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11. 24. 11:09ㆍ한시와 명언 보기
長恨歌
백거이
漢皇重色思傾國(한황중색사경국) 한나라 황제는 색을 중시하여 경국지색을 생각하고
御宇多年求不得(어우다년구부득) 황제에 오른 후 많은 해 동안 구했으나 얻지못하였다
楊家有女初長成(양가유녀초장성) 양씨 가문의 한 아씨가 갓 장성하였는데
養在深閨人未識(양재심규인미식) 깊은 규방에서 자라 사람들은 알지 못했지만
天成麗質難自棄(천성려질난자기) 타고난 미모는 그대로 묻힐 리 없어
一朝選在君王側(일조선재군왕측) 어느 날 갑자기 선택되어 군왕을 모시게 되었다
廻眸一笑百媚生(회모일소백미생) 눈동자를 돌려 한번 웃으면 백가지 아첨이 생겨나니
六宮粉黛無顔色(육궁분대무안색) 육궁의 단장한 미인들이 무색해졌다.
春寒賜浴華淸池(춘한사욕화청지) 봄 추위에 천자는 그녀에게 화청 연못에 들기를 허락하여
溫泉水滑洗凝脂(온천수활세응지) 온천의 부드러운 물은 윤기 있는 그녀의 몸을 씻었다
侍兒扶起嬌無力(시아부기교무력) 시녀들이 부축하는 그녀의 몸은 힘없이 늘어졌고
始是新承恩澤時(시시신승은택시) 이것이 천자의 성은을 받게 된 처음이었다.
雲嬪花顔金步搖(운빈화안금보요) 구름같은 머리칼, 꽃같은 얼굴, 걸으며 흔들거리는 금비녀
芙蓉帳暖度春宵(부용장난도춘소) 부용꽃 수놓은 휘장 안은 따뜻하고 봄날은 깊어만 갔다.
春宵苦短日高起(춘소고단일고기) 봄밤은 짧아 천자는 해가 높이 뜬 뒤에 일어났고
從此君王不早朝(종차군왕불조조) 이 때부터 천자는 조회에 나가지않았다
漁陽비鼓動地來(어양비고동지래) 어양에서 전쟁의 북소리가 땅을 울리며 들려 오고
驚破霓裳羽衣曲(경파예상우의곡) 연주되던 예상우의곡은 놀라 중단되었다.
九重城闕煙塵生(구중성궐연진생) 구중궁궐에 연기와 먼지가 피어 오르고
千乘萬騎西南行(천승만기서남행) 일천수레와 일만기병은 서남쪽으로 출발했다.
翠華搖搖行復止(취화요요행부지) 황제의 기는 흔들거리며 가다가 멎고 천천히 움직여
西出都門百餘里(서출도문백여리) 장안 서쪽 백여리에 이르렀다.
六軍不發無奈何(육군불발무내하) 여섯군대가 출발하지 않으니 천자로서도 어쩔 수 없었고
宛轉蛾眉馬前死(완전아미마전사) 갸름한 눈썹의 양귀비는 말 앞에서 살해되었다.
