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2. 6. 16:51ㆍ한시와 명언 보기
김삿갓〔金笠〕詩選
1. 爲爲(하고 또 하고)
爲爲不厭更爲爲 不爲不爲更爲爲
해도 해도 싫지 않아 다시 하고 또 하고, 안 한다 안 한다 하면서도 다시 하고 또 하고
2. 自知(스스로 앎)
自知 晩知 補知 早知
스스로 알려고 하면 늦게 알아지고, 도움을 받아 알려고 하면 빨리 알아진다.
3. 嚥乳章三章(젖 빠는 노래 3수)
父嚥其上, 婦嚥其下, 上下不同, 其味則同,
부연기상 부연기하 시아비는 그 위를 빨고, 며느리는 그 아래를 빠네
상하부동 기미칙동 위와 아래가 같지 않지만, 그 맛은 한가지일세.
父嚥其二, 婦嚥其一, 一二不同, 其味則同.
부연기이 부연기일 시아비는 그 둘을 빨고 며느리는 그 하나를 빠네
일이부동 기미칙동 하나와 둘이 같지 않지만 그 맛은 한가지일세.
父嚥其甘, 婦嚥其酸, 甘酸不同, 其味則同
부연기감 부연기산 시아비는 그 단 곳을 빨고 며느리는 그 신 곳을 빠네
감산부동 기미칙동 달고 신 것이 같지 않지만 그 맛은 한 가지일세.
4. 辱說某書堂 (서당 욕설시)
書堂乃早知 房中皆尊物 生徒諸未十 先生來不謁
서당을 일찍부터 알고 와보니 방 안에 모두 귀한 분들일세.
생도는 모두 열 명도 못 되고 선생은 와서 뵙지도 않네.
* 추운 겨울날 서당에 찾아가 재워주기를 청하나 훈장은 미친 개 취급하며 내쫓는다. 인정 없는 훈장을 욕하는 시. 소리 나는 대로 읽어야 제 맛이 난다.
5. 妓女에게 당하다.
삿갓 : 毛深內闊必過人
모심내활필과인 털 깊고 속 넓으니 누가 붐명 지나갔구나.
가련 : 後園黃栗不蜂裂
뒷산 노란 밤송이는 벌이 쏘지 않아도 벌어지고
溪邊楊柳不雨長
개천가 버들가지는 비 안 맞아도 잘 자라 늘어진다오
6. 詠笠 (내 삿갓)
浮浮我笠等虛舟 一着平生四十秋
牧堅輕裝隨野犢 漁翁本色伴沙鷗
醉來脫掛看花樹 興到携登翫月樓
俗子依冠皆外飾 滿天風雨獨無愁
가뿐한 내 삿갓이 빈 배와 같아 한번 썼다가 사십 년 평생 쓰게 되었네.
목동은 가벼운 삿갓 차림으로 소 먹이러 나가고 어부는 갈매기 따라 삿갓으로 본색을 나타냈지.
취하면 벗어서 구경하던 꽃나무에 걸고 흥겨우면 들고서 다락에 올라 달 구경하네.
속인들의 의관은 모두 겉치장이지만 하늘 가득 비바람쳐도 나만은 걱정이 없네.
*자신의 조부를 탄핵하고 시작한 방랑 생활. 언제나 벗이 되어 주며 비바람에도 몸을 보호해주는 삿갓에 대한 고마움을 표현했다.
* …… 그리해서 '병연'은 그 이름과 함께 사라지고 말았다. 이때부터 이 시인은 '병연'이란이름을 스스로 숨기고 잊어 버렸다. 그리고 삿갓을 쓴 이름없는 시인이 되었다……그가 읊은 자신의 '삿갓'시는 표연자적하는 자연과 풍류 속의 자기 운명을 그린 자화상이었다. -양기원 <김삿갓 이야기>
7. 自嘆 (스스로 탄식하다)
嗟乎天地間男兒 知我平生者有誰
萍水三千里浪跡 琴書四十年虛詞
靑雲難力致非願 白髮惟公道不悲
驚罷還鄕夢起坐 三更越鳥聲南枝
슬프다 천지간 남자들이여 내 평생을 알아줄 자가 누가 있으랴.
부평초 물결 따라 삼천리 자취가 어지럽고 거문고와 책으로 보낸 사십 년도 모두가 헛것일세.
청운은 힘으로 이루기 어려워 바라지 않았거니와 백발도 정한 이치이니 슬퍼하지 않으리라.
고향길 가던 꿈꾸다 놀라서 깨어 앉으니 삼경에 남쪽 지방 새 울음만 남쪽 가지에서 들리네.
*월조(越鳥)는 남쪽 지방의 새인데 다른 지방에 가서도 고향을 그리며 남쪽 가지에 앉는다고한다.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나타내는 말로 쓰였다.
8. 竹詩(대나무 시)
此竹彼竹化去竹 風打之竹浪打竹
飯飯粥粥生此竹 是是非非付彼竹
賓客接待家勢竹 市井賣買歲月竹
萬事不如吾心竹 然然然世過然竹
이대로 저대로 되어 가는 대로 바람치는 대로 물결치는 대로
밥이면 밥, 죽이면 죽, 이대로 살아가고 옳으면 옳고 그르면 그르고, 저대로 맡기리라.
손님 접대는 집안 형세대로 시장에서 사고 팔기는 세월대로
만사를 내 마음대로 하는 것만 못하니 그렇고 그런 세상 그런대로 지나세.
* 한자의 훈(訓)을 빌어 절묘한 표현을 하였다.
此 이 차, 竹 대나무 죽 : 이대로
彼 저 피, 竹 : 저대로
化 화할 화(되다), 去 갈 거, 竹 : 되어 가는 대로
風 바람 풍, 打 칠 타, 竹 : 바람치는 대로
浪 물결 랑, 打 竹 : 물결치는 대로
9. 二十樹下 (스무나무 아래)
二十樹下三十客 四十家中五十食
人間豈有七十事 不如歸家三十食
스무나무 아래 서른 나그네가 마흔 집안에서 쉰 밥을 먹네.
인간 세상에 어찌 일흔 일이 있으랴. 차라리 집으로 돌아가 서른 밥을 먹으리라.
*二十樹 : 스무나무는 느릅나무과에 속하는 나무 이름
三十客 : 三十은 '서른'이니 '서러운'의 뜻. 서러운 나그네.
四十家 : 四十은 '마흔'이니 '망할'의 뜻. 망할 놈의 집.
五十食 : 五十은 '쉰'이니 '쉰(상한)'의 뜻. 쉰 밥.
七十事 : 七十은 '일흔'이니 '이런'의 뜻. 이런 일.
三十食 : 三十은 '서른'이니 '선(未熟)'의 뜻. 설익은 밥.
*함경도 지방의 어느 부잣집에서 냉대를 받고 나그네의 설움을 한문 수자 새김을 이용하여 표현한 시이다.
10. 無題무제
四脚松盤粥一器 天光雲影共排徊
主人莫道無顔色 吾愛靑山倒水來
네 다리 소반 위에 멀건 죽 한 그릇. 하늘에 뜬 구름 그림자가 그 속에서 함께 떠도네.
주인이여, 면목이 없다고 말하지 마오. 물 속에 비치는 청산을 내 좋아한다오.
*산골의 가난한 농부 집에 하룻밤을 묵었다. 가진 것 없는 주인의 저녁 끼니는 멀건 죽. 죽 밖에 대접할 것이 없어 미안해하는 주인에게 시 한 수를 지어 주지만 글 모르는 그에게 무슨소용이 있으랴.
11. 風俗薄(야박한 풍속)
斜陽鼓立兩柴扉 三被主人手却揮
杜宇亦知風俗薄 隔林啼送不如歸
석양에 사립문 두드리며 멋쩍게 서있는데 집 주인이 세 번씩이나 손 내저어 물리치네.
저 두견새도 야박한 풍속을 알았는지 돌아가는 게 낫다고 숲속에서 울며 배웅하네.
12. 難貧(가난이 죄)
地上有仙仙見富 人間無罪罪有貧
莫道貧富別有種 貧者還富富還貧
지상에 신선이 있으니 부자가 신선일세. 인간에겐 죄가 없으니 가난이 죄일세.
가난뱅이와 부자가 따로 있다고 말하지 말게나. 가난뱅이도 부자되고 부자도 가난해진다오.
13. 姜座首逐客詩 (강좌수가 나그네를 쫓다)
祠堂洞裡問祠堂 輔國大匡姓氏姜
先祖遺風依北佛 子孫愚流學西羌
主窺첨下低冠角 客立門前嘆夕陽
座首別監分外事 騎兵步卒可當當
사당동 안에서 사당을 물으니 보국대광 강씨 집안이라네.
선조의 유풍은 북쪽 부처에게 귀의했건만 자손들은 어리석어 서쪽 오랑캐 글을 배우네.
주인은 처마 아래서 갓을 숙이며 엿보고 나그네는 문 앞에 서서 지는 해를 보며 탄식하네.
좌수 별감이 네게는 분에 넘치는 일이니 기병 보졸 따위나 마땅하리라.
*김삿갓을 내쫓은 주인은 나그네가 갔나 안 갔나 확인하려고 갓을 숙이고 엿보는데 김삿갓은 문 앞에 서서 인심 고약한 주인을 풍자하고 있다.
14. 開城人逐客詩(개성 사람이 나그네를 내쫓다)
邑號開城何閉門 山名松嶽豈無薪
黃昏逐客非人事 禮義東方子獨秦
고을 이름이 개성인데 왜 문을 닫나 산 이름이 송악인데 어찌 땔나무가 없으랴.
