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봉산 주사암(건천)

2023. 2. 4. 16:40대한민국 山/경상도

如 犀 角 獨 步 行

>>>오봉산 주사암 나들이<<<

0. 일시: 2023. 2. 4.(토) 10:35 ~ 13:31 (2시간56분)  * 옆지기

0. 코스: 주차장-유학사-안부전망대-임도-주사암-오봉산(685m)-마당바위(역순하산)

0. 거리: 8.4km

과거 낙동정맥 관산과 사룡산을 지날때 마루금 산딸기밭에서 먼 발치서 동쪽 방향으로 바라다 본 마당바위. 오늘은 오봉산과 그 유명하다는 주사암을 들러보러 나선다. 주사암은 신라 문무왕때(서기663년)부산성을 축조하던 중 의상대사님의 원력으로 건립된 사찰로 임란때 유정대사의 도움으로 중창되어 주사암으로 개칭되어 오늘에 이른다고 되어 있다. 가는길은 수월한데 오름길은 먼지와 낙엽으로 힘든다. 같이한 옆지기가 오르막을 오르는데 애를 먹는다. 겨우 임도에 도착하니 경주쪽의 강풍이 전부 몰아치는듯하다. 서 있으면 날라갈것 같아 빠른 걸음으로 정상으로 향한다. 주말이지만 간간히 절을 찾는 사람들이 보인다. 뒷편에 있는 마당바위가 일품이다. 넓고 높은 바위가 평평한 마루바닥 같이 넓다. 한참을 구경하고 오던길로 하산하면서 주사암 나들이를 마무리한다. 차가 정상까지 올라가니 걷기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도 쉽게 접근이 가능하지 싶은데 차길은 구절양장이라 운전에 신경을 많이 써야할것 같다는 느낌이다.(실제 운전은 안해봐서 몰겠음)

 

# 높은 암벽위에 넓은 운동장이 펼쳐지는듯한 마당바위- 높이도 높고 저멀리 낙동정맥길이 지척에 보인다.

#1 오봉산 등산로 이정표- 여기서 좌측으로 들어가면 유학사 암자로 통하면서 여근곡과 옥문지로 연결되지만 직진하여 부산성방향으로 오른다. 여기서 임도 접하는 부분까지 오르막의 연속이다.

#2 잠시 유학사도 들러본다.

#3 여근곡(다운)-앞에서는 잘 보이지가 않고 마을 입구에 서 보면 정확하게 모습을 볼 수가 있다. 이곳 여근곡(女根谷)은 선덕여왕의 지기삼사(知幾三事)에 관한 전설 중의 하나에서 유래하는 지명으로 서기 636년(선덕여왕 5) 여름에 영묘사(靈廟寺) 앞 큰 연못인 옥문지(玉門池)에 난데없이 두꺼비들이 모여들어 싸우는 일이 생겼다. 모두 궁금히 여기는 가운데 선덕여왕이 해석하기를 두꺼비의 눈이 성난 것같이 생겼으므로 병란이 날 조짐이라 하고 알천(閼川)과 필탄(弼呑) 두 장군을 불러 2,000명의 군사를 주어 경주 서쪽에 있는 여근곡에 가서 백제의 복병을 치게 하였다. 두 장군이 여근곡에 이르니 백제의 장군 우소(于召)가 거느린 500여명의 복병이 있어 쉽게 물리쳤다. 이것은 옥문(玉門)을 여근(女根)으로 해석하여 여근은 음(陰)이므로 남근(男根)이 여근 속으로 들어가면 토사(吐死)한다는 음양설을 인용하여 해석한 것이다. 여근곡의 위치는 자인(玆仁)에서 경주로 가는 길목에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곳에는 마곡산(馬谷山) 밑의 회곡치(回谷峙)가 있었던 곳으로 지형의 생김새로 보아 여근곡이었을 것으로 본다라고 전해진다.(펀글)

#4 괴이한 아카시아 나무- 아무래도 나무가 병이 들어 있는것 같아 보인다. 

#5 껍질만 살아 있는 느티나무 고목

#6 드뎌 만난 차량 통행이 가능한 임도길- 구절양장이요 오르막이라 오르는데 많은 노력이 필요해 보인다.