花鈿委地無人收(화전위지무인수) 그녀의 꽃비녀는 땅에 버려졌으나 줍는 사람도 없었다
翠翹金雀玉搔頭(취교금작옥소두) 물총새 깃털, 공작모양 황금 머리장식, 옥비녀 모두
君王俺面救不得(군왕엄면구부득) 천자는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그녀를 구하지 못하니
回看血淚相和流(회간혈루상화류) 돌아본 얼굴에는 피 눈물이 뒤섞여 흐른다
黃埃散漫風蕭索(황애산만풍소삭) 황색먼지 뿌옇고 바람은 쓸쓸히 부는데
雲棧영紆登劍閣(운잔영우등검각) 구름까지 닿을 듯 높고 구불구불한 길로 검각산을 오른다
峨眉山下少人行(아미산하소인행) 아미산 기슭에는 지나는 사람도 적고
旌旗無光日色薄(정기무광일색박) 천자의 깃발도 빛이 없고 햇빛도 약하다
蜀江水碧蜀山靑(촉강수벽촉산청) 촉나라 강물은 파랗고 촉나라 산빛은 푸른데
聖主朝朝暮暮情(성주조조모모정) 천자는 아침 저녁 그리운 정으로 가득하다
行宮見月傷心色(행궁견월상심색) 궁전에서 달을 보면 달빛으로 슬픔을 느끼고
夜雨聞鈴腸斷聲(야우문령장단성) 밤비속에 창자를 끊는 듯한 방울소리를 듣는다
天旋地轉廻龍馭(천선지전회용어) 천하 정세는 바뀌어 천자는 장안으로 돌아오다가
到此躊躇不能去(도차주저불능거) 그곳에 이르자 머뭇거리며 떠나지 못했다
馬嵬坡下泥土中(마외파하이토중) 마외 고개 아래 진흙 속에
不見玉顔空死處(불견옥안공사처) 옥같은 얼굴은 볼 수 없고 죽은 곳만 남아 있었다
君臣相顧眞霑衣(군신상고진점의) 천자도 신하도 서로 눈물로 옷을 적셨고
東望都門信馬歸(동망도문신마귀) 동쪽 성문 향해 말이 가는대로 돌아왔다
歸來池苑皆依舊(귀래지원개의구) 돌아오니 연못도 동산도 옛날 그대로
太液芙蓉未央柳(태액부용미앙류) 태액 연못 연꽃도 미앙궁 버드나무도 그대로였다
芙茸如面柳如眉(부용여면류여미) 연꽃은 그녀 얼굴같고 버들은 그녀 눈썹같으니
對此如何不淚垂(대차여하불루수) 그것들을 대하니 어이 눈물을 흘리지 않으리
春風桃李花開日(춘풍도리화개일) 봄바람에 복숭아꽃 살구꽃 피는 날이나
九華帳裏夢魂驚(구화장리몽혼경) 온갖 꽃 모양 호화로운 휘장 안에서 태진은 꿈에서 깨어났다
攬衣推枕起徘徊(남의추침기배회) 옷을 손에 들고 베개를 밀치며 일어나 배회하는데
珠箔銀鉤이리開(주박은구이리개) 진주 발과 은 갈고리가 뒤이어 열린다
雲빈半偏新睡覺(운빈반편신수각) 구름처럼 치켜올린 머리는 갓 일어나 반쯤 흩어졌고
花冠不整下堂來(화관부정하당래) 꽃으로 만든 관을 정돈하여 쓰지 못한 채 당에서 내려왔다
風吹仙袂飄요擧(풍취선몌표요거) 바람이 신선의 옷깃을 펄럭이게 하고
猶似霓裳羽衣舞(유사예상우의무) 마치 예상우의 춤을 다시 보게 해주는 듯했다
玉容寂寞淚난干(옥용적막누난간) 옥 같은 얼굴에 쓸쓸하게 눈물 떨어지니
梨花一枝春帶雨(이화일지춘대우) 마치 배꽃 가지가 봄비를 맞는 듯 했다
含情凝제謝君王(함정응제사군왕) 정을 간직한 채 사자를 보며 군왕께 감사를 전했고
一別音容兩渺茫(일별음용양묘망) 이별후 천자의 목소리와 모습이 모두 흐릿해졌다 한다
昭陽殿裏恩愛絶(소양전리은애절) 소양전에서 천자의 사랑을 받았으나 그것도 끊어졌고
蓬萊宮中日月長(봉래궁중일월장) 선산 봉래궁에서 긴 세월을 보내고 있다
廻頭下望人환處(회두하망인환처) 머리를 돌려 아래 인간세상을 굽어 보아도
不見長安見塵霧(불견장안견진무) 장안은 보이지 않고 먼지와 안개가 자욱할 뿐
唯將舊物表深情(유장구물표심정) 다만 천자가 주신 기념품으로 내 깊은 정을 표시하고
鈿合金釵寄將去(전합금차기장거) 나전 상자와 금비녀를 주며 가져가라 하니
釵留一股合一扇(차류일고합일선) 금비녀도 나전 상자도 반씩 나누어 간직하겠다고 한다
釵擘黃金合分鈿(차벽황금합분전) 그리고 금비녀도 반으로 나누고 나전 상자도 둘로 나누었다
但敎心似金鈿堅(단교심사금전견) 우리 마음이 본래 하나였던 이 비녀와 나전처럼 맺어졌다면
天上人間會相見(천상인간회상견) 언젠가 천상이든 인간 세상이든 만날 날이 있겠지요
臨別殷勤重奇詞(임별은근중기사) 헤어질 무렵 간곡히 다시 전할 말 부탁했는데
詞中有誓兩心知(사중유서양심지) 그 중에는 두 사람만 아는 맹세의 말이 있었다
七月七日長生殿(칠월칠일장생전) 칠월칠석에 장생전에서
夜半無人私語時(야반무인사어시) 밤 깊어 사람 없자 은밀히 속삭였던 말
在天願作比翼鳥(재천원작비익조) 하늘에서는 비익조가 되고
在地願爲連理枝(재지원위연리지) 땅에서는 연리지가 되리라
天長地久有時盡(천장지구유시진) 하늘과 땅도 끝이 있고 시간조차 다함이 있으나
此恨綿綿無絶期(차한면면무절기) 이 한만은 영원히 이어져 끝이 없으리.
