간 기념으로 흔적은 남겼지만 기분이 영 아니올시다이다.

# 공검지 전경

#북선 기찻길이 공검지 옆을 통과하고 있다.

  (주)공갈못: 전설에 의하면 이 못의 얼음 어는 것을 보고 흉년, 풍년을 예측하였다고 한다.

또 정월 열나흗날 밤, 소들이 땀을 흘리는데 그것은 밤을 이용하여 소들이 못에 얼음을 갈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또 경주 용담의 암용이 공갈못 숫용에게 시집온 이야기도 있다. 또 볶은 콩 서되를 하나씩 먹으면서 말을 타고 못 가를 돌아도 콩이 모자란다는 말도 있다.속설에 "저승에 가도 공갈못을 구경하지 못한 사람은 이승으로 되돌려 보낸다"고 하였다. 함창 읍지에는 이 못의 서반에는 몇 리에 걸쳐 연꽃이 피어 있으며 마치 중국의 전당호를 방불케 하는 풍취를 지녔다고 하여 그 아름다움과 연꽃의 풍광을 말하여 주고 있다. 그러므로 옛부터 이곳을 찾는 사람들은 주옥같은 글을 남기어 그 아름다운 풍광을 연상케 하여 준다. 이 못의 이름이 공갈못이라 부르게 된 것은 못 둑을 쌓을 때 "공갈"이라는 아이를 묻었다는 매아설화에 의하여 붙여진 것이라고 한다. 이와 같이 향민들은 이 못을 신비롭고 영험스러운 영지로 신앙하여 왔다.이제는 이와 같은 전설과 연밥 따는 노래가 공갈못을 상기시켜 줄 뿐 못은 논으로 변하여 그 모습과 풍광을 찾을 길이 없다. 다만 옛 못을 알려주는 비석이 옛 못 뚝에 외롭게 서서 이곳을 찾아주는 나그네의 발길을 멈추게 하고 서운한 발걸음을 되돌려야 하는 곳이 되었다. 공갈못 하면 곧 우리 어머니를 연상케 하는 것은 연밥 따는 노래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 노래는 공갈못을 배경으로 하여 발생 형성된 민간의 노래로 지방성과 토속성을 짙게 띈 민요의 성격으로 이 노래의 내용은 연정, 사친, 완월관어, 호련 등의 유형을 이루었다. 형식으로는 기본형, 복합형, 생략형, 후렴첨가형 등이 형태를 보이고 있다. 이 노래는 동남 동녀를 대상으로 한 한국민요의 대표할 만한 노래군이라 할 수 있다. 이 노래군이 상주, 함창을 중심으로 한 이 지역에서 전승 보존되는 이 지방 특유의 무형 문화재로 귀중한 가치를 지닌 것이라 할 수 있다.

2. 밀양 수산제

  0. 일시: 2020. 3. 1.

  0. 위치: 경남 밀양시 하남읍 수산리 963

   밀양 수산제제방의 길이는 728보(步)이고 둘레는 20리가 되며 벽골제·의림지와 함께 우리 나라 3대저수지로 불린다. 위치는 밀양의 속현이었던 수산현으로 현재의 하남읍 수산리·귀명리 지역과 초동면의 검암리·금포리에 걸치고 있다. 이 지역은 삼한시대에 ‘미리미동국(彌離彌凍國)’이라고 하였는데 ‘미동’은 우리말로 물동·물둑(제방)을 뜻하며,  《삼국지》 위서 동이전(東夷傳)에 벼농사를 위주로 한 이러한 지명이 많이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이 저수지는 서력기원을 전후한 시기에 축조되었다고 추측된다. 《신증동국여지승람》 밀양도호부(密陽都護府) 고적조의 기록을 보면 고려 말에 김방경(金方慶)이 제방을 쌓고 관개를 하여 일본정벌을 위한 군량미를 비축했다는 전설이 있다. 《세종실록》 지리지에는 제방의 길이가 728보이고 당시에 이미 제방이 무너졌지만 고쳐 쌓지 않았다고 기록한 것으로 보아 15세기 중엽에는 저수지로서의 기능이 상실되었음을 알 수 있다. 《점필재집 佔畢齋集》에서는 1467년(세조 13)에 체찰사 조석문(曺錫文)이 밀양·창녕·청도·창원·대구·현풍·영산·양산·김해 등 9개 고을에서 장정을 동원하여 제방을 다시 수축하였다고 한다.《밀주지 密州誌》·《밀주구지 密州舊誌》·《교남지 嶠南誌》 등에서도 “못의 가운데 죽도(竹島)라는 작은 섬과 오산(鰲山)이 있고 못 안에 갖가지 풀이며 연꽃과 세모마름 등이 자생하였다.”라고 하였는데 지금도 이 지역사람들이 ‘대섬’과 ‘자라목산’이라고 부르는 곳으로 남아 있다. 1463년에 제방을 모으고 국둔전(國屯田)으로 만들었다가 200결(結)이나 되는 경작지의 반은 평민들에게 경작하도록 하고 나머지 반은 지금은 없어진 봉선사(奉先寺:밀양시 하남읍 대사리 뒷산 중턱에 ‘절티골’이라고 불리던 곳에 있었던 큰 절)에 주었다가 성종 때 다시 환속시켰다고 한다. 그리고 임진왜란 이후에 황폐하여 이용하지 못하였다고 한다. 일본인들이 수리시설을 하기 전인 1928년까지 주위에서 쉽게 이용될 수 있었던 황토흙으로 된 제방이 수산리 471-4번지에서 양동리 465-2번지에 걸쳐 약 1,040m 정도로 남아 있었으나 지금은 없어지고 저수지는 논으로 변하다.     