황혼에 나그네 쫓는 일이 사람 도리 아니니 동방예의지국에서 자네 혼자 되놈일세.
15. 逢雨宿村家(비를 만나 시골집에서 자다)
曲木爲椽첨着塵 其間如斗僅容身
平生不欲長腰屈 此夜難謀一脚伸
鼠穴煙通渾似漆 봉窓茅隔亦無晨
雖然免得衣冠濕 臨別慇懃謝主人
굽은 나무로 서까래 만들고 처마에 먼지가 쌓였지만
그 가운데가 말만해서 겨우 몸을 들였네.
평생 동안 긴 허리를 굽히려 안했지만
이 밤에는 다리 하나도 펴기가 어렵구나.
쥐구멍으로 연기가 들어와 옻칠한 듯 검어진 데다
봉창은 또 얼마나 어두운지 날 밝는 것도 몰랐네.
그래도 하룻밤 옷 적시기는 면했으니
떠나면서 은근히 주인에게 고마워 했네.
*어느 시골집에서 비를 피하며 지은 것으로 궁벽한 촌가의 정경과 선비로서의 기개가 엿보는 시이다. 누추하지만 나그네에게 비를 피할 수 있도록 베풀어 준 주인의 따뜻한 마음에 감하면서 세속에 굽히지 않으려는 의지를 볼 수 있다.
16. 艱飮野店(주막에서)
千里行裝付一柯 餘錢七葉尙云多
囊中戒爾深深在 野店斜陽見酒何
천릿길을 지팡이 하나에 맡겼으니 남은 엽전 일곱 푼도 오히려 많아라.
주머니 속 깊이 있으라고 다짐했건만 석양 주막에서 술을 보았으니 내 어찌하랴.
*지팡이에 몸을 의지하고 떠돌아 다니는 나그네 길, 어쩌다 생긴 옆전 일곱닢이 전부지만 저녁놀이 붉게 타는 어스름에 술 한 잔으로 허기를 채우며 피곤한 몸을 쉬어가는 나그네의 모습.
17. 失題(제목을 잃어 버린 시)
許多韻字何呼覓 彼覓有難況此覓
一夜宿寢懸於覓 山村訓長但知覓
수많은 운자 가운데 하필이면 '멱'자를 부르나. 그 '멱'자도 어려웠는데 또 '멱'자를 부르다니.
하룻밤 잠자리가 '멱'자에 달려 있는데 산골 훈장은 오직 '멱'자만 아네.
*김삿갓이 어느 산골 서당에 가서 하룻밤 재워 달라고 하니 훈장이 시를 지으면 재워 주겠다고 하면서 시를 짓기 어려운 '멱'(覓)자 운을 네 번이나 불렀다. 이에 훈장을 풍자하며 재치있게 네 구절 다 읊었다.
18. 宿農家(농가에서 자다)
終日緣溪不見人 幸尋斗屋半江濱
門塗女와元年紙 房掃天皇甲子塵
光黑器皿虞陶出 色紅麥飯漢倉陳
平明謝主登前途 若思經宵口味幸
골짜기 따라 종일 가도 사람을 못 보다가
다행히도 오두막집을 강가에서 찾았네.
문을 바른 종이는 여와 시절 그대로고
방을 쓸었더니 천황씨 갑자년 먼지일세.
거무튀튀한 그릇들은 순임금이 구워냈고
불그레한 보리밥은 한나라 창고에서 묵은 것일세.
날이 밝아 주인에게 사례하고 길을 나섰지만
지난밤 겪은 일을 생각하면 입맛이 쓰구나.
*여와는 중국 전설에 나오는 천지를 만들었다는 인물, 천황씨는 전설에 나오는 고대 중국 임금.
19. 過安樂見(안락성을 지나다가 배척받고)
安樂城中欲暮天 關西孺子聳詩肩
村風厭客遲炊飯 店俗慣人但索錢
虛腹曳雷頻有響 破窓透冷更無穿
朝來一吸江山氣 試向人間벽穀仙
안락성 안에 날이 저무는데
관서지방 못난 것들이 시 짓는다고 우쭐대네.
마을 인심이 나그네를 싫어해 밥 짓기는 미루면서
주막 풍속도 야박해 돈부터 달라네.
빈 배에선 자주 천둥 소리가 들리는데
뚫릴 대로 뚫린 창문으로 냉기만 스며드네.
아침이 되어서야 강산의 정기를 한번 마셨으니
인간 세상에서 벽곡의 신선이 되려 시험하는가.
*벽곡은 신선이 되기 위해 곡식을 먹지 않고 수련하는 방법.
*안락성에서 안락하지 않게 밤을 지냈음을 풍자했다.
20. 自詠(스스로 읊다)
寒松孤店裡 高臥別區人
近峽雲同樂 臨溪鳥與隣
치銖寧荒志 詩酒自娛身
得月卽帶憶 悠悠甘夢頻
겨울 소나무 외로운 주막에 한가롭게 누웠으니 별세상 사람일세.
산골짝 가까이 구름과 같이 노닐고 개울가에서 산새와 이웃하네.
하찮은 세상 일로 어찌 내 뜻을 거칠게 하랴. 시와 술로써 내 몸을 즐겁게 하리라.
달이 뜨면 옛생각도 하며 유유히 단꿈을 자주 꾸리라.
*세속에 물들지 않고 시와 술로 근심을 잊으며 자연과 함께 살아가는 풍류객의 모습을 그렸다.
21. 思鄕(고향 생각)
西行己過十三州 此地猶然惜去留
雨雪家鄕人五夜 山河逆旅世千秋
莫將悲慨談靑史 須向英豪問白頭
玉館孤燈應送歲 夢中能作故園遊
서쪽으로 이미 열세 고을을 지나왔건만 이곳에서는 떠나기 아쉬워 머뭇거리네.
아득한 고향을 한밤중에 생각하니 천지 산하가 천추의 나그네길일세.
지난 역사를 이야기하며 비분강개하지 마세. 영웅 호걸들도 다 백발이 되었네.
여관의 외로운 등불 아래서 또 한 해를 보내며 꿈 속에서나 고향 동산에 노닐어 보네.
*오야(五夜)는 오경(五更)으로 오전 3시부터 5시 까지이다.
22. 卽吟(즉흥적으로 읊다)
坐似枯禪反愧髥 風流今夜不多兼
燈魂寂寞家千里 月事肅條客一첨
紙貴淸詩歸板粉 肴貧濁酒用盤鹽
瓊거亦是黃金販 莫作於陵意太廉
내 앉은 모습이 선승 같으니 수염이 부끄러운데
오늘 밤에는 풍류도 겸하지 못했네.
등불 적막하고 고향집은 천 리인데
달빛마저 쓸쓸해 나그네 혼자 처마를 보네.
종이도 귀해 분판에 시 한 수 써놓고
소금을 안주 삼아 막걸리 한 잔 마시네.
요즘은 시도 돈 받고 파는 세상이니
오릉땅 진중자의 청렴만을 내세우지는 않으리라.
*진중자(陳仲子)는 제나라 오릉(於陵)에 살았던 청렴한 선비.
23. 自顧偶吟(나를 돌아보며 우연히 짓다)
笑仰蒼穹坐可超 回思世路更초초
居貧每受家人謫 亂飮多逢市女嘲
萬事付看花散日 一生占得月明宵
也應身業斯而已 漸覺靑雲分外遙
푸른 하늘 웃으며 쳐다보니 마음이 편안하건만
세상길 돌이켜 생각하면 다시금 아득해지네.
가난하게 산다고 집사람에게 핀잔 받고
제멋대로 술 마신다고 시중 여인들에게 놀림 받네.
세상만사를 흩어지는 꽃같이 여기고
일생을 밝은 달과 벗하여 살자고 했지.
내게 주어진 팔자가 이것뿐이니
청운이 분수밖에 있음을 차츰 깨닫겠네
*세속의 번잡스러움에서 벗어나 자연과 더불어 유유자적하며 지내는 자신의 생활을 감회에 젖어 읊은 시이다.
24. 是是非非詩(시시비비)
年年年去無窮去 日日日來不盡來
年去月來來又去 天時人事此中催
이 해 저 해 해가 가고 끝없이 가네. 이 날 저 날 날은 오고 끝없이 오네.
해가 가고 날이 와서 왔다가는 또 가니 천시(天時)와 인사(人事)가 이 가운데 이뤄지네.
是是非非非是是 是非非是非非是
是非非是是非非 是是非非是是非
옳은 것 옳다 하고 그른 것 그르다 함이 꼭 옳진 않고
그른 것 옳다 하고 옳은 것 그르다 해도 옳지 않은 건 아닐세.
그른 것 옳다 하고 옳은 것 그르다 함, 이것이 그른 것은 아니고
옳은 것 옳다 하고 그른 것 그르다 함, 이것이 시비일세.
