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양도성 둘레길

2024. 3. 17. 07:53산따라 길따라

如 犀 角 獨 步 行

>>>한양 도성 둘레길 돌기<<<

-낙산공원,청운대,북악산,인왕산,목멱산-

0. 일시: 2024. 3. 16. 09:22-15:27(6시간 5분) *죙일걸린 일정(*RSW)

0. 코스: 흥인지문(S)-낙산공원(P)-혜화문-북정마을(심우장)-와룡공원-숙정문(S)-곡장-청운대(P)-백악산-창의문-인왕산(P)-사직공원-돈의문(S)-경향신문-숭례문(S)-목멱산 봉수대(P)-서울역

           (* S: 스템프 찍기  P: 사진찍기------8곳 인증해야만 선물 수령 가능)

0. 거리: 18.6km

예전부터 돌아 볼려고 마음만 먹었던 한양도성 둘레길! 드뎌 출발한다. 새벽같이 울 나라서 젤 빠른 기차에 몸을 싣고 한양역에 내려 지하철을 바꿔 탈려고 지하철 카드로 체크하고 진입을 할려니 에러가 발생 진입금지를 당한다.지방사람이라고 차별하는지~~~한참 당황하다 다른 카드를 이용해서 겨우 들어간다.(아마도 할인카드가 설에는 사용이 안되는가 보다.ㅎㅎ) 주말 아침인지라 지하철은 인산인해다. 말 그대로 설임을 다시한번 실감한다. 개구멍찾듯이 이동하여 흥인지문에 도착하니 날씨는 청명하지만 저넘의 미세먼지는 없어질줄을 모른다. 잠시 기념사진 흔적을 폰에 주어 담고 긴 여정을 시작한다. 방향은 시계 반대방향으로 잡아서인지 둘레길은 한산하지만 산 주변을 지날땐 또 바글바글하다. 중간중간 대로도 건넌다. 지나면서 보니 대부분의 탐방꾼들은 시계방향으로 도는가 싶다. 낮 기온이 올라서인지 덥기까지한다. 김광섭님의"성북동 비둘기"가 도시개발의 애환을 적은 시로 아직도 성북동에는 가늘고 긴 細路가 많아 자전거한대가 겨우 지날정도로다. 그렇지만 첫발을 디뎌보니 감회가 새롭다. 서울의 그 많은 지역이 상전벽해처럼 변화를 거듭했지만 여기는 변화의 물결이 없이 넘 낙후되어 있다. 일부러 이렇게 보관하는지는 몰겠지만 행정인들의 입김이 없는것 같다.산중턱의 마을인지라 시골의 마을과 흡사한게 또 다른 한면의 서울의 모습을 실감하게 만든다. 지나치다보니 만해 한용운선생님의 "심우장" 안내판이 보이길래 잠시 들러 예를 표한다. 또 숙정문 주변 말머리 안내소에 도장 받으러 이리저러 헤매기도한다.ㅎㅎㅎ 북악산 주변엔 1.21사태 소나무가 푸른빛을 더 발산하지만 세월의 무게만큼이나 이겨내는것 같아 다행이다. 당시의 치열했던 총탄 상흔이 뚜렷하게 보인다. 북악산과 인왕산 돈의문 숭례문을 거쳐 목멱산(남산)봉수대에서 최종 마무리를 하면서 둘레길 종주를 마무리한다. 미세먼지가 가득한 한양 도성길... 끝나니 완주증서와 완주기념품(팻찰)도 받는다.지나는 길엔 많은 외국 관광객들도 만나니 설은 국제도시임에 분명한것 같다. 길었지만 한가지 숙제를 마칠수가 있어 행운이다.ㅎㅎㅎ

 

# 오늘 걸었던 한양도성둘레길의 부분 흔적 장면

 

