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6. 17. 10:07ㆍ섬(島)나들이
如 犀 角 獨 步 行
>>>620 최후의 만찬(4일간)<<<
-보름왓,김창열미술관,송악산,사색공원,가파도,커피수목원,돌문화공원,용두암-
0. 기간: 2022. 6. 13. ~ 6.16. (3박 4일) * 필자 외 9(62공들)
0. 간곳: 보름왓,김창열미술관,송악산트레일,생각하는정원,가파도일주,커피수목원,돌문화공원,용두암
0. 거리(만보기 환산): 26km정도(52,123보)
62공들의 제대일이 곧 다가온다. 이런 전차로 말년 설계교육을 한다고 연락이 온다. 첨엔 안간다고했지만 나중에 신청을 하였다는 후배의 말에 그냥 승락 아닌 승락을 하고 기다린지 보름날이 지날 쯔음 뱅기를 타게된다. 인제 코로나시절도 막바지에 접어 드는지 공항엔 사람들이 많다. 사실 4월 5일에도 제도를 댕기왔으니 꼭 두달만이다. 공항에서 오랫만에 만난 동료들을 보니 감회가 새롭다. 현지에 도착 이곳저곳을 들러본다. 그래도 안가본곳으로 목적지가 정해져 있어 그나마 다행이다. 맛깔스런 음식도 맛을본다. 같이 한 동료들캉 자녁무대도 같이 했으면했지만 酒는 멀리한지가 강산이 2번이나 지난지라 자리를 같이 못함이 못내 아쉽다. 또 동료덕분에 새벽에 제주항 일출도 본다. 감지덕지다.ㅎㅎㅎ 하여튼 같이 한 10분들 모두가 미래 안녕과 삶에 대한 즐거움이 있길 기원해드린다. 돌아오는길 공항은 사람으로 인산인해다. 주중인데도 말이다. 어케나 고락을 같이한 80여 시간 추억 영원히 간직되시길 기대해본다.ㅎㅎㅎ
1. 1일차(교육, 보름왓 정원)
첫날 첫 교육에서 제일 머리에 남는 명언을 남겨본다.
□ 보롬왓 : 사계절 다양한 식물들을 만날 수가 있느 보름왓은 봄철에 메일이 장관을 이루고 있으며 직접 생산 가공하는 농업협동조합으로 다양한 식물과 함께 공기정화 식물을 직접 만들어 보는 체험을 할 수가 있다. 그리고 많은 꽃들을 체험하면서 자연미를 마음껏 느낄수가 있는곳인데 아쉽게도 날씨가 추워서 전체를 다 돌아보지 못한 아쉬움이 남는다. 아무튼 이렇게 조성해서 관리하는 자체가 대단하다는것을 보고 느낀다.
* 제도 온천지가 수국으로 도배를 한 듯하다.