25. 蘭皐平生詩(난고평생시)
鳥巢獸穴皆有居 顧我平生獨自傷
芒鞋竹杖路千里 水性雲心家四方
尤人不可怨天難 歲暮悲懷餘寸腸
初年自謂得樂地 漢北知吾生長鄕
簪纓先世富貴人 花柳長安名勝庄
隣人也賀弄璋慶 早晩前期冠蓋場
髮毛稍長命漸奇 灰劫殘門飜海桑
依無親戚世情薄 哭盡爺孃家事荒
終南曉鍾一納履 風土東邦心細量
心猶異域首丘狐 勢亦窮途觸藩羊
南州從古過客多 轉蓬浮萍經幾霜
搖頭行勢豈本習 口圖生惟所長
光陰漸向此中失 三角靑山何渺茫
江山乞號慣千門 風月行裝空一囊
千金之子萬石君 厚薄家風均試嘗
身窮每遇俗眼白 歲去偏傷빈髮蒼
歸兮亦難佇亦難 幾日彷徨中路傍
새도 둥지가 있고 짐승도 굴이 있건만
내 평생을 돌아보니 너무나 가슴 아파라.
짚신에 대지팡이로 천 리 길 다니며
물처럼 구름처럼 사방을 내 집으로 여겼지.
남을 탓할 수도 없고 하늘을 원망할 수도 없어
섣달 그믐엔 서글픈 마음이 가슴에 넘쳤지.
초년엔 즐거운 세상 만났다 생각하고
한양이 내 생장한 고향인 줄 알았지.
집안은 대대로 부귀영화를 누렸고
꽃 피는 장안 명승지에 집이 있었지.
이웃 사람들이 아들 낳았다 축하하고
조만간 출세하기를 기대했었지.
머리가 차츰 자라며 팔자가 기박해져
뽕나무밭이 변해 바다가 되더니,
의지할 친척도 없이 세상 인심 박해지고
부모 상까지 마치자 집안이 쓸쓸해졌네.
남산 새벽 종소리 들으며 신끈을 맨 뒤에
동방 풍토를 돌아다니며 시름으로 가득 찼네.
마음은 아직 타향에서 고향 그리는 여우 같건만
울타리에 뿔 박은 양처럼 형세가 궁박해졌네.
남녘 지방은 옛부터 나그네가 많았다지만
부평초처럼 떠도는 신세가 몇 년이나 되었던가.
머리 굽실거리는 행세가 어찌 내 본래 버릇이랴만
입 놀리며 살 길 찾는 솜씨만 가득 늘었네.
이 가운데 세월을 차츰 잊어 버려
삼각산 푸른 모습이 아득하기만 해라.
강산 떠돌며 구걸한 집이 천만이나 되었건만
풍월시인 행장은 빈 자루 하나뿐일세.
천금 자제와 만석군 부자
후하고 박한 가풍을 고루 맛보았지.
신세가 궁박해져 늘 백안시 당하고
세월이 갈수록 머리 희어져 가슴 아프네.
돌아갈래도 어렵지만 그만둘래도 어려워
중도에 서서 며칠 동안 방황하네.
난고평생시
*난고는 김삿갓의 호이다.
26. 多睡婦(잠 많은 아낙네)
西隣愚婦睡方濃 不識蠶工況也農
機閑尺布三朝織 杵倦升粮半日春
弟衣秋盡獨稱搗 姑襪冬過每語縫
蓬髮垢面形如鬼 偕老家中却恨逢
이웃집 어리석은 아낙네는 낮잠만 즐기네.
누에치기도 모르니 농사짓기를 어찌 알랴.
베틀은 늘 한가해 베 한 자에 사흘 걸리고
절구질도 게을러 반나절에 피 한 되 찧네.
시아우 옷은 가을이 다 가도록 말로만 다듬질하고
시어미 버선 깁는다고 말로만 바느질하며 겨울 넘기네.
헝클어진 머리에 때 낀 얼굴이 꼭 귀신 같아
같이 사는 식구들이 잘못 만났다 한탄하네.
27. 懶婦(게으른 아낙네)
無病無憂洗浴稀 十年猶着嫁時衣
乳連褓兒謀午睡 手拾裙蝨愛첨暉
動身便碎廚中器 搔首愁看壁上機
忽聞隣家神賽慰 柴門半掩走如飛
병 없고 걱정 없는데 목욕도 자주 안해
십 년을 그대로 시집 올 때 옷을 입네.
강보의 아기가 젖 물린 채로 낮잠이 들자
이 잡으려 치마 걷어 들고 햇볕 드는 처마로 나왔네.
부엌에서 움직였다하면 그릇을 깨고
베틀 바라보면 시름겹게 머리만 긁어대네.
그러다가 이웃집에서 굿한다는 소문만 들으면
사립문 반쯤 닫고 나는 듯 달려가네.
28. 喪配自輓(아내를 장사지내고)
遇何晩也別何催 未卜其欣只卜哀
祭酒惟餘醮日釀 襲衣仍用嫁時裁
窓前舊種少桃發 簾外新巢雙燕來
賢否卽從妻母問 其言吾女德兼才
만나기는 왜 그리 늦은데다 헤어지기는 왜 그리 빠른지 기쁨을 맛보기 전에 슬픔부터 맛보았네.
제삿술은 아직도 초례 때 빚은 것이 남았고 염습옷은 시집 올 때 지은 옷 그대로 썼네.
창 앞에 심은 복숭아 나무엔 꽃이 피었고 주렴 밖 새 둥지엔 제비 한 쌍이 날아 왔는데
그대 심성도 알지 못해 장모님께 물으니 내 딸은 재덕을 겸비했다고 말씀하시네.
*시집 온 지 얼마 안 되는 아내의 상을 당한 남편을 대신하여 지은 시이다. 아내가 떠난 집에 제비가 찾아오고 복숭아 꽃이 피니, 아내를 그리는 정이 더욱 간절해짐을 표현했다.
29. 贈妓(기생에게 지어 주다)
却把難同調 還爲一席親
酒仙交市隱 女俠是文人
太半衿期合 成三意態新
相携東郭月 醉倒落梅春
처음 만났을 때는 어울리기 어렵더니 이제는 가장 가까운 사이가 되었네.
주선(酒仙)이 시은(市隱)과 사귀는데 이 여협객은 문장가일세.
정을 통하려는 뜻이 거의 합해지자 달그림자까지 합해서 세 모습이 새로워라.
서로 손 잡고 달빛 따라 동쪽 성곽을 거닐다가 매화꽃 떨어지듯 취해서 쓰러지네.
*주선(酒仙)은 술을 즐기는 김삿갓 자신.
시은(市隱)은 도회지에 살면서도 은자같이 지내는 사람.
이백(李白)의 시 '월하독작'(月下獨酌)에 "擧杯邀明月 對影成三人"이라고 하여 달, 자신, 자신의 그림자가 모여 셋이 되었다는 구절이 있다.
*술을 좋아하는 시객(詩客)이 아름다운 기녀와 대작을 하며 시로 화답하고 봄 밤의 취흥을 즐기는 풍류시이다.
30. 老吟(늙은이가 읊다)
五福誰云一曰壽 堯言多辱知如神
舊交皆是歸山客 新少無端隔世人
筋力衰耗聲似痛 胃腸虛乏味思珍
內情不識看兒苦 謂我浪遊抱送頻
오복 가운데 수(壽)가 으뜸이라고 누가 말했던가.
오래 사는 것도 욕이라고 한 요임금 말이 귀신 같네.
옛친구들은 모두 다 황천으로 가고
젊은이들은 낯설어 세상과 멀어졌네.
근력이 다 떨어져 앓는 소리만 나오고
위장이 허해져 맛있는 것만 생각나네.
애 보기가 얼마나 괴로운 줄도 모르고
내가 그냥 논다고 아이를 자주 맡기네.
*요임금이 말하기를 아들이 많으면 근심이 많아지고 부귀하면 일이 많으며 장수하면 욕된 일이 많아 진다고 했다. 오복(五福)의 첫째는 장수(長壽)라 하나 늙으면 버림 받고 외로워지니 요임금이 이를 알고 長壽는 多辱이라 했다.
31. 老人自嘲(노인이 스스로 놀리다)
八十年加又四年 非人非鬼亦非仙
脚無筋力行常蹶 眼乏精神坐輒眠
思慮語言皆妄녕 猶將一縷線線氣
悲哀歡樂總茫然 時閱黃庭內景篇
여든 나이에다 또 네 살을 더해 사람도 아니고 귀신도 아닌데 신선은 더욱 아닐세.
다리에 근력이 없어 걸핏하면 넘어지고 눈에도 정기가 없어 앉았다 하면 조네.
생각하는 것이나 말하는 것이나 모두가 망령인데 한 줄기 숨소리가 목숨을 이어가네.
희로애락 모든 감정이 아득키만 한데 이따금 황정경 내경편을 읽어보네.
*김삿갓이 노인의 청을 받아 지은 것으로, 기력이 쇠해서 근근히 살아가면서도 도가(道家)의 경전을 읽으며 허무에 심취한 것을 읊었다.
32. 嘲幼冠者(갓 쓴 어린아이를 놀리다)
畏鳶身勢隱冠蓋 何人咳嗽吐棗仁
若似每人皆如此 一腹可生五六人
솔개 보고도 무서워할 놈이 갓 아래 숨었는데
누군가 기침하다가 토해낸 대추씨 같구나.
사람마다 모두들 이렇게 작다면
한 배에서 대여섯 명은 나올 수 있을 테지.
*어린 꼬마 신랑이 갓을 쓰고 다님을 조롱했다. 솔개를 무서워할 나이에 몸을 가릴 만큼 큰 갓을 쓰고 몸집은 대추씨처럼 작은데 벌써 새신랑이 되었음을 표현했다.