# 들머리 흥인지문(동대문)-흥인지문(興仁之門)은 조선의 수도인 한양의 4대문(大門) 중의 하나로 동쪽의 대문이다. 속칭은 동대문(東大門)으로 이는 조선 초기부터 불린 이름이다. 1963년 1월 21일 대한민국의 보물로 지정되었다.흥인지문은 한양도성의 축조와 함께 1396년에 처음 지어졌다. 1453년(단종 1년)과 1869년(고종 6년)에 고쳐 지었다. 본래 흥인지문은 동대문구에 속했고 구 명칭도 여기에서 유래되었으나 수차례 행정구역이 조정되면서 현재는 종로구의 관할에 속하게 되었다. 조선은 왕이 사는 집(家)인 경복궁(景福宮)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 경복궁을 중심으로 동서남북 4대문을 지었는데 그중 동쪽에 위치한 문이 흥인지문(興仁之門)이다.흥인지문은 일대의 지반이 낮아 땅을 돋운 뒤 건설하여야 해서 1396년(태조 5년) 9월 다른 성문을 건립할 때에도 공사중이었으며, 1398년(태조 7년)에야 비로소 완성되었다. 이 때의 이름은 흥인문(興仁門)이었다. 1451년(문종 1년) 3월에는 도성을 고쳐 쌓은 뒤 기한이 남아 흥인지문을 혜화문과 더불어 수리하였다. 같은 해 10월에 본격적인 흥인지문 정비를 시작하여, 1453년(단종 1년) 5월에 완료하였다.1724년(영조 즉위년)에는 발인 때 상여가 나가기가 쉽게 하기 위하여 국장도감에서 건의한 대로 흥인지문의 박석을 파내려갔다. 1868년(고종 5년)에는 흥인지문이 크게 손상되었기에 의정부에서 그 수리를 요청하였다. 이듬해 3월에 중수를 끝냈다. 이 즈음 풍수지리에 따라 한양 동쪽의 지기가 약하다고 하여 그 기운을 북돋기 위하여 특별히 지(之)자를 넣어 넉 자로 이름을 고쳤다고 전해진다. 그래서 흥인지문의 현판은 4대문 중 유일하게 4글자 정사각형으로 되어 있다.1907년(고종 44년) 3월에는 흥인지문과 숭례문의 좌우측 성벽을 8칸씩 헐어 전차 선로를 부설하였다. 조선총독부에 의해 보물 1호로 지정되었는데, 이것이 흥인지문을 숭례문과 함께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이 지나간 역사적 의미가 있는 상징물로 여겼기 때문이라는 주장이 있다.1999년에는 옹성이 붕괴되어 8월부터 이듬해 4월까지 3억여원을 들여 보수하였으나, 옹성 아랫부분이 튀어나오는 '배부름 현상'이 일어나 재시공을 결정하였다. 지하철이 개통된 이후 지하수위가 낮아지고 지반이 침하되었으며, 2002년 12월부터 2007년 8월까지 옹성을 해체하여 지반 보강 후 복원하였다.2015년에는 도로를 내면서 끊어진 문 북쪽의 도성 자리에 석재를 포장하는 공사가 이루어졌다.도착후 한양도성 둘레길이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입구에 도착하니 스탬프와 지도가 보관되어 있어 스템프를 찍고 흔적을 남기면서 출발신호가 시작된다. 요땅~~~~~ 스템프 첫 인증지(仁)

 

# 흥인지문 공원과 도성에서 내려다본 흥인지문

 

# 한양도성 안내판

#  모 방송국에서 나온것 같은 도성 주변 마을길

 

# 도성에서 바라다본 목멱산 서울타워- 출발후 한바퀴 돌아 서울타워까지 도착해야 둘레길 일정이 마무리된다. 아득하다.ㅋㅋ

 

# 낙산공원-도성 인증확인 할려면 여기서 사진을 남겨야한다.(첫번째 사진 인증지)

 

#  옛 성곽과 새로 보수된 도성의 윤곽이 분명하게 구분되지만 과거 선조들이 공들여 쌓은 돌담이 넘 단단하게 만들어진것 같다. 요새 같으면 기계로 한다지만 당시엔 100% 인력으로 한것 치곤 대단한 결과물인것 같다.

 

# 혜화문-한양도성의 동쪽문으로 1396년 태조5년에 당시엔 흥화문으로 불렀으나 1511년(중종6년)혜화문으로 변경되었고 영조때는 없던 문루를 지었다. 문루는 1928년 흥예는 1938년 헐렸는데 1994년에 본래보다 북쪽으로 옮긴자리에 문루와 흥예를 새로 지었다고한다.