* 당현종((唐 憲宗 李純, 778년3월 17일 ~ 820년2월 14일)은 중국 당(唐)의 제11대 황제(재위 805년 ~ 820년)이다. 당의 중흥지주(中興之主), 즉 기울어가던 왕조를 다시 일으켜 세운 군주라는 칭송을 받았다. 순종의 장남으로 순종이 아직 태자로 있던 대력 13년(778년)에 장안(長安)의 동내(東內)에서 태어났다. 태자의 아들로서 광릉군왕(廣陵郡王)에 봉해졌다가 정원 21년(805년) 4월 순종이 즉위한 뒤 태자로 세워지고 4개월만인 8월에 병약한 아버지로부터 양위 받아 즉위하였다. 일찍이 순종은 왕숙문(王叔文), 위집선(韋執誼), 유종원(柳宗元), 유우석(劉禹錫) 등을 중용하여 조정의 개혁에 나섰지만 당시 조정을 장악하고 있던 환관 세력의 방해를 받아 이루지 못했고, 양위도 순종 자신의 병약함뿐 아니라 환관 구문진(俱文珍)의 핍박에 못 이겨 불가피하게 이루어진 면이 있었다. 성격이 곧고 과단성이 있었던 헌종은 즉위 후 환관 세력에 맞서고자 두황상(杜黃裳)을 재상으로 등용하였으며, 당 조정의 간섭에서 벗어나 반독립적인 권력을 행사하던 지방 절도사 세력의 통제에 나섰다. 번진(藩鎭) 세력에 맞서 그들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기 위한 시책으로서 헌종은 유학자 출신의 번수(藩帥)를 등용하고 감사 임무를 주관하는 감군(監軍)에 환관을 임명하는 등 절도사들의 동태를 감시하는 제도를 시작했다. 당대 명신(名臣)으로 평가받던 무원형(武元衛)이나 이길보(李吉甫) 등도 등용되어 군비를 확장시킨 금군(禁軍)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결과, 원화 2년(807년) 진해절도사(鎭海節度使) 이기(李锜)를 정벌한 것을 시작으로 원화 8년(813년)에 위박절도사(魏博節度使) 전흥정(田興歸)의 귀복을 받아내고, 당조에 저항적이었던 성덕절도사(成德節度使) 왕승종(王承宗)에 대해서도 공세를 가했으며, 원화 10년(815년)부터 원화 12년(817년)까지, 헌종은 회서절도사(淮西節度使) 오원제(吳元濟)를 토벌해 평정하고(오원제 평정 이후 전국의 번진들은 각자 거느리고 있던 땅을 떼어 바치며 당조에 귀복), 원화 13년(818년)부터는 고구려 유민 출신의 치청절도사(淄淸節度使) 이사도(李師道)에 대한 공략에도 힘을 기울여 이듬해에 그를 평정하는데 성공한다. 안록산의 난 이래 당 왕조에 반항적이던 번진인 하삭 삼진(河朔三鎭)도 당 왕조에 충성을 맹세하여, 쇠퇴하던 당은 일시적으로 중흥기를 맞이하게 된다. 이것을 역사에서는 원화중흥(元和中興)이라 부른다.