2. 2일차(김창열미술관,송악산,사색공원,커피수목원)
□ 김창열미술관 : 김창열은 1929년 12월 24일 평안남도 맹산군 지덕면 송암리에서 김대권과 안영금의 3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서예에 조예가 깊은 할아버지와 함께 자라며 붓글씨를 통해회화를 접했고,광성보고시절에는 외삼촌으로부터 데셍을 배웠다. 지금으로 치면 고등학교 1학년인광성고보4학년 때 해방이 되자 학교에 있던 일본인 선생님들이 모두 빠져나가 학교에서는 매일 자습만 시켰다. 당시 여기저기 붙어있던 "격문(檄文)"이란 방(榜)을 자주 본 터라 김창열은 노트를 펴놓고 '격문'이란 단어를 이런저런 글씨로 연습하며 낙서를 하고 있었다. 선생 대신 자습을 지켜보러 온 보안서원이 그 모습을 보고 바로 끌고 가서 일주일간 구류시켰다. 학교로 돌아오자 또래 사이에서 영웅이 되었고, 상급생으로부터 이런저런 단체에 가입하라는 권유를 받은 김창열은 김구 선생을 따르는 모임에 한번 나갔다가 연락책을 하라는 말을 듣는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고 아직 아무 지시도 내려온 적이 없는데, 그 일로 갑자기 수배를 받게 된다. 삼촌이 먼저 알고 뛰어와서 조카를 피신시키며 먼저 월남한 아버지를 찾아 월남하라고 제안한다. 16세에 학교를 그만두고 말도 안 되는 이유로 가족을 두고 월남한 김창열은 서울에서 6개월 만에 아버지를 찾아냈고, 2년 뒤 남은 가족도 월남을 감행해 기적처럼 우연히 길에서 지나가던 김창열을 만나는 바람에 모두 상봉하게 된다. 김창열은 제1회 대학입학 검정고시에 응시해 졸업 자격을 획득한다. 김창열은 월남 후 서울의 다양한 회화연구소를 다녔다. 처음에는 조각가 이국전 연구소에 다니다가 연구소가 폐쇄되자 이쾌대의 성북회화연구소에서 그림을 배웠다. 화가가 될 것을 결심하고 검정고시를 통해 1948년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에 입학했다. 그러나 2학년 때 발발한 6·25 전쟁으로 1950년 학업이 중단되었고, 상황을 알아내기 위해 집을 비운 사이 가족들과 헤어진 채 김창열은 길거리에서 의용군 모병 반에 끌려갔다. 다행히 전선에 투입되지 않고 후방 부대에 배치되었지만, 김창열은 눈치껏 도중에 도주를 했고 서울수복 때까지 모두가 피난 가서 비어 있던 자기 집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누군가 김창열이 의용군에 있었음을 고자질해서 다른 사람들처럼 현병대에 끌려갔으나, 김창열 집에 뭐라도 집어갈 게 없나 살피러 들어온 아주머니에게 그의 일기가 발견되어 동네 아주머니들이 그 일기장을 보여주며 적극적으로 구제를 해주어 큰 탈 없이 석방되고 다시 피난 중이던 가족을 만난다. 김창열은 이후 강제징용을 피하기 위해 월남 후 경찰관이 된 아버지와 다른 친척들의 귀띔으로 경찰전문학교에 간부 후보생으로 입교해 평생의 친구가 된 수필가 박재식, 정치가 정석모 등을 만나게 된다.[3] 휴전 후 서울대학교에 다시 등록하려고 했으나 이쾌대의 성북회화연구소에 다녔다는 것이 문제가 되어 등록이 거부된다. 계속해서 경찰생활을 하면서 혼자 그림을 그렸다. 1957년 5월 김창열은 평소 친분이 있던 장성순, 하인두, 김서봉, 김청관, 라병재, 조동훈, 이철, 김종휘, 김충선, 김영환, 문우식과 함께 뒤에 <한국현대미술가협회>(약칭 현대미협)이라는 동인회를 결성하고, 5월 1일부터 9일까지 미국 공보원에서 첫 동인전을 개최했다. 뒤에 박서보를 찾아가 협회에 가입시켰고, 그의 제안을 받아 동인전의 이름을 "현대전"이라고 약칭하고 제2회부터 함께 해나갔다. 