33. 嘲年長冠者(갓 쓴 어른을 놀리다)
方冠長竹兩班兒 新買鄒書大讀之
白晝후孫初出袋 黃昏蛙子亂鳴池
갓 쓰고 담뱃대 문 양반 아이가 새로 사온 맹자 책을 크게 읽는데
대낮에 원숭이 새끼가 이제 막 태어난 듯하고 황혼녘에 개구리가 못에서 어지럽게 우는 듯하네.
34. 訓戒訓長(훈장을 훈계하다)
化外頑氓怪習餘 文章大塊不平噓
筎盃測海難爲水 牛耳誦經豈悟書
含黍山間奸鼠爾 凌雲筆下躍龍余
罪當笞死姑舍己 敢向尊前語詰詎
두메산골 완고한 백성이 괴팍한 버릇 있어 문장대가들에게 온갖 불평을 떠벌리네.
종지 그릇으로 바닷물을 담으면 물이라 할 수 없으니 소 귀에 경 읽기인데 어찌 글을 깨달으랴.
너는 산골 쥐새끼라서 기장이나 먹지만 나는 날아 오르는 용이라서 붓끝으로 구름을 일으키네.
네 잘못이 매 맞아 죽을 죄이지만 잠시 용서하노니 다시는 어른 앞에서 버릇없이 말장난 말라.
*김삿갓이 강원도 어느 서당을 찾아가니 마침 훈장은 학동들에게 고대의 문장을 강의하고 있는데 주제넘게도 그 문장을 천시하는 말을 하고 김삿갓을 보자 멸시를 하는 것이었다. 이에 훈장의 허세를 꼬집는 시를 지었다.
35. 訓長(훈장)
世上誰云訓長好 無烟心火自然生
曰天曰地靑春去 云賦云詩白髮成
雖誠難聞稱道賢 暫離易得是非聲
掌中寶玉千金子 請囑撻刑是眞情
세상에서 누가 훈장이 좋다고 했나.
연기없는 심화가 저절로 나네.
하늘 천 따 지 하다가 청춘이 지나가고
시와 문장을 논하다가 백발이 되었네.
지성껏 가르쳐도 칭찬 듣기 어려운데
잠시라도 자리를 뜨면 시비를 듣기 쉽네.
장중보옥 천금 같은 자식을 맡겨 놓고
매질해서 가르쳐 달라는 게 부모의 참마음일세.
*김삿갓은 방랑 도중 훈장 경험을 하기도 했는데 훈장에 대한 그의 감정은 호의적이지 못해서 얄팍한 지식으로 식자(識者)인 체하는 훈장을 조롱하는 시가 여럿 있다.
36. 嘲山村學長(산골 훈장을 놀리다)
山村學長太多威 高着塵冠揷唾排
大讀天皇高弟子 尊稱風憲好明주
每逢兀字憑衰眼 輒到巡杯籍白鬚
一飯횡堂生色語 今年過客盡楊州
산골 훈장이 너무나 위엄이 많아 낡은 갓 높이 쓰고 가래침을 내뱉네.
천황을 읽는 놈이 가장 높은 제자고 풍헌이라고 불러 주는 그런 친구도 있네.
모르는 글자 만나면 눈 어둡다 핑계대고 술잔 돌릴 땐 백발 빙자하며 잔 먼저 받네.
밥 한 그릇 내주고 빈 집에서 생색내는 말이 올해 나그네는 모두가 서울 사람이라 하네.
*풍헌(風憲)은 조선 시대 향직(鄕職)의 하나.
37. 可憐妓詩(기생 가련에게)
可憐行色可憐身 可憐門前訪可憐
可憐此意傳可憐 可憐能知可憐心
가련한 행색의 가련한 몸이 가련의 문 앞에 가련을 찾아왔네.
가련한 이 내 뜻을 가련에게 전하면 가련이 이 가련한 마음을 알아주겠지.
*김삿갓은 함경도 단천에서 한 선비의 호의로 서당을 차리고 3년여를 머무는데 가련은 이 때 만난 기생의 딸이다. 그의 나이 스물 셋. 힘든 방랑길에서 모처럼 갖게 되는 안정된 생활과 아름다운 젊은 여인과의 사랑... 그러나 그 어느 것도 그의 방랑벽은 막을 수 없었으니 다시 삿갓을 쓰고 정처없는 나그네 길을 떠난다.
38. 贈某女(어느 여인에게)
客枕蕭條夢不仁 滿天霜月照吾隣
綠竹靑松千古節 紅桃白李片時春
昭君玉骨湖地土 貴비花容馬嵬塵
人性本非無情物 莫惜今宵解汝裾
나그네 잠자리가 너무 쓸쓸해 꿈자리도 좋지 못한데
하늘에선 차가운 달이 우리 이웃을 비추네.
푸른 대와 푸른 솔은 천고의 절개를 자랑하고
붉은 복사꽃 흰 오얏꽃은 한 해 봄을 즐기네.
왕소군의 고운 모습도 오랑케 땅에 묻히고
양귀비의 꽃 같은 얼굴도 마외파의 티끌이 되었네.
사람의 성품이 본래부터 무정치는 않으니
오늘 밤 그대 옷자락 풀기를 아까워하지 말게나.
*왕소군은 한나라 원제(元帝)의 궁녀. 흉노 땅에서 죽음.
*마외파는 안녹산의 난이 일어났을때 양귀비가 피난 갔다가 죽은 곳.
*김삿갓이 전라도 어느 마을을 지나다가 날이 저물어 커다란 기와집을 찾아갔다. 주인은 나오지 않고 계집종이 나와서 저녁상을 내다 주었다. 밥을 다 먹은 뒤에 안방 문을 열어보니 소복을 입은 미인이 있었는데 독수공방하는 어린 과부였다. 밤이 깊은 뒤에 김삿갓이 안방에 들어가자 과부가 놀라 단도를 겨누었다. 김삿갓이 한양으로 과거 보러 가는 길인데 목숨만 살려 달라고 하자 여인이 운을 부르며 시를 짓게 하였다.
39. 離別(이별)
可憐門前別可憐 可憐行客尤可憐
可憐莫惜可憐去 可憐不忘歸可憐
가련의 문 앞에서 가련과 이별하려니 가련한 나그네의 행색이 더욱 가련하구나.
가련아, 가련한 이 몸 떠나감을 슬퍼하지 말라. 가련을 잊지 않고 가련에게 다시 오리니.
街上初見(길가에서 처음 보고)
芭經一帙誦分明 客駐程참忽有情
虛閣夜深人不識 半輪殘月已三更 -金笠詩
難掩長程十目明 有情無語似無情
踰墻穿壁非難事 曾與農夫誓不更 -女人詩
그대가 시경 한 책을 줄줄 외우니 나그네가 길 멈추고 사랑스런 맘 일어나네.
빈 집에 밤 깊으면 사람들도 모를테니 삼경쯤 되면 반달이 지게 될거요. -김삿갓
길가에 지나가는 사람이 많아 눈 가리기 어려우니 마음 있어도 말 못해 마음이 없는 것 같소.
담 넘고 벽 뚫어 들어오기가 어려운 일은 아니지만 내 이미 농부와 불경이부 다짐했다오. -여인
*김삿갓이 어느 마을을 지나는데 여인들이 논을 메고 있었다.
그 가운데 한 미인이 시경을 줄줄 외우고 있어서 김삿갓이 앞구절을 지어 그의 마음을 떠 보았다. 그러자 여인이 뒷구절을 지어 남편과 다짐한 불경이부(不更二夫)의 맹세를 저 버릴 수 없다고 거절하였다.
40. 詠影(그림자)
進退隨儂莫汝恭 汝儂酷似實非儂
月斜岸面篤魁狀 日午庭中笑矮容
枕上若尋無覓得 燈前回顧忽相逢
心雖可愛終無信 不映光明去絶踪
들어오고 나갈 때마다 날 따르는데도 고마워 않으니
네가 나와 비슷하지만 참 나는 아니구나.
달빛 기울어 언덕에 누우면 도깨비 모습이 되고
밝은 대낯 뜨락에 비치면 난쟁이처럼 우습구나.
침상에 누워 찾으면 만나지 못하다가
등불 앞에서 돌아보면 갑자기 마주치네.
마음으로는 사랑하면서도 종내 말이 없다가
빛이 비치지 않으면 자취를 감추네.
* ....아직 그의 파격적인 희롱의 시편들을 예감하기에는 이르다. ....그의 마음 가운데 잉태하고 있는 시의 파괴적인 상태는 아직 보이지 않는다. 다만 시의 내용에서 어떤 우수나 비애도 내비치지않은 냉철한 서술이 있는데 바로 이 서술에서 그의 장난스러운 상상력을 얼핏 내보이고 있다.
-고은 <김삿갓 1>
41. 嘲地官(지관을 놀리다)
風水先生本是虛 指南指北舌飜空
靑山若有公侯地 何不當年葬爾翁
풍수 선생은 본래 허망된 말만 하는 사람이라
남이다 북이다 가리키며 부질없이 혀를 놀리네.
청산 속에 만약 명당 자리가 있다면
어찌 네 아비를 파묻지 않았나.
42. 嘲地師(지사를 조롱함)
可笑龍山林處士 暮年何學李淳風
雙眸能貫千峰脈 兩足徒行萬壑空
顯顯天文猶未達 漠漠地理豈能通
不如歸飮重陽酒 醉抱瘦妻明月中
가소롭구나 용산에 사는 임처사여 늘그막에 어찌하여 이순풍을 배웠나.
두 눈으로 산줄기를 꿰뚫어 본다면서 두 다리로 헛되이 골짜기를 헤매네.