#7 경주 부산성 안내판 - 신라 문무왕 3년(663)에 쌓은 신라 산성으로 주사산성(朱砂山城)이라고도 한다. 주사산(朱砂山)·오봉산(五峯山)·오로봉산(吳老峯山)·닭벼슬산이라고도 불리는 부산(富山)의 정상을 중심으로 세 줄기의 골짜기를 따라 다듬지 않은 자연석을 이용하여 쌓은 석축성이다. 산성이 있는 곳은 대구에서 경주로 통하는 교통의 요충지로 선덕여왕 때 백제군이 이 산을 넘어 옥문곡(玉門谷) 일명 여근곡(女根谷)까지 침입한 일이 있었다. 그 이후에 경주의 서쪽에서 침입하는 적을 방어하기 위해 쌓은 외곽산성으로 조선시대 전기까지 왜구의 침입에 대비했던 것으로 보여진다. 성밖은 4면이 경사가 심하고 험준하여 방어에 적합하다. 성안에는 넓고 평탄한 지형이 많으며 물이 풍부하여 신라의 중요한 군사기지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주사암(朱砂庵)은 신라 의상(義湘)의 창건이라고 전하는데, 이 절터 바로 북쪽에 지맥석(持麥石)이라고 불리는 큰 반석이 있다. 이 반석은 1백여 명이 앉을 수 있는 크기이며, 신라의 명장 김유신(金庾信)이 술을 빚기 위하여 보리를 두고 술을 공급하여 군사들을 대접하던 곳이라 하여 지맥석이 되었다고 전하고 있다. 효소왕(孝昭王) 때 화랑(花郞) 득오(得烏)가 죽지랑(竹旨郞)과의 우정을 그리워하며 ‘모죽지랑가(慕竹旨郞歌)’를 지은 곳으로도 유명한 곳으로, 남문터와 군의 창고터·군사훈련을 시켰던 연병장터(練兵場址)·우물터·못터, 그리고 비밀통로인 암문터(暗門址) 등이 남아 있다.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誌)에서는 이 성을 부산성(夫山城)이라 하고 둘레가 2,765보 3척이라하고 군창이 있었다고 하므로 조선 시대 초기에도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여 경영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펀글)

#8 오봉산(685m)정상 

 * 정상석 좌 우측편에 각인되어 있는 글귀-"산에 남기는건 발자욱("국"이 표준어) 가져가는것은 추억뿐!)/산은 우리의 영원한 고향!

#9 주사암-대한불교조계종 제11교구 본사인 불국사의 말사로 주사사(朱砂寺)라고도 하며, 신라 문무왕 때 의상대사(義湘大師)가 창건하여 주암사(朱巖寺)라 하였고,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이 절의 내력과 관련된 1편의 설화가 전하고 있다.  한 도인(道人)이 이곳에서 신중삼매(神衆三昧)를 얻고, 스스로 말하기를 “적어도 궁녀가 아니면 내 마음을 움직이지 못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귀신의 무리들이 이 말을 듣고 궁녀를 훔쳐 새벽에 갔다가 저녁에 돌려 보내고 하였는데, 궁녀가 두려워하여 임금에게 아뢰니 임금이 가서 자는 곳에 붉은 모래로 표시하게 하고 이어 갑사(甲士)에게 명령하여 찾게 하였다. 오랜 수색 끝에 이곳에 이르러서 보니 단사(丹砂)의 붉은 흔적이 바위 문에 찍혀 있고, 늙은 승려가 바위에 한가로이 앉아 있었다. 임금이 그의 요괴하고 미혹한 행위를 미워하여 용맹한 장졸 수 천명을 보내 죽이고자 하였으나, 그 승려가 마음을 고요히 하고 눈을 감은 채 한번 주문(呪文)을 외우니 수만의 신중(神衆)이 산과 골에 늘어섰으므로 군사들이 두려워 물러갔다. 임금은 그가 이인(異人)임을 알고 궁궐 안에 맞아들여 국사(國師)로 삼았다고 한다. 이 설화에 의하여 절 이름이 주사암이 되었는데, 이 설화는 신인종(神印宗)의 주력(呪力)을 강조하는 점이 두드러진다.현존당우로는 대웅전을 비롯하여 영산전·삼성각·종각·요사 등이 있고, 문화재로는 2007년 경상북도 문화재자료로 지정된 경주 주사암 영산전 석조삼존불좌상이 있다.(펀글)

#10 오봉산 마당바위(지맥석)-주사암 마당을 지나쳐 50m 정도 더 나서게 되면 오봉산의 명물인 마당바위 위에 올라앉게 된다. 지맥석(持麥石)이라 불리는 이 마당바위는 산정 위에 우뚝 선 평탄한 반석으로 마치 멍석을 깔아놓은 듯한 암반으로 신라 김유신이 술을 빚기 위하여 보리를 두고 술을 공급하여 군사들을 대접하던 곳이라 하여 지맥석이 되었다고 전하며 곳곳에 움푹움푹 패여 들어간 자리들은 말발굽의 흔적이라 한다.깎아지른 절벽 위 마당바위에 서서 바라보고 있자면 한여름엔 짙푸른 녹색의 바다, 가을엔 울긋불긋한 단풍의 향연으로 어지럽고, 안개라도 싸이는 날엔 진정 속진을 떠난 듯 잠시 산 아래 세상을 잊어버리는 선경에 든다. 고려 명종 때 벼슬에 뜻이 없이 고향인 경주에 눌러앉아 159권의 문집을 남긴 김극기가 주사암에 올라 다음과 같이 읊었다고 한다.
-멀고 먼 구름 끝에 절이 있으니/속진 떠난 경지가 거기 있구나./새나 날아오를까 굽어 오른 하늘가에/봉수대가 바위 위에 올라 앉았네.-

#11 독야청청성- 주사암 주차장에 홀로 주사암을 지키고 있는 독야청청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