당시 안국동 동덕여대 건물 2층을 빌려 이봉상회화연구소라는 이름으로 박서보가 운영하던 작업실 겸 화실이 현대미협 동료들의 아지트가 되었다. 1958년 개최된 현대전 3회와 4회는 세간의 주목을 유독 많이 받았다. 4회전 이후 현대전은 당시 세계적인 흐름이었던 앵포르멜 운동의 한국판이 되었고, 그런 일색이 싫다고 나가는 동료들이 계속 생겨 현대미협 회원들은 매번 교체되었다. 김창열은 서울 경찰전문학교 도서주임으로 근무하면서 일본에서 들어오는 화집과 미술서적을 통해 당시 세계적 흐름을 읽어냈고, 창작에 전념했다.[4] 하지만 박서보의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후배를 만나 결혼을 하면서 경찰직을 그만 두었고 성루예고 교사로 근무하며 창작을 계속했으나, 결혼생활이 오래 지속되지 못하자 괴로움 끝에 해외로 나가기 시작했다. 1961년 파리 세계청년화가대회에 한국 대표로 나가 있던 박서보가 주선하여 1961년 제2회 파리 비엔날레에 한국이 초청되었고, 김창열이 출품작가 4명 중 한 명이 되었다. 그 다음 1963년에는 제3회 파리 비엔날레에 출품작가를 선정하는 커미셔너가 되었고, 1965년 상파울로 비엔날레에도 작품을 출품할 수 있었다. 1961년 파리 비엔날레 이후 해외 전시나 국제 비엔날레에 출품할 기회들이 계속 주어지자 사람들 간에 경쟁이 극심해졌고 마침내는 국제적 출품 작가를 선정하는 문제를 두고 108인의 연대 서명과 같은 일까지 벌어졌다. 김창열은 미국에 가 있던 김환기의 추천으로 1965년 영국 런던에서 개최된 세계청년화가대회에 한국대표로 참가했고, 거기서 다시 김환기의 추천으로 1966년 록펠러 재단의 연구비를 지원받아 미국에서 한달 동안 연수를 받게 된다. 이후 미국에 남아 김환기와 마찬가지로 넥타이 공장에서 일도 하고 갖은 잡일을 하며 4년을 버티면서 그림을 그린다. 1966년부터 1968년까지 미국 아트 스튜던트 리그(Art Students League)를 통해 세계미술계에 대한 도전의식을 키우던 중 1969년 백남준의 도움으로 파리 아방가르드 페스티벌에 참여하게 되고, 이를 계기로 뉴욕을 떠나 파리에 정착하게 된다. 당시 박서보의 추천으로 1971년 제7회 파리 비엔날레에 한국 대표로 참가하기 위해 파리에 온 이우환과도 이 때 만나게 된다.김창열은 파리 근교 빨레소(Palaiseau)라는 곳에서 마굿간을 아뜰리에로 쓰던 독일의 한 젊은 조각가에게 작업실을 이어 받아 지금의 아내인 마르틴 질롱(Martine Jillon)을 만나 동거하며 그곳에서 주야장천 그림만 그렸다. 마침내 1972년 물방울 그림을 창안하기에 이르렀고, 근처 골동품 가구점에서 연 첫 개인전이 우연히 길을 지나던 파리의 일간지 <콩바(Combat)>의 선임기자 알랭 보스케의 눈에 들어 기사화되고, 이후 다른 신문사들에서도 앞다투어 취재를 해가면서 순식간에 이름을 알리게 되었다. 1972년 파리의 권위있는 초대전 살롱 드 메(Salon de Mai)전에서 물방울 그림인 <<Event of Night>>(1972)으로 본격적으로 데뷔하였으며, 이후 현재까지 물방울을 소재로 전 세계에서 활발한 전시를 계속하고 있다. 2004년 프랑스 국립 쥐드폼미술관 초대전에서는 물방울 예술 30년을 결산하는 전시를 하였다. 2016년 9월 김창열이 한 때 경찰 생활을 했던 제주도에 제주도립김창열미술관이 개관되었다. 현재 김창열은 한국으로 돌아와 성북동 자택에서 살다가 2021년 1월 5일, 91세의 나이로 별세하였다. 시신은 서울추모공원에서 화장된 뒤 제주도립 김창열미술관에서 수목장되었다.(펀글)
□ 송악산 둘레길 : 송악산 둘레길은 송악산과 해안으로 이어진 해식길이다. 자연미가 넘치는 송악산엔 일제때 많은 기지를 건설한답시고 진지(굴)이 엄청 많이 파 놓아서 흉하게 보인다. 송악산은 99개의 작은 봉우리가 모여 있어서 99봉이라고도 하며 이중분화구의 화산지형으로 세계적으로 거의 없는곳으로도 유명하다. 이곳은 올레길 10코스이지만 언젠가는 전체구간을 걸어볼 예정이다.