그러나 태자로 책봉된 장남 등왕 녕(寧)이 19세로 요절하자 헌종은 비통에 빠진 나머지 불교와 도교에 빠져갔다. 원화 14년 정월에 봉상(鳳翔)에 있던 법문사(法門寺)의 불사리를 장안으로 모셔다 공양하려 한 것에 당시 형부시랑(刑部侍郞)으로 있던 한유(韓愈)가 「논불골표(論佛骨表)」를 지어 간언한 것에 격노하여 그를 조주자사(潮州刺史)로 내쳐버렸다. 국가의 막대한 재물을 들여 불사리를 공양한 헌종의 모습을 《자치통감(資治通鑑)》은 "중사(中使)가 불골(佛骨)을 맞이하여 경사(京師)에 이르자 상이 사흘 동안 그것을 궁중에 두었다가 여러 절에도 돌려 보였다. 왕공(王公), 사민(士民)이 받들어 이를 보면서 두려워하는 데서만 그치지 않고, 불골을 본 사람로서 믿음이 두터운 자는 향을 살라서 이마를 지져 공양하는 자도 있었다(中使迎佛骨至京師, 上留禁中三日, 乃歷送諸寺. 王公士民瞻奉舍施, 唯恐不及. 有謁戶充施者, 有燃香燒頂供養者)."고 적고 있다. 헌종 자신이 환관 세력을 견제하고자 애를 썼지만, 애초에 그의 즉위는 환관들에 의한 것이었으며 헌종 자신이 번진들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는 과정에서 다시 환관을 중용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도교에서 말하는 불로불사의 술법에 빠져 금단(金丹)을 남용한 나머지 갈 수록 조급증에 빠져 걸핏하면 화를 내고 가까이 있는 환관을 잡아다 매를 때리는 등 정신 이상을 일으키기에 이르렀다. 결국 820년 환관 왕수징(王守澄)과 진홍지(陳弘志)에게 시해당하였다. 향년 43세. 재위 15년만의 일이었다.안녹산의 난(755년~763년) 당나라의 절도사인 안녹산과 사사명 등이 일으킨 대규모 반란으로 당나라 말기 당 현종은 양귀비에 빠져 환관들에게 정치를 맡겼고 외척과 환관들이 장악한 정치판은 부패할 데로 부패해 자립 소농민층이 해체될 지경에 이르렀다. 이처럼 혼란한 때를 틈타 안녹산은 755년에 대규모 반란을 일으키고 황제의 자리에 올라 국호를 연(燕)이라 칭했다. 이 난으로 인해 당은 쇠퇴하였고 이후 대규모 농민반란이 일어났다.
* 양귀비(양옥환,양귀비(楊貴妃, 719년 6월 26일 ~ 756년 7월 15일)는 당 현종의 후궁이자 며느리이다. 서시, 왕소군, 우희와 함께 고대 중국 4대 미녀들 중 1명으로 손꼽히는 인물이다. 양옥환(楊玉環)은 719년 당 현종 집권 초기에 쓰촨성 촉주(蜀州)(현 두장옌 시)에서 태어나 포주(蒲州)의 영락(永樂)(현 산서성 융지 시)에서 자랐다. 양옥환의 고조부인 양왕(楊汪)은 수 양제 양광이 통치하던 시대에 중신이었다. 수나라의 멸망 이후 정나라의 왕세충을 모시고 살았다. 621년 당에 의해 왕세충이 패배할 때 양왕도 살해됐다. 양왕은 원래 산서성 화현(현 웨이난 시) 출신이었는데, 양왕 일가는 용락(현 윈청 시)에 이주해 기반을 다졌다. 양옥환의 아버지 양현염(楊玄琰)은 촉주에서 호구를 조사하는 하급관리였고, 양현염의 가족은 양현염과 촉주로 이사했다. 양현염은 아들이 없었고, 양옥환과 양옥환의 언니를 세 명 낳았다. 양현염은 양옥환이 어렸을 때 죽어서 양옥환은 하남성 낙양에서 하급관리로서 근무하던 숙부 양현교(楊玄璬) 슬하에서 자랐다. 숙부는 가정교육에 엄격해 사서삼경을 가르치고 많은 시문을 외우게 했는데, 총명했던 양옥환은 숙부 집에 있던 기생 출신 하녀에게서 호선무(胡旋舞)를 몰래 배웠다. 당시 감찰어사를 맡던 양옥환의 친척 양신명(楊愼名)과 양신명의 처는 양옥환을 자신들의 집에서 열리는 연회에 자주 초청했는데, 연회의 손님들 중에는 당 중종 이현의 딸 장녕공주도 있었다. 