 

# 심우장-사적 제550호로 성북구 성북로29길 24에 위치하고 있으며  님의 침묵의 저자이신  한용운선생님이 1933~1944년까지 살았던 집으로 심우장과 향나무가 있으며 심우장은 전체 5칸으로 가운데 대청을 중심으로 온돌방,부억,찬마루방이 있다.심우장은 한용운선생님의 서재로 깨우침을 찾아 수행하는 과정을 소를 찾는 일에 비유한 불교 설화에서 따온 것으로 알려져있다.

 

#  말바위

 

# 숙정문-1396년(태조 5년) 9월에 도성 사대문과 사소문을 준공할 때 함께 세운 문으로 서울특별시 종로구 삼청동 산 25-22에 있다. 일제강점기에는 문루(門樓)가 없었지만 1976년에 복원할 때 세웠다.원래는 '지혜를 드러내지 않는다'는 뜻의 '숙청문(肅淸門)'이라고 했으나 이후 중종 때에 '청(淸)'을 고요하고 안정되어 있다'는 '정(靖)'자로 바꾸어 '숙정문'이 되었다. 1523년(중종 18년) 처음으로 '숙정문'이라는 표기가 쓰인 후 혼용되다가 '숙정문'으로 굳은 듯 하다.한양도성 사대문의 이름에는 음양오행사상이 강하게 영향을 주었으며, 5대 덕목 '인의예지신'과 동서남북이 서로가 서로에게 대응하도록 작명했다. 인(仁)의 경우 어질다는 의미에 걸맞게 사계절 중 온화한 봄(春)에 대응하며, 이는 오행사상에 따라 목(木)에 해당하는 동(東)문의 이름으로 사용되었다. 반면 의(義)는 엄정해야 하기에 계절로서는 가을(秋)에 대응하며, 오행 중 금(金)에 해당하는 서(西)문의 이름으로 사용되었다. 예(禮)는 화려히 드러내는 것이라 하여 여름(夏)에 대응했으며, 오행 중에서는 화(火)에 해당하는 남(南)문의 이름이 되었다. 마지막으로 지(智)는 공자의 지자요수(知者樂水, 지혜로운 자는 물을 좋아한다)의 고사에서도 알 수 있듯이 오행 중 수(水)에 대응하며, 계절로는 겨울(冬)이 된다. 그래서 숙정문엔 원래 '지(智)'가 이름에 들어가야했지만 여기만 규칙을 따르지 않았다. 확실한 이유는 알 수 없으나, '숙청문(肅淸門)'의 '청(淸)'에 이미 물(水)이 있어 '지(智)'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고 해석하는 의견도 있다.원래 이름을 '숙청문' 또는 '숙정문'이 아니라 '소지문(昭智門)'으로 하려 했다는 소리가 있지만 명확한 근거는 없다. 대신 숙종 때 서울 한양도성을 보완하기 위해 세운 탕춘대성의 성문 홍문(弘智門)에 지(智) 자를 써서 인의예지신을 완성했다.(펀글)-2번째 스템프자리

 

#  북한산 산줄기를 뒤로하고 흔적을 남겨본다.

 

#  청운대(293m)- 청와대 뒷편에서 청와대를 감싸듯이 북쪽을 가로 막고 있는 형세의 산으로 한양도성 사진인증 2번째 지역

 

# 1.21사태소나무- 1968.1.21. 북한 124군부대 소속 김신조 등 31명의 무장공비들이 청와대 습격을 목적으로 침투하여 현재 청운실버센터앞에서 경찰과 교전 후 북악산 및 인왕산 지역으로 도주하여 우리 군경과 치열한 교전 중 현 소나무에 15발의 총탄 흔적이 남게 되었고 그 후 1.21사태 소나무라 부르고 있으며, 당시 14일간 교전으로 무장공비 31명중 28명 사살,1명 생포,2명도주의 전과를 올려 이를 게기로 1968.4.1. 향토예비군이 창설되는 계기가 되었다.

 

# 북악산(백악산)- 정상의 돌이 흰색인것 같아서 백악산으로 불러지고 있는듯하는 필자의 견해(아래 사진)...ㅋㅋ

 

# 북악산 내리막길 산성- 창의문으로 내려가는 급내리막길의 산성이지만 많은 사람들이 창의문을 출발 올라오는데 기진맥진한 모습들은 볼 수가 있다. 그 중 일부는 산성옆에 앉아서 갈길을 잃은듯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정면이 부암동이지 싶다.