* 송악산과 99봉의 안내판
* 일제시대의 잔재인 진지 굴
* 자연의 아름다움-이곳은 꼭 알프스의 한 단면과 넘 비슷하다.(아래사진 비교)
* 2017년 알프스 종주(TMB)때의 사진
* 주변엔 선인장이 꼭을 피우고 있고 오를수 없는 산 산방산과 용머리해안 그리고 저멀리 서귀포월드컵축구장 등 서귀포시가지가 한눈에 쏘---옥 들어온다.
* 돌할멍이 씽긋 눈웃음을 보낸다.
□ 생각하는정원(사색정원) : 수백여점의 분재가 오름과 물을 모티브로 한 자연정원이 자리하고 있다. 2007년 분재예술원 개원 15주년을 맞이하여 새롭게 태어나고, 세계적인 정원으로 나아가고자 생각하는 정원으로 정원의 이름을 정식으로 바꾸었다. 생각하는 정원의 역사는 1963년 성범영 원장이 제주에 첫발을 디디고 돌투성이 불모의 땅을 일구기 시작하는 것으로부터이다. 황량한 불모지에 꽃피운 한 농부의 혼불이라는 점에서 세계 언론의 주목을 받고 있으며, 실제 세계명사들이 가장 많이 다녀간 명소이다. 중국 장쩌민 국가주석의 방문과 후진타오 현 주석, 북한 김용순 노동당 비서, 일본 나까소네 총리대신 등 외교사절과 국내외명사들의 방문은 일일이 열거할 수도 없을 정도이다. 현재 이곳에는 400여점의 분재가 전시되어 있으며, 제주 화산석으로 쌓은 돌담과 돌탑, 정원 내에 시원하게 쏟아지는 제주 최대의 인공폭포, 또 하나의 폭포에서 쏟아져 내리는 물줄기는 커다란 잉어들이 한가로이 노니는 연못 등의 공원 시설이 잘 가꾸어져 있다.(펀글) 중국 소주시의 졸정원과도 비슷(물은 없음)한 형태로 정원수가 넘 잘 조성되어 있다.(펀글)
* 62공들의 대탈주 주역들
* 세계에서 제일 키가 큰 돌하루방- 돌하루방과 필자가 같이 서 있지만 넘 작다. 고추먹고 맴맴이다.ㅎㅎㅎ
* 1995년 강택민 중국 총서기도 왔다 갔다고 흔적을 남겼다.
* "분재는 뿌리를 자르지 않으면 죽고 사람은 생각을 바꾸지 않으면 빨리 죽는다"는 명언이 새겨져 있다.
* 잉어폭포- 잉어에게 보시는 많이 했는데 미안케도 먹이값 3봉지(3천원)은 외상으로 적선만하고 왔다.(잔돈이 없어서)
이넘들이 먹이를 뿌리니 전쟁난것처럼 우르르 떼같이 몰려든다. 장관이다.ㅎㅎㅎ 나중 3천원은 갚으러 또 가야되지 싶다.
□ 커피수목원 : 난생 처음 커피가 꽃을 피우는 나무를 직접 보기도하고 직접 갈아서 만들어 맛을 본다.