장녕공주의 첫 번째 남편 양신교는 본래 양옥환과 같은 홍농 양씨 출신이었는데 마침 장녕공주와 양신교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양회가 당 현종 이융기가 가장 총애하는 딸 함의공주(咸宜公主)와 혼인하게 되었다. 장녕공주는 이 혼례에서 빼어난 미모로 소문난 양옥환에게 들러리를 부탁했고, 양옥환은 함의공주와 가까이 지내게 되었다. 함의공주처럼 혜비 무씨(惠妃 武氏)의 소생이었던 제13황자 이모(李瑁)는 양옥환의 미모에 매료됐고, 함의공주의 주선으로 무씨도 양옥환을 마음에 들어 해 이융기에게 양옥환을 이모의 비로 달라고 청했다.무씨는 측천무후 무조(武曌)의 조카라는 이유로 황후에는 봉해지지 못했지만, 이융기에게서 가장 큰 총애받는 후궁이었기에 이융기는 무씨가 한 부탁을 들어주었다.733년 개원 23년 16세 양옥환은 이모와 혼인했다. 이모는 무씨와 이임보의 후원으로 황태자에 추천됐으나, 무씨 사망 후 익년 환관 고력사(高力士)의 추천으로 이여(李璵)가 황태자로 책봉됐다. 무씨 사망 후 실의에 빠진 이융기를 위로하고자 고력사는 무씨와 닮은 양옥환이 이모와 화청지(華淸池)로 피서한다는 사실을 알고 이융기에게 화청지로 가라고 권했다. 그 날 이후로 무씨를 닮은 미모에 시와 노래까지 능한 양옥환에게 감정이 생긴 이융기는 고력사와 이 일을 상의했다. 고력사는 양옥환을 만나 이융기의 의중을 암시했고, 이융기는 양옥환을 화산의 도사로 출가시켜 아들인 이모에게서 떼어놓고 궁내에 도교 사원인 태진궁(太眞宮)을 짓고 양옥환을 다시 이곳을 관리하는 여관(女冠)으로서 불러들였다. 이때 양옥환은 22세, 이융기는 57세였다. 745년 양옥환이 27세에 귀비가 되면서 당은 서서히 끝자락을 달리게 된다. 이융기가 재위한 초기에는 개원의 치를 이룩할 정도로 어질게 정치했지만 양옥환이 등장한 후 양옥환 일가의 전횡이 시작되면서 당은 힘을 점점 잃게 된다. 양옥환의 세 오빠에게 모두 높은 벼슬을 주었고, 언니 세 명을 국부인에 책명할 정도로 이융기는 양옥환을 총애했다. 그중 양옥환의 사촌 오빠인 양소는 이융기에게 이름 ‘국충’을 하사받고 승상까지 올라 국정을 전횡한 인물로서 환관 고력사와 담합해 이융기를 정치에서 관심을 멀어지게 한다. 양옥환에게 셋째 언니인 괵국부인 양옥쟁이 있었는데, 미모가 아름다웠다. 이융기는 괵국부인을 보고 반해 양옥환에게 입궁시키라고 명하였는데, 양옥환은 질투해서이 명령을 거절했고, 사이가 점점 멀어지게 되어 이융기는 양옥환을 퇴궁하게 했는데, 고력사와 양국충이 두 사람을 화해하게끔 해서 두 사람은 사이가 다시 좋아졌다. 747년 절도사 안녹산이 등장해 양옥환은 안녹산과 친해진다. 새로운 권력자의 등장에 위기를 느낀 양국충은 견제하는데, 이것은 안사의 난이 일어나 당이 멸망하는 원인이 된다. 756년 지덕 원년 가서한은 안녹산에게 대패하면서 잡혔고 동관도 함락되었다. 이융기는 수도 장안을 빠져 나가 촉(현 쓰촨성)으로 피난했고, 양옥환 및 양국충, 고력사, 이형(李亨)도 동행했다. 756년 7월 15일 섬서성 마외(馬嵬)에 이르러 전란 원인이 된 양국충을 증오하던 진현례(陳玄禮)와 병사들은 양국충과 국부인들을 처형했으며, 현종에게 ‘도적의 근본’인 양옥환을 죽이라고 요구했다. 현종은 “양옥환은 심궁에 있었고 양국충의 모반과 무관하다”라고 옹호했지만, 고력사의 진언에 따라 양옥환에게 사세부득이 자살을 명했다. 고력사에 의해 양옥환은 목 매달아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