환하게 드러난 천문도 오히려 모르면서 보이지 않는 땅 속 일을 어찌 통달했으랴.
차라리 집에 돌아가 중양절 술이나 마시고 달빛 속에서 취하여 여윈 아내나 안아 주시게.
*이순풍(李淳風)은 당나라 사람으로 역산(曆算)에 밝았고 혼천의(渾天儀)를 만들었다.
*천체의 형상도 모르면서 땅의 이치를 안답시고 명당이라는 곳을 찾기 위해 수많은 산봉우리와 골짜기를 누비고 다녔으나 모두 헛수고를 한 것이니 그만 두고 집으로 돌아가라고 조롱을 했다.
43. 溺缸(요강)
賴渠深夜不煩扉 令作團隣臥處圍
醉客持來端膽膝 態娥挾坐惜衣收
堅剛做體銅山局 灑落傳聲練瀑飛
最是功多風雨曉 偸閑養性使人肥
네가 있어 깊은 밤에도 사립문 번거롭게 여닫지 않아
사람과 이웃하여 잠자리 벗이 되었구나.
술 취한 사내는 너를 가져다 무릎 꿇고
아름다운 여인네는 널 끼고 앉아 살며시 옷자락을 걷네.
단단한 그 모습은 구리산 형국이고
시원하게 떨어지는 물소리는 비단폭포를 연상케 하네.
비바람 치는 새벽에 가장 공이 많으니
한가한 성품 기르며 사람을 살찌게 하네.
*오줌이 거름이 되고 또 비바람 치는 새벽에도 문밖에 나가지 않고 편안히 일을 보게 하므로 사람을 살찌게 한다. 그때까지 어느 누구도 다루지 않았던 생활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것들을 소재로 택하여 자유자재로 표현했다.
44. 博(장기)
酒老詩豪意氣同 戰場方設一堂中
飛包越處軍威壯 猛象준前陳勢雄
直走輕車先犯卒 橫行駿馬每窺宮
殘兵散盡連呼將 二士難存一局空
술친구나 글친구들이 뜻이 맞으면 마루에 마주 앉아서 한바탕 싸움판을 벌이네.
포가 날아오면 군세가 장해지고 사나운 상이 웅크리고 앉으면 진세가 굳어지네.
치달리는 차가 졸을 먼저 따먹자 옆으로 달리는 날쌘 말이 궁을 엿보네.
병졸들이 거의 다 없어지고 잇달아 장군을 부르자 두 사가 견디다 못해 장기판을 쓸어 버리네.
*주객(酒客)과 시우(詩友)가 대청 마루에서 장기를 두고 있는 모습을 읊었다.
포(包), 상(象), 차(車), 마(馬)의 활약이 잘 묘사되어 있다.
45. 棋(바둑)
縱橫黑白陳如圍 勝敗專由取舍機
四皓閑秤忘世坐 三淸仙局爛柯歸
詭謨偶獲擡頭點 誤着還收擧手揮
半日輪영更挑戰 丁丁然響到斜輝
흑백이 종횡으로 에워싼 것처럼 진을 치니
승패는 오로지 때를 잡고 못 잡음에 달렸네.
사호가 은거하여 바둑으로 시국을 잊었고
삼청 신선들 대국에 도끼자루 다 썩더라.
뜻밖의 속임수로 세력 뻗을 점도 얻고
잘못 두고 물러 달라 손 휘두르기도 하는구나.
한나절 승부를 걸고 다시금 도전하니
바둑알 치는 소리에 석양이 빛나네.
*사호(四皓)는 진시황 때 난을 피해 상산(商山)에 숨은 네 은사(隱士). 동원공(東園公), 기리계(綺里季), 하황공(夏黃公), 녹리선생(녹里先生).
*삼청(三淸)은 옥청(玉淸), 상청(上淸), 태청(太淸)으로 신선들이 산다는 궁의 이름이다.
46. 眼鏡(안경)
江湖白首老如鷗 鶴膝烏精價易牛
環若張飛준蜀虎 瞳成項羽沐荊후
삽疑濯濯穿籬鹿 快讀關關在渚鳩
少年多事懸風眼 春陌堂堂倒紫류
강호에 사람이 늙어 갈매기처럼 희어졌는데
검은 알에 흰 테 안경을 쓰니 소 한 마리 값일세.
고리눈은 장비와 같아 촉나라 범이 웅크려 앉았고
겹눈동자는 항우와 같아 목욕한 초나라 원숭이일세.
얼핏 보면 알이 번쩍여 울타리를 빠져 나가는 사슴 같은데
노인이 시경 관저편을 신나게 읽고 있네.
소년은 일도 없이 멋으로 안경 걸치고
봄 언덕으로 당나귀 거꾸로 타고 당당히 다니네.
*각 행의 끝나는 글자들이 모두 동물 이름이다.
갈매기 구(鷗), 소 우(牛), 범 호(虎), 원숭이 후(후), 사슴 록(鹿), 비둘기 구(鳩), 눈 안(眼), 당나귀 류(류)
*접을 수 있는 안경 다리가 두루미 무릎을 닮았다고 해서 학슬(鶴膝)이라 불렀다.
*오정(烏精)은 거무스럼한 안경알을 가리킨다.
47. 磨石(맷돌)
誰能山骨作圓圓 天以順還地自安
隱隱雷聲隨手去 四方飛雪落殘殘
누가 산 속의 바윗돌을 둥글게 만들었나. 하늘만 돌고 땅은 그대로 있네.
은은한 천둥소리가 손 가는 대로 나더니 사방으로 눈싸라기 날리다 잔잔히 떨어지네.
*돌로 만든 무생물체도 그가 노래하면 살아 움직이는 생명체로 태어났다.
48. 錢(돈)
周遊天下皆歡迎 興國興家勢不輕
去復還來來復去 生能死捨死能生
천하를 두루 돌아 다니며 어디서나 환영받으니
나라와 집안을 흥성케 하여 그 세력이 가볍지 않네.
갔다가 다시 오고 왔다가는 또 가니
살리고 죽이는 것도 마음대로 하네.
*죽어가는 사람도 살리고 산 사람도 죽게 만드는 것이 돈이니 당시에도 그 위력이 대단했던 모양이다.
49. 落花吟(떨어진 꽃)
曉起飜驚滿山紅 開落都歸細雨中
無端作意移粘石 不忍辭枝倒上風
鵑月靑山啼忽罷 燕泥香逕蹴全空
繁華一度春如夢 坐嘆城南頭白翁
새벽에 일어나 온 산이 붉은 걸 보고 놀랐네.
가랑비 속에 피었다 가랑비 속에 지네.
끝없이 살고 싶어 바위 위에도 달라붙고
가지를 차마 떠나지 못해 바람 타고 오르기도 하네.
두견새는 푸른 산에서 슬피 울다가 그치고
제비는 진흙에 붙은 꽃잎을 차다가 그저 올라가네.
번화한 봄날이 한차례 꿈같이 지나가자
머리 흰 성남의 늙은이가 앉아서 탄식하네.
*초목과 꽃이 풍성한 봄이 지나감을 아쉬워하여 읊은 작품이다.
50. 雪中寒梅(눈 속의 차가운 매화)
雪中寒梅酒傷妓 風前槁柳誦經僧
栗花落花尨尾短 榴花初生鼠耳凸
눈 속에 핀 차가운 매화는 술에 취한 기생 같고
바람 앞에 마른 버들은 불경을 외는 중 같구나.
떨어지는 밤꽃은 삽살개의 짧은 꼬리 같고
갓 피어나는 석류꽃은 뾰족한 쥐의 귀 같구나.
51. 雪日(눈 오는 날)
雪日常多晴日或 前山旣白後山亦
推窓四面琉璃壁 分咐寺童故掃莫
늘 눈이 내리더니 어쩌다 개어
앞산이 희어지고 뒷산도 희구나.
창문을 밀쳐 보니 사면이 유리벽이라
아이에게 시켜서 쓸지 말라고 하네.
*김삿갓이 어느 절에 가서 하룻밤 재워 달라고 청하자 중이 거절했다. 김삿갓이 절을 나가려 하자 혹시 김삿갓이 아닌가 생각하고 시를 짓게 했다.
혹(或), 역(亦), 벽(壁), 막(莫) 같은 어려운 운을 불러 괴롭혔지만 이 시를 짓고 잠을 자게 되었다.
52. 雪(눈)
天皇崩乎人皇崩 萬樹靑山皆被服
明日若使陽來弔 家家첨前淚滴滴
천황씨가 죽었나 인황씨가 죽었나 나무와 청산이 모두 상복을 입었네.
밝은 날에 해가 찾아와 조문한다면 집집마다 처마 끝에서 눈물 뚝뚝 흘리겠네.
*천황씨와 인황씨는 고대 중국 전설에 나오는 임금이다. 눈이 녹아 흐르는 물을 임금의 죽음을 슬퍼하여 흘리는 눈물에 비유하였다.
53. 蚤(벼룩)
貌似棗仁勇絶倫 半風爲友蝎爲隣
朝從席隙藏身密 暮向衾中犯脚親
尖嘴嚼時心動索 赤身躍處夢驚頻
平明點檢肌膚上 剩得桃花萬片春
모습은 대추씨 같지만 용기가 뛰어나
이와는 친구 삼고 전갈과는 이웃일세.
아침에는 자리 틈에 몸을 숨겨 찾을 수 없고
저녁에는 이불 속에 다리 물려고 가까이 오네.