 

# 창의문(彰義門)은 조선의 수도인 한양의 4소문(小門) 중의 하나로 서북쪽에 있는 문이다. 양주군과 의주군으로 향하던 관문으로 근처 계곡의 이름을 따서 자하문(紫霞門)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북소문(北小門)이라는 속칭이 있으나, 이는 근대에 와서야 불린 이름이다.창의문은 한양도성의 축조와 함께 1396년에 건립되었다. 현재의 문은 1741년에 세운 것으로 4소문 가운데 유일하게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2015년 12월 2일 대한민국의 보물 제1881호로 지정되었다. 왕들이 경복궁에 들어갈 때 쓰는 문이다. 어느 한 승려가 선조에게 이 문을 열고 사람들이 마구 왕래하면 이 나라가 망한다고 하자 창의문을 폐쇄해버렸다. 그러나 이후 인조반정 때 반정군이 문을 여는 게 아니라 아예 박살내고 도성에 들어왔고 이를 빌미로 후에 청나라가 병자호란을 일으켰다는 설이 돌기도 했다.1396년(태조 5년) 9월 다른 성문과 함께 완공되었다. 1413년(태종 13년)에는 풍수지리설에서 이 문을 열어놓으면 궁궐과 왕조에게 액을 불러온다는 미신으로 풍수학자 최양선이 건의하여 폐쇄하였다. 때때로 임시 개방을 하기도 하였는데, 예로 1422년(세종 4년)에 도성을 정비하는 일을 원활히 하고자 창의문과 숙정문을 연 일이 있다. 이후 한동안 열어 두던 창의문은 1446년(세종 28년) 4월에 닫혔다. 1469년(예종 1년) 3월에도 문을 닫으라는 명이 있었다.1623년(광해군 14년) 3월 12일 밤 홍제원에 집결한 반정군이 세검정과 창의문을 통과하여 인조반정을 일으켰다. 영조 때에는 훈련대장 구성임(具聖任)의 청으로 창의문을 개수하기로 하여 1741년(영조 17년) 6월 16일 문루를 설치하였다.

 

# 윤동주 시인의 언덕- 서시는 중국 용정 대성중학교 운동장에 설치되어 있는것을 본 적이 있는데도 여기서 다시 보시 감회가 새롭게 느껴진다. 오늘도 많은 사람들이 시 낭송 행사를 하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된다.

*2016.1.13. 중국 길림성 용정 대성중학교 교정에 설치된 서시

#  한양도성 부부 사랑나무-나무가 희안하게 직선으로 붙어 있는데 아마도 모자 나무인듯하다. 과거에는 땅속에 묻혀서 뿌리로 연결되어 새싹이 돋아 커가는 과정에 뿌리가 흙바깥으로 돌출되는 형태를 보이면서 이런 모습이 되지 않았나 추측해본다.(필자생각)

 

# 인왕산 정상(338.2m)-몇해전 청와대 방문시에 서쪽 방면에 있던 큰 바위를 오늘에서야 올라본다. 오르니 서대문지역이 한눈에 들어온다. 사진 인증 3번째 지역

 

 

# 범바위-돈의문 방향으로 하산하는 길목에 있는 바위를 잠시 올라선다.

 

# 서울 홍파동 홍난파 가옥(서울 紅把洞 洪蘭坡 家屋)은 서울특별시 종로구 홍파동에 있는 주택이다. 2004년 9월 4일 대한민국의 국가등록문화재 제90호로 지정되었으며, 홍파동 홍난파 가옥은 1930년대 독일 선교사가 지은 벽돌조 서양식 건물을 작곡가 홍난파가 인수하여 살던 곳이다. 홍난파의 대표곡들이 작곡된 곳이고, 1930년대 서양식 주택 특성이 잘 보존되어 있어 가치가 있다.(펀글)

 

