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남정맥5구간(덕목재-향적봉-천마산-양정고개-싸리재)

2015. 7. 26. 17:351대간 9정맥 산행/3. 금남정맥-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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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일시: 2015. 7.25. 08:00 ~ 16:00 (8시간)

 

0. 코스: 덕목재-깃대봉-황령재-함박봉-천호산-천마산-양정고개-싸리재-무상사

 

0. 거리:16.7km(정맥:16.7 접속(하산)3.3)

 

     지난번 내려왔던 덕목재를 기점으로 싸리재까징 가는 구간...가면서 함박봉을 올랐다.

 

함박봉은 신라.백제의 마지막 전투가 벌어진 황산벌 전투의 현장을 직접 볼 수가 있는 역사적인 장소였다. 당시의 상황은 흘러가는 그림으로 밖에 볼 수가 없었지만 그래도 그 격전지에서 많은 병사들의 함성이 아직도 귓전을 울리는 것 같다. 서로가 나라를 뺏고 뺏기는 혈전속에서 죽어간 이름모를 병사들..그 현장에서 장렬하게 전사한 계백과 신라 화랑도(반굴,품일)들.. 그들이 나라위해 몸을 바친덕에 1000여 년의 후손들은 이렇게 그날을 회상하면서 편하게 생활을 하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치열한 시절에 나라의 국운을 걸고 한판 승부를 펼친 백제의 계백장군과 5천병사들이 마지막으로 결사 항전했던 황산벌 전투,,,꼭 1355년이 지난 오늘에서야 현장을 보고 나니 감개가 무량할 따름이다. 마지막 정맥을 조금 벗어난 오늘 일정상 최고봉인 향적산을 못 보고 내려온게 많은 아쉬움이 남는다. 역사의 수레바퀴는 또 내일을 위하여 열심히 구르고 있다. 더 나은 22세기를 위하여!!!!!!

 

#1 황산벌 전투 안내도-서기 660년 7월 1355년전에 신라와 백제가 마지막 한판 승부를 펼친 황산벌전투 안내도와 황산벌 *주 참고

 

 

#1 초입지- 덕목재 출발하기전

 

 

#2 오늘 첫봉우리인 깃대봉- 정상엔 아무것도 없고 표준점 표시만 남았다.

 

 

#3 함박봉 정상-이곳에서 장군들이 마지막 승전을 위해 병사들을 호령하면서 지휘했을것으로 생각되는곳..주변은 들판이라서 전망좋고 마침 시원스런 바람이 온 몸으로 느끼기엔 충분..

 

 

#4 황산벌 전투 당시의 황산벌--지금은 들판이지만 1300여전에는 山野이었을 듯~~먼 곳까지 조망이 확 트였다.

 

 

#5 천마산 가는 이정표에서 - 약 8km정도 지난 지점

 

 

#6  천마산 정상 - 조망도 별로인데다가 표시적도 없이 돌만 많이 쌓여져 있다.-10km통과

 

 

#7 계룡시의 아파트 단지가 저 아래에 운집되어 있다.뒤로는 엄청 심한 낭떠러지..글고 보니 여기 근처가 신도시인듯 많이 발전되었다.

 

 

#7 양정고개 - 직진하면 대전이요 우회전하면 계룡시로 진입,,여기서 시원한 아이스구리므와 한잔의 막걸리로 더위를 날려 보내고~~..날씨가 엄청 덥네요..

 

 

#8 첨본 기찻길위 육교-정맥종주하면서 기찻길 육교를 지나는것 처음이라서 그냥 신기해서 한장(엄사초등교 부근)

 

 

#9 싸리재 진행중에 있는 연리지--근데 연리지 같진 않다. 그냥 나무가 붙어 있는 정도

 

 

금남정맥 5구간은 황산벌 전투 격전지를 돌아보는 역사 탐방코스인것 같다. 그 옛날 우리 선조들이 나라를 위하여 초개와 같이 목숨을 버린 황산벌...덥지만 바람만은 시원한 날씨속에 또 한구간을 접수했다. 담 구간엔 이성계가 도읍을 정하기로 했다는 계룡산 정상을 지나가는 코스인데 아마 경치가 엄청 좋지 싶다. 계룡산을 한 번 가본적이 있지만 그때와는 다른 코스로 계룡산을 종주하니 또 잔뜩 기대를 한다. 6구간 계룡산의 경치를 머리에 그리면서--끝--

 

주)

1.황산벌 전투란?