뾰족한 주둥이에 물릴 때마다 찾아볼 마음이 생기고
알몸으로 튈 때마다 단꿈이 자주 깨네.
밝은 아침에 일어나 살갗을 살펴보면
복사꽃 만발한 봄날 경치를 보는 것 같네.
*벼룩의 모양과 습성을 묘사하고 벼룩에 물린 사람의 피부를 복숭아꽃이 만발한 봄 경치에 비유하였다.
54. 猫(고양이)
乘夜橫行路北南 中於狐狸傑爲三
毛分黑白渾成繡 目狹靑黃半染藍
貴客床前偸美饌 老人懷裡傍溫衫
那邊雀鼠能驕慢 出獵雄聲若大膽
밤에는 남북 길을 제멋대로 다니며 여우와 삵괭이 사이에 끼어 삼걸이 되었네.
털은 흑백이 뒤섞여 수를 놓고 눈은 청황색에다 남색까지 물들었네.
귀한 손님 밥상에선 맛있는 음식을 훔쳐 먹고 늙은이 품 속에서 따뜻한 옷에 덮여 자니
쥐가 어디에 있나 찾아나설 땐 교만 떨다가 야옹소리 크게 지를 땐 간담이 크기도 해라.
*예민한 관찰과 기발한 착상으로 고양이의 생김새와 습성을 표현하였다.
55. 老牛(늙은 소)
瘦骨稜稜滿禿毛 傍隨老馬兩分槽
役車荒野前功遠 牧竪靑山舊夢高
健藕常疎閑臥圃 苦鞭長閱倦登皐
可憐明月深深夜 回憶平生僈積勞
파리한 뼈는 앙상하고 털마저 빠졌는데
늙은 말 따라서 마굿간을 같이 쓰네.
거친 들판에서 짐수레 끌던 옛 공은 멀어지고
목동 따라 푸른 들에서 놀던 그 시절 꿈 같아라.
힘차게 끌던 쟁기도 텃밭에 한가히 놓였는데
채찍 맞으며 언덕길 오르던 그 시절 괴로웠었지.
가련해라 밝은 달밤은 깊어만 가는데
한평생 부질없이 쌓인 고생을 돌이켜보네.
*세월의 무상함은 인간에게서만 느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늙은 소를 보고서도 세월이 앗아간 전날의 혈기 넘쳤던 때를 생각할 수 있다.
56. 松餠(송편)
手裡廻廻成鳥卵 指頭個個合蚌脣
金盤削立峰千疊 玉箸懸燈月半輪
손에 넣고 뱅뱅 돌리면 새알이 만들어지고
손가락 끝으로 낱낱이 파서 조개 같은 입술을 맞추네.
금쟁반에 천봉우리를 첩첩이 쌓아 올리고
등불을 매달고 옥젖가락으로 반달 같은 송편을 집어 먹네.
*새알을 만들고 조개 같은 입술을 맞추고 반달 같은 송편을 먹는 묘사에서 시인의 관찰력과 재치를 볼 수 있다.
57. 白鷗時(갈매기)
沙白鷗白兩白白 不辨白沙與白鷗
漁歌一聲忽飛去 然後沙沙復鷗鷗
모래도 희고 갈매기도 희니 모래와 갈매기를 분간할 수 없구나.
어부가(漁夫歌) 한 곡조에 홀연히 날아 오르니
그제야 모래는 모래, 갈매기는 갈매기로 구별되누나.
58. 入金剛(금강산에 들어가다)
緣靑碧路入雲中 樓使能詩客住공
龍造化含飛雪瀑 劒精神削揷天峰
仙禽白幾千年鶴 澗樹靑三百丈松
僧不知吾春睡腦 忽無心打日邊鐘
푸른 길 따라서 구름 속으로 들어가니 누각이 시인의 발걸음을 멈추게 하네.
눈발 흩날리며 걸린 폭포는 용의 조화가 분명하고
하늘 찌르며 솟은 봉우리는 칼로 신통하게 깎았네.
속세 떠난 흰 학은 몇천 년이나 살았는지
시냇가 푸른 소나무도 삼백 길이나 되어 보이네.
스님은 내가 봄잠 즐기는 것도 알지 못하고 무심하게 낮종을 치고 있구나.
*봄날 금강산으로 들어가면서 주위에 펼쳐진 경치의 아름다움을 읊었다.
59. 答僧金剛山詩(스님에게 금강산 시를 답하다)
百尺丹岩桂樹下 柴門久不向人開
今朝忽遇詩仙過 喚鶴看庵乞句來 - 僧
矗矗尖尖怪怪奇 人仙神佛共堪凝
平生詩爲金剛惜 詩到金剛不敢詩 - 笠
백 척 붉은 바위 계수나무 아래 암자가 있어 사립문을 오랫동안 사람에게 열지 않았네?
오늘 아침 우연히 시선께서 지나는 것을 보고
학 불러 암자를 보이게 하고 시 한 수를 청하오. - 스님
우뚝우뚝 뾰족뾰족 기기괴괴한 가운데 인선(人仙)과 신불(神佛)이 함께 엉겼소.
평생 금강산 위해 시를 아껴 왔지만 금강산에 이르고 보니 감히 시를 지을 수가 없소. -삿갓
*한 승려의 청으로 금강산을 읊으려 하나 너무나 장엄하고 기이한 산세에 압도되어 시를 짓지 못하겠다는 내용이다.
60. 妙香山詩(묘향산)
平生所欲者何求 每擬妙香山一遊
山疊疊千峰萬인 路層層十步九休
평생 소원이 무엇이었던가. 묘향산에 한번 노니는 것이었지.
산 첩첩 천 봉 만 길에 길 층층 열 걸음에 아홉 번은 쉬네.
*평소에 한번 와 보고 싶었던 묘향산의 겹겹이 둘러싸인 산세와 산봉우리의 빼어남을 노래하였다.
61. 九月山峰(구월산)
昨年九月過九月 今年九月過九月
年年九月過九月 九月山光長九月
지난해 구월에 구월산을 지났는데 올해 구월에도 구월산을 지나네.
해마다 구월에 구월산을 지나니 구월산 풍경은 늘 구월일세.
62. 金剛山(금강산)
松松栢栢岩岩廻 水水山山處處奇
소나무와 소나무, 잣나무와 잣나무, 바위와 바위를 도니
물과 물, 산과 산이 곳곳마다 기묘하구나.
*운의 반복으로 시각적, 청각적 효과를 높혔다.
63. 賞景(경치를 즐기다)
一步二步三步立 山靑石白間間花
若使畵工模此景 其於林下鳥聲何
한 걸음 두 걸음 세 걸음 가다가 서니 산 푸르고 바윗돌 흰데 틈틈히 꽃이 피었네.
화공으로 하여금 이 경치를 그리게 한다면 숲 속의 새소리는 어떻게 하려나.
*그에게 있어 자연은 단순히 보고 즐기는 대상이 아니었다. 방랑의 동반자요 거처가 되었으니 발길 닿은 산천경개는 모두 그의 노래가 되었다. 화가가 아름다운 봄의 경치는 그릴 수 있겠지만 숲에서 지저귀는 새들의 울음 소리는 어떻게 그려낼 수 있겠는가.
64. 嶺南述懷영남 술회
超超獨倚望鄕臺 强壓覇愁快眼開
與月經營觀海去 乘花消息入山來
長遊宇宙餘雙履 盡數英雄又一杯
南國風光非我土 不如歸對漢濱梅
높다란 망향대에 나 홀로 기대 서서
나그네 시름을 억누르고 사방을 둘러 보았네.
달을 따라 드나드는 바다도 둘러보고
꽃소식 알고 싶어 산 속으로 들어왔네.
오랫동안 세상 떠돌다 보니 나막신 한 짝만 남았는데
영웅들을 헤아리며 술 한 잔을 다시 드네.
남국의 자연이 아름다워도 내 고장 아니니
한강으로 돌아가 매화꽃이나 보는 게 낫겠네.
*아무리 남쪽 지방의 경치가 좋다한들 집으로 돌아가 물가에 핀 매화 보는 것만 못하니 망향대에 올라 고향을 떠난 자신의 기구한 팔자를 읊고 있다.
65. 淮陽過次(회양을 지나다가)
山中處子大如孃 緩著粉紅短布裳
赤脚踉蹌羞過客 松籬深院弄花香
산 속 처녀가 어머니만큼 커졌는데
짧은 분홍 베치마를 느슨하게 입었네.
나그네에게 붉은 다리를 보이기 부끄러워
소나무 울타리 깊은 곳으로 달려가 꽃잎만 매만지네.
*'낭'은 足(족)부에 良, '창'은 足(족)부에 倉.
*김삿갓이 물을 얻어먹기 위해 어느 집 사립문을 들어 가다가 울타리 밑에 핀 꽃을 바라보고 있는 산골 처녀를 발견했다. 처녀는 나그네가 있는 줄도 모르고 꽃을 감상하고 있다가 인기척을 느끼고는 짧은 치마 아래 드러난 다리를 감추려는 듯 울타리 뒤에 숨었다.
66. 過寶林寺(보림사를 지나며)
窮達在天豈易求 從吾所好任悠悠
家鄕北望雲千里 身勢南遊海一구
掃去愁城盃作추 釣來詩句月爲鉤
寶林看盡龍泉又 物外閑跡共比丘
빈궁과 영달은 하늘에 달렸으니 어찌 쉽게 구하랴.
내가 좋아하는 대로 유유히 지내리라.