# 돈의문-돈의문(敦義門)' 뜻은 '의(義)를 두텁게 하는(敦) 문(門)'이다. '의(義)' 자는 전통적으로 서쪽을 가리켰기 때문에 돈의문 이름 뜻을 '서쪽을 두텁게 하다'로 해석하기도 한다.이명(異名)은 '서대문(西大門)'이다. 한양도성의 서쪽 대문이란 뜻이다. 이때문에 서울 서대문구에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사실 중구 정동 현 경향신문 사옥 앞 정동사거리 건너편의 현재 행정구역인 종로구 평동에 위치한다. 중구 서쪽 지역 및 종로구 서부 지역은 1975년에 서대문구에서 중구 및 종로구로 편입되었기 때문에 1975년까지는 실제로 서대문구에 돈의문 터가 있었다. 동대문  동대문구와 유사한 경우이다.1396년 한양의 2차 성곽공사를 마무리할 때 8개 성문을 지었는데, 돈의문도 이때 세워졌다. 당시 위치는 지금의 독립문 근처 사직동 고개쯤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태종 13년(1413)에 풍수학생(風水學生) 최양선(崔揚善)이 풍수적으로 돈의문의 자리가 좋지 않다고 주장하여 돈의문이 폐쇄되었다. 태종은 대신할 문을 어디에 세울지 의정부에 명하여 찾게 했는데, 이때 태종의 대표적 권신 안성군 이숙번의 집 앞에 있는 옛길을 따라서 문을 세우면 좋겠다는 의견이 나왔다. 그러자 이숙번은 상왕 정종이 기거하는 인덕궁 앞 작은 동네가 길을 새로 내어 문을 설치할 만한 곳이라고 다른 의견을 내자 조정이 그대로 따라 서전문(西箭門)을 세웠다. 서전문은 경희궁이 있던 서쪽 언덕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세종 4년(1422)에 세종은 서전문을 헐어버리고 오늘날 신문로 언덕 위에 새롭게 문을 세운 뒤 이름을 옛날과 같이 돈의문이라 하였다. 이 문이 바로 지금 우리가 아는 그 돈의문이다. 백성들은 세종이 세운 돈의문을 '새로 세운 문'이라는 뜻으로 '새문'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개화기 정동에 들어선 새문안교회도 '새문 안에 세운 교회'라는 뜻으로 이름을 붙였다. 육조거리에서 돈의문까지 잇는 길을 새문안길(신문로)라 불렀으며, 이게 현 도로명 체계에서도 그대로 사용되었다.'새문'이라는 호칭이 '막을 색(塞)'에서 왔다는 이야기도 있다. 권신 이숙번은 돈의문 근처에 큰 집을 짓고 살았는데, 문으로 사람이 통행하고 마소가 오가므로 시끄럽다는 이유로 문을 막아버리고 통행을 금했다 하여 색문(塞門)이라 부르고 부근 마을을 색문동(塞門洞)이라 하였는데, 후에 새문, 새문동으로 음이 변했다는 것이다.세월이 지나 돈의문의 성문과 성루가 낡자 숙종 37년(1711)에 다시 지었다. 이 당시 돈의문으로 어가가 지나다녔기 때문에 규모를 크게 할지 논의가 있었는데, 남아있던 석축의 폭이 너무 좁고 수평이 안 맞는 등 구조적인 문제가 있으며 정문인 흥인문, 숭례문과 격이 다르다는 등의 여러 사정으로 단층 문루로 짓게 된다. 그후 시간은 흘러 일제강점기 1915년 일제는 경성(서울)을 개발하며 전차궤도를 복선화하려 했는데, 돈의문이 방해가 되었다. 총독부가 처음에는 모두 헐기로 했으나 흥인지문은 임진왜란 때 일본군이 입성한 문이라는 이유로 헐지 않고 문 양쪽 성벽만 없애 전차 노선을 유지하였고 돈의문만 철거했다.그렇게 조선 초부터 약 500년 간 서쪽 대문 역할을 하던 돈의문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그 이후 철거된 돈의문의 기와와 목재는 경매에 부처져 염덕기(廉德基)라는 자에게 205원 50전에 팔렸다. 당시 쌀 한가마니가 16원 정도였다고 한다. 현재 시세로 치면 200만원. 나머지 체성의 석재와 주변 성벽은 도로 공사 자재로 사용되었다고 한다.철거과정에서 돈의문의 편액(현판)만은 남았는데, 창덕궁의 행각에 보관해 오다가 1992년에 덕수궁 궁중유물전시관 수장고를 거쳐 2005년 국립고궁박물관으로 이관되었고, 2014년부터 한양도성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예전 철거전의 돈의문이지만 지금은 흔적도 없으니 이를 복원해야만 하는게 아닌가 싶다.(역사공부)