3. 3일차(가파도,곶자왈)
□ 가파도 일주 : 빚 가파 달라는 섬이다.(웃음).가파도는 동경 126°16′, 북위 33°10′에 위치한다. 모슬포항에서 남쪽으로 5.5㎞ 지점인 우리나라 최남단 마라도와 제주도 본섬 중간에 있다.제주도의 부속 도서 중 네 번째로 큰 섬이다. 가장 높은 곳은 높이 20m 정도이며, 구릉이나 단애가 없는 평탄한 섬으로 전체적 모양은 가오리 형태를 이루고 있다.이 섬은 다양한 지명을 가지고 있는데, 섬 전체가 덮개 모양이라는 데서 따온 개도(蓋島)를 비롯하여, 개파도(蓋波島)·가을파지도(加乙波知島)·더위섬·더푸섬 등으로도 불린다.조선 중기까지만 해도 무인도로 버려진 곳이었으나, 국유 목장의 설치를 계기로 마을이 들어섰다. 1751년(영조 27)에 목사 정연유가 소를 이 섬에 방목하면서 본격적으로 사람이 들어와 살았다고 한다. 그 후 18세기 말에 개간을 허락되면서 경주김씨, 진주강씨, 제주양씨, 나주나씨, 김해김씨 등이 ‘황개’와 ‘모시리’ 일대에 들어와 살면서 마을이 성장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한편 가파도는 역사적으로 유명한 곳인데, 바로 우리나라가 처음으로 서양에 소개된 계기가 된 곳으로 추측되기 때문이다. 1653년가파도에 표류했으리라 짐작되는 네덜란드의 선박인 스펠웰로, 그 안에 타고 있었던 선장 헨드릭 하멜이 ‘하란선 제주도 난판기’ 와 ‘조선국기’를 저술함으로써 우리나라가 처음으로 비교적 정확히 소개된 계기가 되었다.면적은 0.87㎢이고, 해안선 길이가 4.2㎞이다. 2008년 말 현재 인구는 312명(남 145명, 여 158명)이고 세대수는 132호이다. 경지 면적은 논은 거의 없고 밭 67.4ha, 임야 153.5ha이다.주요 농산물은 고구마·보리이다. 겨울 농사로 보리를 재배하고, 여름 농사로 고구마 등을 재배한다. 고구마는 수익성이 높은 경제작물로 개경 초부터 재배해 왔다. 땅이 한정되어 있어 호당 경지 면적이 적다. 따라서 농업은 부업이며, 어업이 주산업이다.주요 어획물로는 소라·전복·해조류·해삼·성게 등이 대부분이다. 해녀들에 의하여 김, 굴, 해삼, 전복, 소라 등이 채집된다. 근해에는 자리돔 어장이 형성되고 있다.법정 1개 마을인 가파도는 상동과 하동 등 2개의 마을로 되어 있고, 북쪽에 위치한 하동포구(下洞浦口)는 연륙 교통의 요지로 항만시설이 되어 있으나, 간만차가 심하고 수심이 낮아 불편하다.가파도 해역은 예로부터 거센 기류와 조류가 부딪쳐 나가는 수역이므로, 이곳을 지나는 외항선들의 표류와 파선이 잦았던 곳이다. 교육 기관으로는 가파초등학교가 있다. 이곳은 최남단인 마라도를 연결하는 요지이다. 모슬포항·가파도 구간 하루 2회의 정기여객선이 운항되고 있다.(펀글)
* 가파도-가파도는 모슬포에서 13분 배를타고 들어가지만 운송비가 거리에 비하면 넘 비싼것 같다. 우리가 도착했을때는 청보리는 수확이 끝이나고 주변에 많은 꽃들이 우리를 기다린다. 중간지점에서 먹은 짬뽕이랑 짜장면이 일품이지만 짜장면 먹고 오후에 배가 고파 애를 먹었다.제주도 부속섬 중 우도,마라도,추자도,가파도를 탐방 완료하고 비양도 1개만 남았다. ㅇㅇㅇ
* 모슬포 여객정류장이랑 가파도 지도
* 가파도 안내석
* 62공들의 다정한 한때
* 벌써 가을인지 코스모스가 엄청 많이 피어 있어 흔적을 남긴다.
* 소망전망대에서 배경잡은 마라도가 조그만하게 보인다.
* 동창이자 제대지기인 벗
* 마카다 미인이요 마카다 추남(추천하는 남자)이다.
* 원조 해물 짬뽕집과 하멜등대: 하멜등대를 찾아봤지만 보이질 않는다.
* 조금 맵지만 이걸 시켜 먹을걸 오후내내 후회 막급했다. 고넘의 짜장은 값도 5천원 싸지만 양이 넘 적은것 같다. 오후 걸어면서 배를 움켜쥐고 걸었는데 일행들은 모르지 싶다. 그러니 저녁 횟집에서 식사는 꿀맛......ㅎㅎㅎ
* 포제단: 아마도 제사를 지낼때 쓰는 제단인듯하고 조그마한 제사음식들이 놓여 있다.