북쪽 고향 바라보니 구름 천 리 아득한데
남쪽에 떠도는 내 신세는 바다의 물거품일세.
술잔을 빗자루 삼아 시름을 쓸어 버리고
달을 낚시 삼아 시를 낚아 올리네.
보림사를 다 보고나서 용천사에 찾아오니
속세 떠나 한가한 발길이 비구승과 한가지일세.
*보림사는 전남 장흥 가지산에 있는절, 용천사는 전남 함평 무악산에 있는 절이다.
67. 寒食日登北樓吟(한식날 북루에 올라 읊다)
十里平沙岸上莎 素衣靑女哭如歌
可憐今日墳前酒 釀得阿郞手種禾
십 리 모래 언덕에 사초꽃이 피었는데
소복 입은 젊은 여인이 노래처럼 곡하네.
가련해라 지금 무덤 앞에 부은 술은
남편이 심었던 벼로 빚었을 테지.
*김삿갓이 원산에 이르러 명사십리(明沙十里)를 지나다가 정자에 올라 쉬고 있는데 근처에서 어린 과부가 남편 무덤 앞에 술잔을 올리며 내는 곡소리가 슬픈 노래처럼 들려 왔다.
68. 泛舟醉吟(배를 띄우고 취해서 읊다)
江非赤壁泛舟客 地近新豊沽酒人
今世英雄錢項羽 當時辯士酒蘇秦
강은 적벽강이 아니지만 배를 띄웠지.
땅은 신풍에 가까워 술을 살 수 있네.
지금 세상에 영웅이 따로 있으랴, 돈이 바로 항우이고
변사가 따로 있으랴, 술이 바로 소진이지.
*신풍(新豊)은 한대(漢代)의 현(縣) 이름으로 신풍미주(新豊美酒)라 하여 좋은 술이 나왔다고 함.
*항우(項羽)는 초(楚)나라를 세워 한나라 유방과 함께 진나라를 멸망시킨 영웅.
*소진(蘇秦)은 중국 전국시대에 말 잘하던 유세객(遊設客)이다.
*지금 김삿갓이 놀고 있는 강은 소동파가 적벽부(赤壁賦)를 읊었던 그 적벽강은 아니지만 땅은 맛있는 술이 나왔던 신풍과 닮았다. 오늘날의 세상은 돈만 있으면 항우 같은 힘을 낼 수도 있고 술에 취하면 말 잘하는 소진도 될 수 있다.
69. 吉州明川(길주 명천)
吉州吉州不吉州 許可許可不許可
明川明川人不明 漁佃漁佃食無漁
길주 길주 하지만 길하지 않은 고장.
허가 허가 하지만 허가하는 것은 없네.
명천 명천 하지만 사람은 밝지 못하고
어전 어전 하지만 밥상에는 고기 없네.
*어전은 함경도 명천군 기남면 어전리이다.
*길주는 나그네를 재워주지 않는 풍속이 있어 허가가 많이 살지만 잠자도록 허가해 주지 않고, 어전(漁佃)은 물고기 잡고 짐승을 사냥한다는 뜻인데 이 동네 밥상에는 고기가 오르지 않음을 풍자한 시이다.
70. 看山(산을 구경하다)
倦馬看山好 執鞭故不加
岩間재一路 煙處或三家
花色春來矣 溪聲雨過耶
渾忘吾歸去 奴曰夕陽斜
게으른 말을 타야 산 구경하기가 좋아서
채찍질 멈추고 천천히 가네.
바위 사이로 겨우 길 하나 있고
연기 나는 곳에 두세 집이 보이네.
꽃 색깔 고우니 봄이 왔음을 알겠고
시냇물 소리 크게 들리니 비가 왔나 보네.
멍하니 서서 돌아갈 생각도 잊었는데
해가 진다고 하인이 말하네.
*주마간산(走馬看山)이라 했으니 산을 구경하기에는 빨리 달리는 말보다 게으른 말이 좋다는 것이다.
71. 還甲宴(환갑 잔치)
彼坐老人不似人 疑是天上降眞仙
其中七子皆爲盜 偸得碧桃獻壽筵
저기 앉은 저 노인은 사람 같지 않으니
아마도 하늘 위에서 내려온 신선일 테지.
여기 있는 일곱 아들은 모두 도둑놈이니
서왕모의 선도 복숭아를 훔쳐다 환갑 잔치에 바쳤네.
*환갑 잔치집에 들린 김삿갓이 첫 구절을 읊자 자식들이 모두 화를 내다가 둘째 구절을 읊자 모두들 좋아하였다. 셋째 구절을 읊자 다시 화를 냈는데 넷째 구절을 읊자 역시 모두들 좋아하였다.
*서왕모의 선도 복숭아는 천 년에 한번 열리는 복숭아로 이것을 먹으면 장수하였다.
72. 元生員(원생원)
日出猿生原 猫過鼠盡死
黃昏蚊첨至 夜出蚤席射
해 뜨자 원숭이가 언덕에 나타나고
고양이 지나가자 쥐가 다 죽네.
황혼이 되자 모기가 처마에 이르고
밤 되자 벼룩이 자리에서 쏘아대네.
*김삿갓이 북도지방의 어느 집에 갔다가 그곳에 모여 있던 마을 유지들을 놀리며 지은 시이다. 구절마다 끝의 세 글자는 원 생원(元生員), 서 진사(徐進士), 문 첨지(文僉知), 조 석사(趙碩士)의 음을 빌려 쓴 것이다.
73. 難避花(피하기 어려운 꽃)
靑春抱妓千金開 白日當樽萬事空
鴻飛遠天易隨水 蝶過靑山難避花
청춘에 기생을 안으니 천금이 초개 같고 대낮에 술잔을 대하니 만사가 부질없네.
먼 하늘 날아가는 기러기는 물 따라 날기 쉽고 청산을 지나가는 나비는 꽃을 피하기 어렵네.
*김삿갓이 어느 마을을 지나가는데 청년들이 기생들과 놀고 있었다. 김삿갓이 부러워하여 한자리에 끼어 술을 얻어 마신 뒤 이 시를 지어 주었다.
74. 妓生合作(기생과 함께 짓다)
金笠. 平壤妓生何所能 妓生. 能歌能舞又詩能
金笠. 能能其中別無能 妓生. 月夜三更呼夫能
평양 기생은 무엇에 능한가. -김삿갓
노래와 춤 다 능한 데다 시까지도 능하다오.-기생
능하고 능하다지만 별로 능한 것 없네. -김삿갓
달 밝은 한밤중에 지아비 부르는 소리에 더 능하다오. -기생
*평양감사가 잔치를 벌이면서 능할 능(能)자 운을 부르자 김삿갓이 먼저 한 구절을 짓고 기생이 이에 화답하였다.
75. 沃溝金進士(옥구 김 진사)
沃溝金進士 與我二分錢
一死都無事 平生恨有身
옥구 김 진사가 내게 돈 두 푼을 주었네.
한번 죽어 없어지면 이런 꼴 없으련만 육신이 살아 있어 평생에 한이 되네.
*김삿갓이 옥구 김 진사 집을 찾아가 하룻밤 묵기를 청하자 돈 두 푼을 주며 내쫓았다.
김삿갓이 이 시를 지어 대문에 붙이니 김 진사가 이 시를 보고 자기 집에다 재우고 친교를 맺었다.
76. 窓(창)
十字相連口字橫 間間棧道峽如巴
隣翁順熟低首入 稚子難開擧手爬
십(十)자가 서로 이어지고 구(口)자가 빗겼는데
사이사이 험난한 길이 있어 파촉(巴蜀)가는 골짜기 같네.
이웃집 늙은이는 순하게 고개를 숙이고 들어오지만
어린 아이는 열기 어렵다고 손가락으로 긁어대네.
*눈 오는 날 김삿갓이 친구의 집을 찾아가자 친구가 일부러 문을 열어주지 않고 창(窓)이라는 제목을 내며 파촉 파(巴)와 긁을 파(爬)를 운으로 불렀다.
77. 兩班論(양반)
彼兩班此兩班 班不知班何班
朝鮮三姓其中班 駕洛一邦在上班
來千里此月客班 好八字今時富班
觀其爾班厭眞班 客班可知主人班
네가 양반이면 나도 양반이다. 양반이 양반을 몰라보니 양반은 무슨 놈의 양반.
조선에서 세 가지 성만이 그중 양반인데 김해 김씨가 한 나라에서도 으뜸 양반이지.
천 리를 찾아왔으니 이 달 손님 양반이고 팔자가 좋으니 금시 부자 양반이지만
부자 양반을 보니 진짜 양반을 싫어해 손님 양반이 주인 양반을 알 만하구나.
*김삿갓이 어느 양반 집에 갔더니 양반입네 거드럼을 피우며 족보를 따져 물었다. 집안 내력을 밝힐 수 없는 삿갓으로서는 기분이 상할 수 밖에. 주인 양반이 대접을 받으려면 행실이 양반다워야 하는데 먼 길 찾아온 손님을 박대하니 그 따위가 무슨 양반이냐고 놀리고 있다.
78. 暗夜訪紅蓮(어두운 밤에 홍련을 찾아가다)
探香狂蝶半夜行 百花深處摠無情
欲採紅蓮南浦去 洞庭秋波小舟驚
향기 찾는 미친 나비가 한밤중에 나섰지만
온갖 꽃은 밤이 깊어 모두들 무정하네.
홍련을 찾으려고 남포로 내려가다가
동정호 가을 물결에 작은 배가 놀라네.