이곳의 제방은 낙동강의 지류인 용진강(龍津江:지역민들은 ‘안강’이라고 부르고 있음)물이 국둔전으로 범람해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서 쌓은 것이다. 그리고 양수와 배수를 위하여 수산리 524-1번지 부근 자연암반 밑으로 수문을 내었는데, 그 수문의 흔적이 흙 속에 묻힌 채 지금도 남아 있다. 국둔전지 안의 저지대에는 주위의 산으로부터 모여든 물이 고여 자연적으로 저수지가 되었고 이 물을 이용하여 제방 안 비교적 높은 곳에 있는 논밭에 농사를 하였으며 저수지에서는 물고기도 잡고 연근(蓮根) 등을 채취할 수 있었다. 수산제 주위 양동리·귀명리·동촌마을의 산등성이에서는 지석묘(支石墓)나 석곽고분(石廓古墳)을 비롯하여 방대한 양의 조개무덤[貝塚]이 발견되고 있으며 돌칼[石劒]과 4∼7세기경의 유물인 적색연질토기 등 신라시대 토기가 많이 출토되고 있어서 주목되는 곳이다. 

3.  의림지

  0. 일시: 2022. 3. 12.

  0. 위치:  충북 제천시 모산동 241

의림지는 우리 나라에서 오랜 역사를 가진 저수지로 손꼽힌다. 제천의 옛 이름인 내토(奈吐)·대제(大堤)·내제(奈堤)가 모두 큰 둑이나 제방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아 이 제방의 역사가 서력기원 전후의 시기까지 오르는 것으로 믿어지고 있다. 《세종실록》에는 의림제(義臨堤)라고 표기하였다.낮은 산줄기 사이를 흐르는 작은 계곡을 막은 제방은 길이가 530척(尺)이며, 수위는 제방 밖의 농경지보다 매우 높아서 관개면적이 400결(結)이나 되었다. 못의 둘레는 5,805척이나 되고 수심은 너무 깊어서 잴 수 없다고 하였다. 상주의 공검지(恭儉池)나 밀양의 수산제(守山堤), 김제의 벽골제(碧骨堤)와 같은 시기의 것이지만 제방의 크기에 비해 몽리면적이 큰 것은 제방을 쌓은 위치의 수위가 높기 때문이다.현재는 물의 주입부에서부터 토사(土沙)가 쌓여 작아진 것이다. 제방은 산줄기 사이의 낮은 위치에 자갈과 흙과 모래·벌흙을 섞어서 층층으로 다지되 제방 외면이 크게 단(段)을 이루도록 하였다. 단면이 이중의 사다리꼴을 이루고 외면은 석재로 보강하였다.출수구는 본래의 자리가 원토인 석비레층으로 그 위에 축조되었던 것이나 지금은 원형(原形)이 사태로 말미암아 없어지고 패어나간 흔적만 남아 있다. 이 제방은 신라 진흥왕 때 우륵(于勒)이 처음 쌓았다고 하고 그 뒤 약 700여 년 뒤에 박의림(朴義林)이 쌓았다고 한다.문헌에 기록된 바로는 세종 때 충청도관찰사였던 정인지(鄭麟趾)가 수축하고 다시 1457년(세조 3) 체찰사가 된 정인지가 금성대군(錦城大君)과 순흥부사 이보흠(李甫欽)의 단종복위운동에 대비하여 군사를 모으면서 호서·영남·관동지방의 병사 1,500명을 동원해서 크게 보수한 것으로 되어 있다.그 뒤 1910년부터 5년 동안 3만여 명의 부역에 의해 보수하였던 것이 1972년의 큰 장마 때 둑이 무너지자 1973년에 다시 복구한 것이 오늘날의 모습이다. 현재의 의림지는 호반둘레가 약 2㎞, 호수면적은 15만 1,470㎡, 저수량은 661만 1,891㎥, 수심은 8∼13m이다. 현재의 몽리면적은 약 300정보에 이른다.수리관개뿐만 아니라 유서깊은 경승지로 이름이 있으며, 충청도지방에 대한 별칭인 ‘호서(湖西)’라는 말이 바로 이 저수지의 서쪽이라는 뜻에서 유래된 것이다. 제방과 호수주변에는 노송과 수양버들이 늘어섰고 1807년(순조 7)에 세워진 영호정(映湖亭)과 1948년에 건립된 경호루(鏡湖樓)가 있으며, 이곳 특산물로는 빙어가 유명하다.

# 용추폭포 유리 전망대

3. 벽골제

0. 일시:

0. 위치: 전북 김제시 부량면 신용리 2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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