* 방풍나물꽃도 처음 보지만 바다롸 조화를 이루니 그것도 일품이다.
□ 곶자왈 환상숲 공원: 제주도는 화산섬이라 농사짓기가 척박한 땅이라 농사를 지을수가 없다. 당시에 필요도 없는 땅을 현지 주인이 싸서 그것을 다듬고 다듬어서 예븐 생물보호구로 만들었다고한다. 그래서인지 곶자왈은 천연 원시림으로 용암이 남긴 신비한 지형위에서 다양한 식물들이 살아가는 독특한 생태계가 유지되고 그로 인해 보존가치가 높은 지역으로 여름에는 따뜻하고 겨울에는 시원하여 세계에서 유일하게 북방한계식물과 남방한계식물이 공존하는 가치가 있는 그런 공원이라고한다. 예전에 인간극장에서 나온 곳으로 유명하기도 한곳이다. 곶자왈은 숲을 뜻하는 곶과 덤블이라는 뜻의 자왈이라는 제주 고유어로 "돌위에 형성된 숲"이라는 큰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한다.(펀글)
* 해설사가 함께 걸으면서 상세하게 부분 부분을 설명해주니 그 가치를 잘 알 수가 있었고 나무에 기생하는 여러가지 풀들이 같이 공존하고 있는 것 자체가 신기할따름이다.
* 움푹 파여진 곳엔 한기가 돌 정도로 찬바람이 새어 나온다.
4. 4일차(돌문화공원): 돌문화 공원은 돌의 고장 제주에 있는 돌문화를 종합적이고 체계적으로 보여주는 박물관이자 생태공원이다. 2020년까지 전체공원이 조성되며, 제1단계로 제주돌박물관, 제주돌문화전시관, 제주의 전통초가 등의 전시관이 완공되어 공사가 시작된지 7년 만인 2006년 6월 3일 문을 열었다. 제주의 돌문화를 한곳에서 볼 수 있는 돌문화공원은 규모가 워낙 커서 여유로운 일정으로 둘러보는 것이 좋다. 돌문화 공원은 제주만의 독특한 자연유산인 오름 앞에 자리잡고 있으며, 돌을 쌓아 만들어 놓은 성곽의 형태를 따라 나지막한 오르막길을 올라가면 주변 전망이 시원한 돌문화공원 입구에 다다르게 된다.입구를 지나 관람로를 따라가다보면 설문대할망과 그 아들인 오백장군 설화로 엮은 각종 돌조형물들을 만나게 되고,거석 사이를 통과하여 숲속오솔길을 따라가다 보면 박물관과 제주의 전통초가들을 볼 수 있는데, 특이하게도 박물관은 지상이 아닌 지하에 자리잡고 있다. 자연 환경과 주변 경관을 해치지 않기 위해서 그렇게 지어졌다고 한다. 야외 전시장에는 48기의 돌하르방, 사악한 기운과 액운을 몰아낸다는 방사탑, 도둑이 없어 대문도 없다는 제주의 상징인 정주석, 무덤 주위에 세워 망자의 한을 달래준다는 제주만의 내세관을 보여주는 동자석 등 제주의 역사와 전통 자연미를 함께 느낄수 있는 자연과 문화의 쉼터이다. 돌이 이렇게 큰 문화유산으로 자리 매김할 수가 있다는 기발한 아이디어가 새삼 느껴지게 한다.
* 돌문화공원 입석
* 초가지붕 출입구 매표소- 입구부터 다른곳과 다르게 초가건물로 매표소를 만들어 특히함을 알려준다.
* 하늘연못 정원
* 다양한 돌들이 나열되어 꾼들을 기다린다.
* 오백장군석
* 같이한 일행들 최후의 만찬
□ 일출과 용두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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