*동정(洞庭)은 두보의 '등악양루'(登岳陽樓)의 배경이 된 중국 호남성에 있는 동정호(洞庭湖)를 말한다.
*홍련을 만나려고 여러 여인들이 자는 기생방을 한밤중에 찾아갔는데 어둠 속에서 얼결에 추파라는 기생을 밟고는 깜짝 놀랐다.
79. 諺文風月(언문풍월)
靑松듬성담성立이요
人間여기저기有라. .
所謂엇뚝삣뚝客이
平生쓰나다나酒라.
푸른 소나무가 듬성듬성 섰고
인간은 여기저기 있네.
엇득빗득 다니는 나그네가
평생 쓰나 다나 술만 마시네.
* 서당에서 있을 유(有)자와 술 주(酒)자를 운으로 부르자 언문과 한자를 조합하여 지었다.
80. 언문시
사면기둥 붉엇타 석양 행객 시장타 네 정 인심 고약타.
(4구. 전하지 않음)
81. 開春詩會作(봄을 시작하는 시회)
데각데각 登高山하니
시근뻘뜩 息氣散이라.
醉眼朦朧 굶어觀하니
욹읏붉읏 花爛漫이라.
데걱데걱 높은 산에 오르니
씨근벌떡 숨결이 흩어지네.
몽롱하게 취한 눈으로 굶주리며 보니
울긋불긋 꽃이 만발했네.
*산에서 시회가 열린 것을 보고 올라갔는데 시를 지어야 술을 준다고 하자 이 시를 지었다.
사람들이 언문풍월도 시냐고 따지니 다시 한 수를 읊었다.
諺文眞書석거作하니
是耶非耶皆吾子라.
언문과 진서를 섞어 지었으니
이게 풍월이냐 아니냐 하는 놈들은 모두 내 자식이다.
82. 犢價訴題(송아지 값 고소장)
四兩七錢之犢을 放於靑山綠水하야
養於靑山綠水러니 隣家飽太之牛가
用其角於此犢하니 如之何卽可乎리요.
넉 냥 일곱 푼짜리 송아지를 푸른 산 푸른 물에 놓아서
푸른 산 푸른 물로 길렀는데, 콩에 배부른 이웃집 소가
이 송아지를 뿔로 받았으니 어찌하면 좋으리까.
*가난한 과부네 송아지가 부잣집 황소의 뿔에 받혀 죽자 이 이야기를 들은 김삿갓이 이 시를 써서 관가에 바쳐 송아지 값을 받아 주었다.
83. 破格詩(파격시)
天長去無執 花老蝶不來
菊樹寒沙發 枝影半從池
江亭貧士過 大醉伏松下
月利山影改 通市求利來
하늘은 멀어서 가도 잡을 수 없고
꽃은 시들어 나비가 오지 않네.
국화는 찬 모래밭에 피어나고
나뭇가지 그림자가 반이나 연못에 드리웠네.
강가 정자에 가난한 선비가 지나가다가
크게 취해 소나무 아래 엎드렸네.
달이 기우니 산 그림자 바뀌고
시장을 통해 이익을 얻어 오네.
*이 시는 모든 글자를 우리말 음으로 읽어야 한다.
천장에 거미(무)집 / 화로에 겻(접)불 내
국수 한 사발 / 지렁(간장) 반 종지
강정 빈 사과 / 대추 복숭아
월리(워리) 사냥개 / 통시(변소) 구린내
84. 辱孔氏家(공씨네 집에서)
臨門老尨吠孔孔 知是主人姓曰孔
黃昏逐客緣何事 恐失夫人脚下孔
문 앞에서 늙은 삽살개가 콩콩 짖으니
주인의 성이 공가인 줄 알겠네.
황혼에 나그네를 쫓으니 무슨 까닭인가
아마도 부인의 아랫구멍을 잃을까 두려운거지.
*구멍 공(孔)자를 공공(개 짖는 소리), 공가(성), 구멍이라는 세 가지 뜻으로 썼다.
85. 虛言詩(허언시)
靑山影裡鹿抱卵 白雲江邊蟹打尾
夕陽歸僧紒三尺 樓上織女囊一斗
푸른 산 그림자 안에서는 사슴이 알을 품었고 흰 구름 지나가는 강변에서 게가 꼬리를 치는구나.
석양에 돌아가는 중의 상투가 석 자나 되고 베틀에서 베를 짜는 계집의 불알이 한 말이네.
*사슴이 알을 품고 게가 꼬리를 치며, 중이 상투를 틀고 계집에게 불알이 있을 수 있으랴.
허망하고 거짓된 인간의 모습을 헛된 말 장난으로 그림으로써 당시 사회의 모순을 해학적으로 표현했다.
86. 胡地花草(오랑캐 땅의 화초)
胡地無花草 胡地無花草
胡地無花草 胡地無花草
오랑캐 땅에 화초가 없다지만 오랑캐 땅이라고 화초가 없으랴.
오랑캐 땅에는 화초가 없더라도 어찌 땅에 화초가 없으랴.
*호(胡)자에 '오랑캐'라는 명사와 '어찌'라는 부사의 뜻이 있다.
87. 樂民樓(낙민루)
宣化堂上宣火黨 樂民樓下落民淚
咸鏡道民咸驚逃 趙岐泳家兆豈永
선정을 펴야 할 선화당에서 화적 같은 정치를 펴니
낙민루 아래에서 백성들이 눈물 흘리네.
함경도 백성들이 다 놀라 달아나니
조기영의 집안이 어찌 오래 가랴.
*관찰사가 집무 보는 관아를 선화당이라고 하였다.
*구절마다 동음이의어를 써서 함경도 관찰사 조기영의 학정을 풍자했다.
宣化堂(선정을 베푸는 집) 宣火黨(화적 같은 도둑떼)
樂民樓(백성들이 즐거운 집) 落民淚(백성들이 눈물 흘리다)
咸鏡道(함경도) 咸驚逃(모두 놀라 달아나다)
趙岐泳(조기영) 兆豈永(어찌 오래 가겠는가)
88. 김삿갓이 백일장에서 지은 시
論鄭嘉山 忠節死 嘆金益淳 罪通于天
一爾世臣金益淳 鄭公不過卿大夫
將軍桃李농西落 烈士功名圖末高
詩人到此亦慷慨 撫劍悲歌秋水溪
宣川自古大將邑 比諸嘉山先守義
淸朝共作一王臣 死地寧爲二心子
升平日月歲辛未 風雨西關何變有
尊周孰非魯仲連 輔漢人多諸葛亮
同朝舊臣鄭忠臣 抵掌風塵立節死
嘉陵老吏揚名旌 生色秋天白日下
魂歸南畝伴岳飛 骨埋西山傍伯夷
西來消息慨然多 問是誰家食錄臣
家聲壯洞甲族金 名字長安行列淳
家門如許聖恩重 百萬兵前義不下
淸川江水洗兵波 鐵甕山樹掛弓枝
吾王庭下進退膝 背向西城凶賊脆
魂飛莫向九泉去 地下猶存先大王
忘君是日又忘親 一死猶輕萬死宜
春秋筆法爾知否 此事流傳東國史
※ '가산군수 정시의 충절을 논하고 김익순의 죄를 탄식하라'
대대로 임금을 섬겨온 김익순은 듣거라.
정공(鄭公)은 경대부에 불과했으나
농서의 장군 이능처럼 항복하지 않아
충신 열사들 가운데 공과 이름이 서열 중에 으뜸이로다.
시인도 이에 대하여 비분강개하노니 칼을 어루만지며
이 가을 날 강가에서 슬픈 노래를 부르노라.
선천은 예로부터 대장이 맡아보던 고을이라
가산 땅에 비하면 먼저 충의로써 지킬 땅이로되
청명한 조정에 모두 한 임금의 신하로서
죽을 때는 어찌 두 마음을 품는단 말인가.
태평세월이던 신미년에 관서 지방에
비바람 몰아치니 이 무슨 변고인가.
주(周)나라를 받드는 데는 노중련 같은 충신이 없었고
한(漢)나라를 보좌하는 데는 제갈량 같은 자 많았노라.
우리 조정에도 또한 정충신(鄭忠臣)이 있어서
맨손으로 병란 막아 절개 지키고 죽었도다.
늙은 관리로서 구국의 기치를 든 가산 군수의
명성은 맑은 가을 하늘에 빛나는 태양 같았노라.
혼은 남쪽 밭이랑으로 돌아가 악비와 벗하고
뼈는 서산에 묻혔어도 백이의 곁이라.
서쪽에서는 매우 슬픈 소식이 들려오니
묻노니 너는 누구의 녹을 먹는 신하이더냐?
가문은 으뜸가는 장동(壯洞) 김씨요
이름은 장안에서도 떨치는 순(淳)자 항렬이구나.
너희 가문이 이처럼 성은을 두터이 입었으니
백만 대군 앞이라도 의를 저버려선 안되리라.
청천강 맑은 물에 병마를 씻고 철옹산 나무로
만든 활을 메고서는 임금의 어전에 나아가
무릎 꿇듯이 서쪽의 흉악한 도적에게 무릎 꿇었구나.
너의 혼은 죽어서 저승에도 못 갈 것이니
지하에도 선왕들께서 계시기 때문이라.
이제 임금의 은혜를 저버리고 육친을 버렸으니
한 번 죽음은 가볍고 만 번 죽어야 마땅하리.
춘추필법을 너는 아느냐?
너의 일은 역사에 기록하여 천추만대에 전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