     황산벌은 지금 충남 연산지방이다. 7세기 중반 신라는 백제와 고구려의 압력이 가중되자 당과의 외교관계를 강화했고, 唐 역시 여러 차례의 고구려 원정에서 실패하자 백제를 선제 공격하기로 당과 신라 사이에 군사동맹이 체결되었다.(나당동맹) 660년 3월 당 고종은 소정방(蘇定方)을 시켜 13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山東반도를 출발하여 백제를 공격하게 했다. 이에 호응하여 신라 무열왕은 그해 5월에 김유신 등의 장군과 함께 군사를 이끌고 경주를 출발하여 6월 18일 남천정(지금의 이천)에 머물렀다.  태자 법민을 보내 병선 100여 척을 거느리고 덕물도(지금의 덕적도)에 가서 소정방을 맞이하게 했다. 이때 당군과 신라군은 백제의 수도인 사비에서 합세하여 공격할 계획을 정했다. 태자가 돌아오자 무열왕은 대장군 김유신과 장군 품일·흠춘 등과 함께 정예 군사 5만 명을 거느리고 사비성(지금의 부여)으로 향하게 했다. 당시 백제 조정에서는 방비책을 강구하던 중 당군이 백강(지금의 금강)에 상륙하지 못하게 하고 신라군이 탄현(지금의 충남 대덕)을 넘지 못하게 해야 한다는 흥수의 견해를 묵살했다. 그리하여 백제군은 백강에 상륙한 당군에게 대패했고, 신라군은 이미 탄현을 넘어 황산벌로 진군했다. 의자왕은 계백에게 5,000명의 결사대를 주어 이를 막게 했다. 계백은 가족을 죽인 뒤 비장한 각오로 출전하여 황산벌에 먼저 도착하고 3군데에 진영을 설치했다. 신라군은 군사를 3갈래로 나누어 4번을 싸웠으나 이기지 못했고 군사들은 지쳤다. 이때 신라의 장군인 흠춘이 아들 반굴을 적진으로 보내 힘껏 싸우다 죽게 했다. 그러자 장군 품일 역시 아들 관창을 내보내 단신으로 적진에 뛰어들게 하여 결국 죽게 했다. 반굴·관창의 용감한 모습에 감격한 신라군은 죽음을 각오하고 진격하여 크게 승리했다. 백제군은 중과부적으로 대패하여 계백이 전사했고 좌평·충상·상영 등 20여 명이 사로잡혔다.그 전투에서 신라군이 당군과 합세하기로 약속한 기일에 늦었다고 하여 당군과 신라군 사이에 마찰이 생겼다. 결국엔 이 전쟁의 결과(패전)으로 백제는 역사속의 나라로 사라져 버렸다.

 

2. 백강구(현재 금강하구) 전투

7세기 중엽 신라와 당나라 대 백제와 왜 이렇게 4나라의 국제전은 규모만큼이나 역사적 의의 또한 자못 크지만 의외로 인식조차 미미한 것은 아마도 우리측 기록이 너무 간략한 탓일지도 모른다. 하지만구당서일본서기에는 자세한 기록이 전해진다.660년 여름 의자왕의 항복으로 운명이 다한 것 같은 백제의 진영에서는 어떻게든 남은 힘을 모아 나라를 다시 일으켜 보려는 눈물겨운 노력들이 있었다. 그 중심에 福信이 있었는데 무왕의 조카인 福信은 왜의 여왕 사이에게 당의 포로100명을 바치며 군사 지원과 함께 의자왕의 아들 扶餘豊을 보내 줄 것을 부탁한다. 여왕은 적극 협조를 약속하고 군사 지원을 준비했다.여왕의 이런 의지는 뒤를 이은 아들 텐지에게도 그대로 이어졌고 이에 힘입은 福信은 끈질긴 항전을 이어갔다. 드디어 6619월 부여품이 왜군5000여명을 이끌고 귀국해 복신과 힘을 합쳐 웅진도독부를 공격해 당군을 위협했다. 6633월에는 텐지가 추가로 병선 170척과 함께 지원부대를 보내왔다. 당에서 파견된 대방주지사 유인궤는 신라군과 합류해 금강 인근의 백제군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660년 백제 멸망 때 비극이 또다시 재현되었다. 백제 진영 내의 헤게모니 싸움으로 부흥운동의 핵심인 “福信이 승려道琛을 죽이고 다시 "扶餘豊이 福信을 죽이는 정변이 일어났다. 이 사건은 신라와 당나라 측에 전력 만회와 공세를 준비할 수 있는 시간을 벌어준 셈이었다. 거기다 7월이 되자 당나라에서는 손인사가 태브 부여웅과 함께 당 군 7000명을 이끌고 웅진에 도착했다. 이 소식에 왜와 텐지는 다시 1만의 병력을 출동시켰다.유인궤는 당의 육균과 수군은 신라 수군과 연합해 백강에서 신라의 육군은 주류성을 포위한다는 전략을 세우고 작전에 돌입했다.813일 신라군은 백강구 주변을 점령하고 백제의 지원군이 주류성으로 가는 루트를 봉쇄했다. 당의 지원부대고 백강구에 도착해 신라군과 합류했다. 827일 선발대에 이러 다음날 도착한 왜의 군대는 휴식과 전열 정비의 여유도 없이 즉시 당군에 대해 정면공격을 시작했다.결과는 왜군의 大敗였다. 이날 광경은 구당서에서는 왜군의 배400척을 불태웠는데 연기가 하늘을 뒤덮고 바닷물을 붉게 물들었다라고 묘사하고 있다.그 사이 육상에서는 신라군과 백제군 사이에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삼국사기”“신라본기에서는 백제의 정예기병이 배를 지키고 있었는데 신라의 용맹한 기병이 선봉이 되어 먼저 언덕의 진리를 깨뜨리니 라고 하여 기선을 제압했음을 말해주고 있다.97일 마지막 보루였던 주류성이 무너졌다. 결국 부여풍은 고구려로 달아났고, 왜군은 백제의 좌평,달솔 등의 무리와 함께 본국으로 떠났다.이로써 3년 동안 끈질기게 이어지던 백제 부흥운동은 막을 내리게 되었다.