 

# 돈의문 주변 스템프 인증 지역- 돈의문은 지금 흔적도 없는것 같은데 4대문이 완전하게 보전되었으면한다. 3번째 스템프 지역으로

 

# 숭례문(崇禮門)은 조선의 수도였던 서울의 4대문(大門) 중의 하나로 남쪽의 대문이다. 흔히 남대문(南大門)이라고도 부른다. 서울 4대문 및 보신각(普信閣)의 이름은 오행사상을 따라 지어졌는데, 이런 명칭은 인(仁: 동), 의(義: 서), 례(禮: 남), 지(智: 북), 신(信: 중앙)의 5덕(五德)을 표현한 것이었으며, 숭례문의 '례'는 여기서 유래한 것이다. 숭례문의 편액은 《지봉유설》에 따르면 양녕대군이 썼다고 알려져 있으나 이설이 많다. 1396년(태조 5년)에 최유경의 지휘로 축성하였다.1447년(세종 29년)과 1479년(성종 10년) 고쳐 지었다.2006년 3월 3일, 숭례문이 도로에 의해 고립되어 버리는 것을 막고, 시민들에게 문화재를 가까이 하기 위하여 서울특별시에서 숭례문의 중앙통로를 일반인에게 개방하였다. 2008년 2월 10일 오후 8시 40분 전후 방화범 채종기의 방화로 인해 불타기 시작해 약 5시간 후인 11일 오전 1시 54분, 목조 건물 일부와 석축 기반을 남기고 2층 누각이 모두 붕괴되어 소실되었다. 서울 중구청에서 외부인의 접근을 통제하기 위한 가림막을 설치했고, 기온이나 강수, 바람 등 기상요인에 의한 추가 붕괴 방지를 위하여 덮개를 씌웠다. 문화재청에서는 소실된 숭례문을 원형에 가깝게 복구할 계획을 발표하였다. 2013년 4월 29일 완공되어, 2013년 5월 4일 복원 완료를 기념하는 완공식이 거행되었다.- 스템프 인증4번째(최종)인

 

# 목멱산 서울타워-아래서 올라서는 오르막길은 한동안 숨을 멈추게할 정도로 힘이 드는 구간인것 같다.

 

# 목멱산봉수대- 마지막 사진 인증지역에서 흔적을 남기면서 한양도성 둘레길을 마무리한다.

 

# 목멱산을 올라 다시 원점으로 내려온 안중근의사 기념관 앞-"국가안위 노심초사"란 글귀가 선명하게 각인되어 있다.

 

 

 

# 오늘 완주한 전리품-한양도성 리본(목멱산사무실)과 스템프 리본(숭례문사무실)에서 받아든다.

 

                                  성북동 비둘기

                                                                                                  written by 김광섭

  『성북동 산에 번지가 새로 생기면서

    본래 살던 성북동 비둘기만이 번지가 없어졌다.

    새벽부터 돌 깨는 산울림에 떨다가

    가슴에 금이 갔다.

    그래도 성북동 비둘기는

    하느님의 광장같은 새파란 아침 하늘에

    성북동 주민에게 축복의 메시지나 전하듯

    성북동 하늘을 한 바퀴 휘돈다.

 

    성북동 메마른 골짜기에는

    조용히 앉아 콩알 하나 찍어 먹을

    널직한 마당은커녕 가는 데마다

    채석장 포성이 메아리쳐서

    피난하듯 지붕에 올라 앉아

    아침 구공탄 굴뚝 연기에서 향수를 느끼다가

    산 1번지 채석장에 도로 가서

    금방 따낸 돌 온기에 입을 닦는다.

 

    예전에는 사람을 성자처럼 보고

    사람 가까이서

    사람과 같이 사랑하고

    사람과 같이 평화를 즐기던

    사랑과 평화의 새 비둘기는

    이제 산도 잃고 사람도 잃고

    사랑과 평화의 사상까지

    낳지 못하는 쫓기는 새가 되었다.』  (1968.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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